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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끝나"고 "문명이 충돌"할 때 미국이 한 일은?

홍기빈의 '현미경과 망원경' <20> 미정부-월가-헤지펀드 네트워크의 탄생

***III. 어제의 세계 : 지구화, 인수 합병, 신자유주의**

***⑤ 인수 합병 축적 양식의 사회적 조건과 한계**

***클린턴 시대의 달러-월 스트리트 레짐**

그런데 여기서 꼭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렇게 코스모폴리탄적인 외양을 취한 90년대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미국이라는 일국의 국익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점이다.

'공식적 담론'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모범 시민'이라면 90년대의 워싱턴 컨센서스의 주장 그리고 그에 따라 변해가는 지구촌의 실제 세계가 아마도 "기술 진보와 인류 이성의 발전에 따른 역사의 불가항력"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깨자마자 커피를 마시며 지구촌 이곳저곳의 '황소(bull)'와 '곰(bear)'의 이야기를 듣고 하루를 시작한다. 직장의 꽃 피는 화제는 뮤추얼 펀드와 닷컴 창업 이야기이다. 집에 돌아와 읽는 교양 서적은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는 끝났는가>나 사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따위의 교양 서적을 읽으며 하루를 정리한다.

하지만 이 어떤 것도 이러한 현상을 추동하는 구체적인 인간 집단의 노력이 없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이 명제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필시 모종의 '신의 섭리'를 믿는 종교인이거나 '역사의 발전 법칙' 따위를 믿는 구닥다리 헤겔주의자 공산주의자밖에 없다. 헤겔의 거대한 철학 체계의 중심에서 가장 빗나간 명제를 그것도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éve)가 프랑스 정권과 학계를 오가면서 그 필요에 따라 멋대로 변형해놓은 데에다 또 다시 알란 블룸(Alan Bloom)이라는 악명 높은 보수주의자의 시각으로 굴절시킨 후, 또 다시 어거지로 굽혀진 니체의 명제랑 칵테일 해놓은 이 후쿠야마의 책을 읽고서 진지한 철학을 가진 독자라면 진저리를 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거두절미 설명도 없이 일본을 갑자기 아시아와 독자적인 '문명'이라고 우기는 무식한 주장을 오로지 하버드 교수라는 이름 자리로 밀어붙이고 있는 헌팅턴의 책은 독자로 하여금 문자와 종이의 발명 자체에 대한 회의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 책들은 90년대 지구촌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러면 식민지 신문의 지식인들은 이 두 사람을 '석학(碩學)'이라는 명칭을 붙여 하늘로 떠받들기에 바쁘다. 기자들은 잘 읽지도 않고서 알쏭달쏭한 어휘로 찬사를 남발하고, 지식인 범주에 끼는 데에 혈안이 된 이들은 이 저자들의 권위에 도전할 불경한 생각 따위는 추호에도 없다.

하지만 이 두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과정에는 CIA 의 출연 기관인 랜드 회사(Rand Corporation)가 있고, 출판, 방송, 언론을 하나로 꿰어 90년대에 출현한 각종 미디어 거대 기업(conglomerate)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이 정당화시킨 90년대 미국의 세계 전략 – 워싱턴 컨센서스 그리고 그럼에도 계속되는 미국의 군사화 – 이 있다. 아마도 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 뉴욕 타임스, 퓰리처 상 등등의 이름이 동원되면 사대주의에 찌든 주변부의 지식계는 그대로 이 책을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멈보점보(mumbo jumbo)"를 외치기 시작한다는 것을①.

책 두어 권이 이러하다면, 그토록 미증유의 위력을 발휘한 워싱턴 컨센서스와 지구화에 미국 정부가 손 털고 물러나 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부자연스럽다. 여기에서 피터 고완(Peter Gowan) 등이 주장하듯이 이미 70년대 초부터 형성된 바 있는 미국의 '달러-월 스트리트 레짐(Dollar-Wall Street-Regime)'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②.

