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다가오는 세계: 군사화, 인플레이션, 불황**
***② 인플레이션이라는 마술**
앞 장에서 우리는 "인수 합병을 통한 차등적 축적이 여의치 않을 경우 지배적 자본 집단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차등적 축적을 꾀한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인플레이션이 지배적 자본 집단과 일반 자본, 그리고 자본과 노동 사이에 커다란 재분배 효과를 가진다는 주장이 되므로, 인플레이션이 실물 경제에 영향을 주지 않는 '중립적' 현상이라는 위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대립된다. 과연 어느 쪽이 옳을까. 양쪽의 주장과 논리를 들어보면 다 그럴듯하다 아니할 수 없다. 결국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닛잔/비클러는 그러한 경험적인 조사를 통하여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존 경제학의 두 가지 핵심 주장을 정면에서 논박한다. 첫째, 인플레이션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화폐적 중립적" 현상이 아니라 대단히 강력한 소득 재분배 장치이다. 둘째, 인플레이션은 경제 현상에 대한 통념과는 달리 경제 성장이 아닌 경제 침체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70년대 주류 경제학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었던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경기 침체(stagnation)와 인플레이션이 함께 벌어지는 현상)'은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점.
***"인플레이션은 중립적 현상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대답은 아주 분명하다. "인플레이션은 소득 (재)분배와는 관련이 없다". 경제가 '실물' 부문과 '화폐'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후자는 그저 전자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화폐 상품(numéraire)과의 교환 비율을 통하여 숫자를 매겨주는 장치에 불과하다. 즉 실물 교환 과정에 가격이라는 이름을 덮어주는 얇은 베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고전파의 이분법(classical dichotomy)'라고 한다.
따라서 가격의 전반적 상승을 일컫는 인플레이션이라는 현상은 실물 부문에서 기인하는 현상일 수가 없다. 단지 화폐가 시중에 너무 많이 풀리는 바람에 화폐의 상대적 가치가 저하하여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MV = PQ(M은 통화량, V는 화폐 유통 속도, P는 가격 총액, Q는 총 거래 수량)라고 하는 화폐 수량 방정식이다. 거래량과 유통 속도는 각각 (완전)고용 수준과 제도 및 관습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격 수준 P는 결국 통화량 M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플레이션은 상품의 명목치만 바꿀 뿐, 현실의 '실물' 경제나 실질 소득에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밀튼 프리드먼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은 이러한 관점을 간단히 요약한다.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며 중립적 현상이다".
아주 단순한 예를 들어본다. 하룻밤 자고 났더니 모든 물건이 10배로 커졌다고 하자. 우리 세상에는 어떤 변화가 올까.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모든 물건"이 10배로 커졌으므로 그들 간의 크기의 비율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하룻밤 자고 났더니 모든 물건의 가격이 10배로 커졌다고 하자. 우리 경제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모든 물건"이 10배로 비싸졌으므로 그들 간의 상대 가격–즉 교환 비율–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단순명료한 논리적 힘 때문에 이 화폐 수량설에 입각한 (신)고전파의 인플레이션 이론은 16세기의 쟝 보댕, 18세기의 데이비드 흄, 20세기의 피셔와 프리드먼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문제는 그 "하룻밤 사이"라는 가정의 비현실성이다. 현실 세계의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모든 물건이 일제히 같은 비율로" 뛰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분명히 각각의 상품에 따라 산업에 따라 인플레이션의 진행 속도와 정도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에 각 산업 부문별로 또 계급 계층 별로 이익을 보는 자와 손해를 보는 자가 분명히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위에서 본 (신)고전파 이론은 이러한 현실적 과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밀튼 프리드먼은 이러한 인플레이션의 현실적 과정을 무시하기 위한 장치로 하늘에서 돈이 쏟아지는 "돈 벼락(money rain)"의 예를 즐겨 쓰고 있다. (신)고전파의 이 비현실적 가정의 고질적 버릇은 수 백 년전 데이비드 흄의 저작에도 나타난다. "영국 전 화폐의 5분의 4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진다고 해보자…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모든 노동과 상품들의 가격이 비례적으로 하락하지 않겠는가?"① 아무리 '이론 경제학'이라지만 어떻게 이토록 비현실적인 가정 위에서 논리를 전개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불균등하게 진행되는 것이 현실의 인플레이션의 모습에 더욱 가깝다면, 시장에서의 가격 결정력(pricing power)이 더 큰 집단은 더 먼저 더 빨리 가격을 올릴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에 따르는 이득–완전히 불로소득이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인플레이션은 더 큰 권력을 가진 집단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소득 재분배를 가져오는 대단히 효과적인 축적 양식이라는 닛잔/비클러의 주장이 타당성을 얻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의 이론적 사변은 별 소득이 없다. 어느 쪽이 옳은 지를 판단하려면 실제로 벌어진 바가 어떠했는지를 경험적으로 보는 수밖에 없다. 닛잔/비클러는 20세기 후반의 미국 경제를 대상으로 실제 경험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자본 및 노동의 소득 재분배**
[그림 1]
(caption : 기업 주당 수익은 S&P 500 지수에서 취하였다(주식 가격 대 PER). 임금률은 민간 부문에서의 평균 시간당 수익이다. 계열은 3년 이동 평균으로 그려졌다. 출처: Global Financial Data (series codes: _SPXD for price; SPPECOMW for price/earnings); U.S. Department of Commerce and U.S. Bureau of Labor Statistics through WEFA (series codes: AHEEAP for the wage rate; WPINS for the wholesale price index)
[그림 1]은 1950년대 이래 미국 경제에서 자본과 노동의 소득 분배의 추이와 물가 지수의 추이를 비교해 보이고 있다. 가느다란 선으로 나타난 계열은 주당 수익(EPS: earnings per share)을 임금률로 나눈 것으로서 이것이 클수록 노동에서 자본 쪽으로 소득 분배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임금률은 민간 부문에서의 시간당 평균 임금으로 구하였다. 닛잔/비클러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소득을 개인 차원에서 포착하고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지표를 선택하였다고 말한다. 굵은 선은 도매 물가 지수의 연간 변동률을 백분률로 표시한 것이다.
