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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추기경의 부친 '정원모'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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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 추기경의 부친 '정원모'는 누구인가? [현대사 발굴] 일제하 전형적인 행동가형의 투사
정진석(鄭鎭奭) 추기경이 8일자 한 일간지가 보도한 대담에서 자신의 부친 정원모(鄭元謨) 씨의 전력과 가족 관계에 대해 "나 자신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지난 2월 28일 〈프레시안〉의 첫 보도를 통해 알려진 부친 정원모 씨의 전력은 일제시대에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해방 후에는 '월북 및 북한정권 내의 부상(副相·차관) 역임, 그리고 숙청'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정 추기경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을 "사실"이라고 확인하면서 자신의 소회를 담담하게 밝혔던 것.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의 비극'**

이렇게 정 추기경의 가족사가 본인이 시인한대로 개인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이 함께 지고가야 할 멍에와 같은 것임이 확인되면서 그의 부친 정원모 씨의 면모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누대(屢代)의 가톨릭 집안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게 됐으며, 가족과는 어떻게 생이별하기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월북 후 북한 정권 내에서 입신하고 숙청당한 경위는 무엇인지 등이 모두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들이다.

정원모 씨의 이같은 일생은 정 추기경이 언급한대로 20세기의 한국인이 짊어졌어야 할 비극적 요소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모든 것을 알려주는 자료나 기록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일제 하의 비밀결사와 북한 정권 내의 일만큼 지금 우리에게 비밀스런 것이 또 있을까? 편편이 흝어져 있는 증언과 자료들을 모아 정원모 씨의 흔적을 재구성해본다.

정 추기경과 그의 부친 정원모(鄭元謨) 씨는 여러 모로 닮은 면모가 있는가 하면 서로 다른 모습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놀랄 만큼 닮은 얼굴, 화학공학에도 똑같이 인연**

당연한 일이지만, 우선 두 사람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놀랄 만큼 닮았다.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 그러면서도 머리를 빗어 넘겨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가 거의 판박이를 한듯하다. 두 사람 다 대단히 단정하면서도 이지적이고 준수한 용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정 추기경이 사제의 길로 들어서기 전 서울대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재학하며 한때 공학도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와는 일생을 두고 한 차례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는 부친 정원모 씨 역시 1927년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뒤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만주의 뤼순(旅順) 공과대학에 진학했고, 광복 이후 북한 정권 안에서 기술관료의 길을 걸어 마지막에는 화학공업성의 부상(副相ㆍ차관)까지 지냈던 것.

부자가 모두 화학공학과 일정 정도 연을 맺었던 셈이니 우연의 일치라고 넘기기에는 무언가 맥이 닿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원모 씨의 월북 이후 행적은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으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들과 주변인사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한 가지 뚜렷한 맥이 나타난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경 월북한 뒤 일관되게 비철금속 계통의 일을 했다는 것.

2000년 비전향 장기수로 북송된 윤희보 씨에 따르면, 정원모 씨는 월북 이후 산업관계 행정부서에서 '흑색금속' 관련 업무를 맡아보는 과장 직을 역임했다. 윤 씨 자신이 남파되던 1952년까지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 기간 중 정원모 씨를 만났다는 인척들의 증언도 있다. 정 씨는 1950년 6·25 발발 직후 '시찰대'라는 명목으로 서울을 방문했고 그 때 친형인 윤모(允謨) 씨 등 친척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원모 씨는 "북한의 따발총을 개발하는 데에 내가 여러 가지로 기여했다"는 얘기를 했던 것으로 이들은 기억하고 있다.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고 그 '기여'라는 것이 군수산업의 소재 분야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 아닌가 추론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이후 1950년대의 정원모 씨 행적은 국내에서 출판된 몇 가지 북한관련 인명사전 등에서 확인된다. 즉, △1953년 5월 화학건설공업성 화학공업국장 △1955년 1월 화학공업성 부상 등을 역임한 것. 기술관료로서 오를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의 기록은 대단히 암울하다. 느닷없이 △1957년 5월 시멘트공장 지배인이 되더니 △1959년 공직 박탈이라는 기록을 끝으로 공식무대에서 그는 자취를 감춘다. 원래 박헌영 계열이 아니었기 때문에 6ㆍ25 직후의 남로당 숙청은 피해 갈 수 있었으나 그 직후 연안파 및 소련파 숙청의 계기가 된 1956년 이른바 8월종파투쟁의 칼날까지 피해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생으로 추정되는 정원모 씨는 생존해 있다면 올해 우리 나이로 98세가 된다. 1940년 경 다시 꾸린 가정에서 태어난 정 추기경의 이복형제들 역시 북한 어딘가에 살고 있을 수 있다. 불원간 교황의 방북이 실현될 경우 교황을 영접하기 위해 평양교구장 서리인 정 추기경이 북한 땅을 밟을 것이고, 그때 이 '닮은꼴'의 부친 또는 이복형제들과 상봉하는 장면을 미리 상상해보는 것도 완전히 허황된 그림만은 아닐 것이다.

***'신앙인의 길'과 '투사의 길'**

정 추기경과 그의 부친 사이에 공통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 추기경을 기준으로 할 때 4대 째 독실한 동래 정씨(東萊 鄭氏)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이들 부자 가운데 아버지는 그 신앙을 버리고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에 투신해 북한 정권의 고위직에까지 오른 반면 아들은 집안 전래의 신앙에 의탁해 오늘날 가톨릭 교황의 선출 및 피선출권을 동시에 갖는 추기경의 반열에까지 오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자 간에는 성품도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으로 얘기된다. 정 추기경에게 늘 따라다니는 표현은 '온화하고 후덕한 인품'이라는 말이다. 생활 자체도 대단히 소박하고 소탈하다고 얘기된다.