1971년 닉슨 대통령의 달러-금 태환 중지 선언 이후 세계 통화 체제는 현실적으로(de facto) 달러 본위제로 운영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유사 이래 통화 발행을 독점할 수 있는 권력은 그에 따른 권력(seignorage)을 쥐게 마련이다. 미국이 이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하면 더 이상한 일이다. 이미 1971년 직후 시카고의 농산물 시장 등에 존재했던 선물 옵션 시장은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달러와 세계 외환 선물 시장으로 변모하였다. 여기에 80년대부터 꾸준히 지속된 미국 내의 금융 탈규제는 미국이 변화된 세계 금융 환경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제반의 조건을 성숙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피터 고완은 이러한 조건을 미국의 국익을 위해 체계적으로 활용할만한 계획이 미국 국가 차원에서 구체화된 것은 클린턴 행정부였다고 보고 있다③. 골드만 삭스 은행 출신의 루빈 재무장관을 위시하여 현재 하버드 대학 총장으로서 최근 "70년대 서울의 100만 10대 창녀 부대" 발언으로 망신을 한 바 있는 로렌스 서머스 그리고 물론 연방 준비 위원회의 앨런 그린스펀 등으로 짜여진 드림팀 내각은 이러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결과 엄청난 규모로 불어난 국제 금융 자본의 흐름을 십분 이용할 수 있는 정부 – 월 스트리트 – 헤지 펀드의 네트워크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90년대에 몇 번이나 국제적 문제가 되었던 조지 소로스 등등의 헤지 펀드(hedge fund)의 위험성에 대한 공식적 담론의 입장은 아주 명쾌한 것이다. 시장은 기본적으로 수익성과 효율성을 따라 움직이는 기적적인 기구이다. 그리고 금융 시장에서의 가격 부침은 그러한 '실물' 시장에서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할 뿐이다. 투기와 헤지 펀드의 움직임은 그러한 대세의 흐름을 조금 앞서서 표현해주는 '제비'일 뿐이지 계절 자체를 만들어내는 실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깡드쉬나 스탠리 피셔 같은 IMF 관리들의 성명이었다.

과연 그랬을까. 90년대에 전 세계를 누볐던 유명 헤지 펀드로 타이거 펀드,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 LTCM(Long Term Credit Management fund)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이런 저런 나라의 통화 등을 건드리면서 움직일 수 있었던 돈의 규모가 과연 그런 '제비'에 불과한 소량이었을까. 이들 펀드의 자본 자체는 제한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들이 그 워싱턴과 월 스트리트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미국의 은행들로부터 차입할 수 있는(물론 이들 은행의 대부는 연방 준비위와 완전히 무관하게 벌어질 수 없다) 금액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IMF 자체가 이미 공식적으로 이들 헤지펀드가 자신들 자본의 20배의 액수를 은행에서 레버리지로 차입하여 움직인다고 인정한 바 있고 조지 소로스는 자신이 차입할 수 있는 은행 융자의 크기를 50배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파산해버린 LTCM의 경우 그 크기를 따져보니 250배에 달했다는 것이 밝혀진 바 있다. 주요 헤지 펀드의 자본금 총액은 당시 대략 3천억 달러로 잡고 이들의 레버리지 융자의 크기를 대략 100배로 잡는다면, 결국 이들이 미국 금융망을 이용하여 움직인 돈의 크기는 30조 달러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④. 물론 이들 헤지펀드가 완전히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이 크기의 자금은 결코 '제비'라고 할 수도 없음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미국 정부도 워싱턴 컨센서스에 포괄된 인사들도 이러한 전지구적인 상품화와 금융 자본의 축적이 아무런 사회적 충돌없이 벌어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일 수는 없다. 이미 이들은 80년대 중반 멕시코나 다른 개발도상국의 '구조 조정' 경험 속에서 어떤 사회적 반항이 조직될 수 있는지를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사회적 반동을 흡수할 수 있는 각종의 전술을 백방으로 마련해 두어야 했다. 이러한 전술을 이론적 실제적으로 지도하고 뒷받침하여 전 세계적 지구화가 무리 없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도 미국 정부의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이었다⑤.

***<주(註)>**

①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어떤 대상을 두려워하면서 그걸 달래기 위해 우르르 엎드려서 외치는 주문을 흉내내는 소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게 유럽인들에게 그렇게 보인 것인지 실제 아프리카의 관습인지는 물론 알 수 없다. 하지만 서양과 미국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하면 별 생각 없이 우선 그 앞에 달려가 108배를 바치기 바쁜 21세기 주변부 지식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데에는 아주 요긴한 단어이다.

② Peter Gowan, Global Gamble: Washington's Faustian Bid for World Dominance, (London: Verso, 1999). 이 책은 <세계 없는 세계화>(홍수원 옮김, 시유시, 2001)로 국내에 번역됐다. 저자는 New Left Review의 편집자를 역임했다.

③ 같은 책, 39쪽.

④ 같은 책, 96~98쪽.

⑤ 이러한 지구화에의 반항에 대한 각종 대응 전술에 대해서는 John Williamson ed. The Political Economy of Policy Reform, (Washington D.C.: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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