장 보댕에서 밀튼 프리드먼까지 5백년의 전통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림에 나타난 바 물가 상승률과 자본-노동의 소득 (재)분배의 변동은 대단히 긴밀한 연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50년이라는 이 계열의 시간 지평을 볼 때 그리고 미국 경제가 현대 경제학 논의의 거의 표준적인 모델인양 다루어져 왔다는 점을 볼 때에 이러한 관측 결과는 결코 우연적인 것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최소한 지난 50년간 미국 경제에서 인플레이션은 항상 노동에 대한 자본 측의 소득 확대를 수반하였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본 쪽이 인플레이션의 와중에서 얻는 소득의 재분배의 폭은 점점 커져 20세기 말엽이 되면 대단히 극적인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축적 양식으로 활용하는 자본의 권력이 미국 자본주의에 제도적으로 안착되어 왔다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지배적 자본 집단 및 중소 자본의 소득 재분배**
닛잔/비클러는 이번에는 지배적 자본 집단과 여타의 일반적 자본 사이의 소득 재분배에 인플레이션이 과연 “중립적”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는 그래프를 제시한다.
[그림 2]
(caption) 마크업(markup)은 매출에 대한 순 이윤의 비율이다. 포춘 500 마크업은 매출 수입에서 세금 후 이윤의 비율로 계산한다. 영업 부문 마크업은 전체 세금 후 법인 이윤 및 IVA와 CCA(국민 소득 계정에서 취하였다)를 전체 영업 영수증(business receipts)(IRS에서 취하였다)로 나눈 것이다. '마크업 비율'은 그 포춘 500 마크업을 영업 부문 마크업으로 나눈 것이다. 주의: 1993년까지는 포춘 500에는 산업 기업(매출 수입의 절반 이상이 제조업 및 광업에서 나오는 기업)만 포함되었다. 1994년 이후로 모든 기업이 포함되게 되었다. 1992-3의 기간 동안 포춘 5백대 회사의 자료는 SFAS 106 특별 부과가 빠진 채로 보고 되었다. 모든 계열은 3년 이동 평균으로 다듬어졌다. 출처: U.S. Department of Commerce through WEFA (series codes: ZAADJ for total corporate profit after tax with IVA and CCA; WPINS for the wholesale price index); U.S. Internal Revenue Service; Fortune.
[그림 2]에는 두 개의 계열이 그려져 있다. 첫째, 굵은 선으로 그려진 것은 도매 물가 지수 연간 변동률이며, 가느다란 선으로 그려진 것은 포춘 5백대 기업을 지배적 자본 집단의 대표로 삼아 그 마크업을 전체 자본의 마크업으로 나눈 것이다. 마크업(mark-up)이란 보통 매출에서 순 이윤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하며 해당 기업이 시장에서 어느 만큼의 가격 결정력(pricing power)을 갖는가를 평가하는 지표로 쓰인다. 따라서 가느다란 선은 전체 자본에 대해 지배적 자본 집단이 보유하는 독점적 권력과 차등적 이윤의 비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닛잔/비클러는 이를 칼레츠키(Michal Kalecki)가 독점 자본의 시장 권력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했던 '독점도(degree of monopoly)'의 개념과 비교한다②. 즉, 이 두 계열을 비교해보면 과연 지배적 자본 집단이 자신들의 우월한 가격 결정력 등을 이용하여 인플레이션을 틈타 전체 자본에 대한 이윤폭을 늘리는 '깊이 지향'의 차등화 축적이 벌어졌는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다시 한번 결과는 5백년 전통의 (신)고전파 이론의 참담한 패배이다. 인플레이션이 "중립적"인 현상이기는커녕 지난 50년간 미국 경제에서 두 계열의 상관관계는 너무나 긴밀하여 거의 체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항상 대기업이 자신들의 가격 결정력을 이용하여 평균적인 기업들에 대해 차등적인 이윤을 얻는 기회로 사용되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소한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경제에서 보이는 바, 인플레이션은 결코 "중립적" 현상이 아니다. 노동에서 자본으로, 또 중소 규모 자본에서 지배적 자본 집단으로 소득이 재분배되는 것과 대단히 긴밀한 연관 관계를 갖는 조직적 체계적 현상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하다. 그래서 닛잔/비클러가 주장하듯, 인플레이션은 자본이 노동을, 또 지배적 자본 집단이 평균적 자본을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축적을 가속화시키는 '축적 양식'이라는 가능성이 점점 짙어진다.
***<주(註)>**
① David Hume, "Of the Balance of Trade"in E. Rotwein ed. Writings in Economics(Madison: Wisconsin Univ. Press, 1955). pp. 62~3.
② Michal Kalecki, "Costs and Prices", in Selected Essays on the Dynamics of the Capitalist Economy, 1933-197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1) pp.
43~61.
이 연재는 Jonathan Nitzan과 Shimshon Bichler의 연구를 소개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료는 www.bnarchives.net에서 구해볼 수 있다. 특히 4부의 내용은 그들의 최근 논문 "Dominant Capital and the New Wars." Journal of World-Systems Research 10 (2, August): 255-327.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논문은 //jwsr.ucr.edu/archive/vol10/number2/ 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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