그에 반해 부친 정원모 씨의 성격에 대한 증언은 조금 다르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투사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다.

다시 윤희보 씨의 증언. "정원모 씨는 키가 크고 날렵하며 수재형인 데에다 쾌활하고 단호한 성격을 가진 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당히 격정적인 성격이었다. 일제 하에서 고문을 당한 것이 분명한 데에도 괴로움을 내비치지 않고 오히려 일제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는 등 대단히 늠름한 모습이었다."

윤 씨는 2000년 7월 기자와 만났을 때 자신이 정원모 씨의 면모를 이렇게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게 만든 인연을 소개했다.

"1944년 12월 그믐날쯤으로 기억한다. 일제 말의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이 적발됐다. 그는 이 협의회의 정식 멤버는 아니었으나 반일(反日) 전민(全民)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동생과 함께 경기도경찰부에 잡혀와 고문을 당했다. 나도 같이 있었다. 정 씨는 13년만에 다시 일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협의회 조직에서는 2선으로 물려놓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조사를 마치고 1945년 여름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가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나를 지도한 운동 선배인 김일수 서중석 서완석 안형진 씨 등과 가까운 사이여서 늘 '선배의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증언에 비추어볼 때 정원모 씨는 1931년 4월 경 서울-상해파가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의 일원으로 구속되어 1935년 출옥한 뒤에는 좌익 운동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개인적인 연만 유지하다가 일제 말기 좌파 운동가들이 망라된 항일전선체와 관계를 맺고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사건 당시 그는 윤자영, 오성세, 김일수 등이 주도하는 국내공작위원회의 '학생부 야체이카(세포)' 책임자였다. 이 사건은 전국 조직에서 120여 명이 구속되고 전체 관련자는 500~600명으로 꼽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1925년 말) 이후 최대 사건"이었다는 것이 당시 신문들의 평가다. 관련 학자들은 "이 위원회는 국내에 뿌리를 두고 진행된 1930년대 초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인척들에 따르면, 정 씨는 출옥 후 부친과 함께 원산으로 가 건어물 장사를 하는 등 개인사업에 종사하다가 1940년경 재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조공 재건운동 또는 독립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을 때에도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등 일제와는 확실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원모 씨 4형제 가운데 큰형님만 빼놓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좌익운동을 했다"는 것이 인척들의 설명이다. 앞서 윤희보 씨의 증언과 맥을 같이 한다.

이같은 곡절 끝에 해방 정국을 맞은 정 씨는 다른 좌익 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 윤희보 씨의 증언.

"정 씨는 해방을 맞아 출옥한 뒤 일단 서울에 머물며 노동자를 조직하는 일을 했다. 1945년 9월12일경 종로의 공평동 남조선전기 근처에서 노동자와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설하던 모습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 직후 월북한 것으로 안다. 박헌영 세력 아래서는 할 일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학생 시절부터 전형적인 '행동가' 형의 좌익 활동가였던 정원모 씨의 그 이후 북한 내 행적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기술관료로 부상(副相)이라는 고위직까지 올라갔다가 안타깝게도 숙청으로 공개무대에서 사라져갔다.

〈박스 시작〉

***일제시대 언론에 나타난 정원모의 면모**

동아일보 1934년 3월13일자는 조선공산당 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의 두 번째 공판 소식을 전하면서 정원모 씨의 문답 내용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다음은 그 주요내용.

(…) 산하(山下) 재판장은 피고 정원모로부터 심리를 시작하고 피고에 대하야 소화 6년 4월경에 시외 한지면 하왕십리(漢芝面 下往十里) 피고의 집에서 오성세(吳祘世)를 만났을 때에 오성세로부터 조선공산운동에 대하야 말이 있을 때에 조선공산운동의 지금까지의 경로를 보면 간부 간의 쟁투로 말미암아 그 목적을 도저히 실현할 수 없으므로 이 기회에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하야 노동자 학생 청년 등을 망라하야 조직하자는 말이 있지 않았으냐는 물음에 대하야 피고는 전연 그러한 일이 없었다고 부인하였다.

재판장은 그 뒤를 이어 피고를 동 위원회에 가입하도록 오성세로부터 권유한 바가 있어서 피고가 가입한 후 그해 4월경에 피고의 집에서 오성세 강문수 등이 모이어 가지고 오성세의 발안으로 오는 5월 메이데이에 선전삐라를 작성하야 시내 요처와 중등 이상의 학교에 산포하자고 상의하였다는 일이 없었느냐고 물은 즉 피고는 동 위원회에 가입한 일은 절대로 없고 삐라를 산포하자는 일에는 찬성하였다고 대답하야 피고 정원모에 대한 심리를 마친 후 손명섭(孫明燮) 등 4인의 사실심리는 순서를 이어 대체로 마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일제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한국어로 발행되던 정기간행물 '선봉'의 1931년 8월20일자(독립기념관 보관)는 이 국내공작위원회의 적발 소식을 전하면서 정원모의 활동상을 다음과 같이 중요하게 소개하고 있다.

재령, 평양, 대구, 광주, 거제도, 진주, 함경 각 중요도시에 순노동계급으로 산업적 적색단체를 조직하여 '메이데이' 격문을 산포하려고 80여 명의 투사들이 나섰다고 한다.

그 중 경기도를 맡은 오성세는 지난 8월30일에 공작위원회 학생부 책임비서 정원모를 시켜서 격문을 관수하에서 인쇄하여 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 7명과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1명 등 합 8명으로 산포하였다.

그래서 각각 도시 또는 도별로 사명을 맡은 투사들은 동에서, 서에서, 북에서, 남에서 78명을 검거하여 지난 6월18일에 제일차로 경성검사국으로 압송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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