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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보베의 '인터뷰 거부'가 감동으로 다가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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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제 보베의 '인터뷰 거부'가 감동으로 다가온 이유

[기자의 눈] "기자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 있어"

지난해 9월10일 멕시코 칸쿤의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장 앞에서 자결한 고 이경해 씨를 추모하고, 우리 쌀을 지키기 위한 농민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시위가 연일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WTO 쌀 협상에서 '쌀 시장 개방'을 저지하기 위해 또 한번 거리로 나선 농민들에게는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라는 결연함이 엿보인다. 사실 지난 40여년의 산업화 기간 내내 구석으로 몰리기만 했던 농민들에게 '쌀 시장 개방'이 가져올 충격은 사실상 사망 선고와 다름없다.

이런 농민들의 숨 가쁜 싸움에 국제 농민 운동 조직인 '농민의 길(비아 깜페시나, Via Campesina)' 회원들이 8일부터 같이 해오고 있다. 이 가운데 프랑스 농민 연맹(Confederation Paysanne)'의 지도자이자 저명한 반세계화 운동가인 조제 보베가 끼어 있다. 잘 알려졌듯이 보베는 1999년 프랑스 미요의 맥도널드 신축 공사장에 트랙터를 몰고 진입해 기물을 부순 것을 계기로, 세계적 반세계화 운동가로 부상했다.

보베의 방한 사실을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던 프레시안은 입국 전부터 그와의 인터뷰를 추진했다. 그에게 프랑스 농민운동과 반세계화 운동에 관한 심도 깊은 얘기를 듣는 것이, 농민들의 절박한 호소에 무관심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릴 좋은 계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베와의 인터뷰 기사는 나가기 어렵게 됐다. 보베가 프레시안과 예정된 인터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반전평화운동가로 시작해 '농민의 길'로"**

8일 아침 입국한 보베 일행은 귀국하자마자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식 기자 회견은 입국 다음날인 9일 오전에야 이뤄졌고, 10일부터는 지방을 순회할 예정이었다. 보베 일행의 일정을 담당하는 활동가와 여러 차례 얘기한 끝에, 약간 유동적이었던 그와의 인터뷰는 결국 9일 저녁으로 확정됐다. 인터뷰 장소는 그가 원하는 대로 광화문 열린마당의 천막 농성장으로 하기로 했다.

기자는 9일로 예정된 보베와 인터뷰를 위해 말 그대로 '벼락치기' 공부에 들어갔다. 우선 보베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아는 것이 필요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보베에 대한 자료는 그와 동료인 프랑수아 뒤푸르를 인터뷰한 대담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홍세화 옮김, 울력 펴냄, 2002)와 <녹색평론>에 실린 그의 글 한 편이 전부였다. 우선 출간 당시 훑어보기만 했던 그의 책을 다시 한번 정독했다. 아무래도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녹색평론사의 김종철 선생에게 자문도 구했다. 김종철 선생도 보베의 육성 그대로 그의 사상과 실천을 알리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며 중요한 대목들을 짚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급하게 질문거리를 뽑다 보니, 그와의 인터뷰가 더욱더 의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농부'인 보베는 처음부터 농촌 출신은 아니었다. 보베는 프랑스에서도 저명한 지식인 부모를 둔 유복한 중산층 가정 출신이다. 그는 대학 철학과에 들어간 뒤 반전평화운동가로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활동하다, 1975년 농민들과 함께 군대가 매입한 프랑스 미요의 농장들을 불법 점유해 농사를 짓고, 양을 치면서 '농민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반전평화운동가로서 정체성은 1987년 그가 프랑스 농민 연맹을 만들어 본격적인 농민 운동에 뛰어든 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1995년 그린피스 활동가들과 함께 '무지개 전사'호를 타고 남태평양으로 내려가, 프랑스의 핵 실험 재개를 온몸으로 막아서기도 했다. 2002년 4월에는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공격에 항의해, 이스라엘군의 포위를 뚫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로 들어가 '인간 방패'를 자임했다. 그에게 농민 운동과 반전평화운동은 애초에 별개라기보다는 하나였던 셈이다.

***"농민운동, 환경운동, 소비자운동은 하나"**

다른 눈여겨볼 점은 그가 프랑스에서 벌이고 있는 농민운동이 소비자운동이나 환경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그는 호르몬과 성장촉진제 등을 투여한 육류를 수입하는 일과 미국과 초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유전자 변형 작물(GMO)' 확대반대 운동을 주로 전개해왔다. 그는 1999년 맥도널드 신축 공사장을 트랙터로 밀고 들어가기 이전에도, GMO 농장에 들어가 GMO를 파괴하는 운동에 앞장서왔다. 보베가 주력하고 있는 이 문제는 프랑스의 소비자운동이나 환경운동의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이런 모습은 농민운동과 소비자운동, 환경운동의 연대 활동이 두드러지지 못한 우리나라의 상황과 많은 부분 비교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농업 강국인 프랑스 농민운동과 '쌀 시장 개방 반대' 등 식량 주권을 지키는 운동에 집중하고 있는 국내 농민운동과 차이점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하지만 농민들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연대하지 못하는 소비자운동이나 환경운동, 또 소비자운동이나 환경운동의 문제제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그간 사정을 염두에 둔다면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특히 이웃인 일본과 대만에 비교해 봤을 때도 'GMO 반대 운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고려할 때, 보베가 보여주는 실천은 농민운동, 소비자운동, 환경운동의 연대해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한편 보베의 개인사도 아주 흥미로웠다. 보베의 부모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프랑스에서도 저명한 지식인들인데, 공교롭게도 둘 다 생명과학자이다. 보베를 직접 만나보면 유창한 영어 실력에 놀라게 되는데, 생명과학을 공부하는 어머니를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서 어릴 적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국립농업연구소(INRA) 소장을 역임한 보베의 아버지는 유전공학의 열렬한 옹호자로 유명한 미생물학자이다.

보베는 "GMO가 인류를 구원할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아버지와 달리, "초국적기업과 국가가 주도하는 GMO를 비롯한 산업화된 농업"이 아닌 "소농이 중심이 된 '농민농업'"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다. 그것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와 같은 저명한 반세계화 운동가들이나, <녹색평론> 등에서도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던 것이다. 그가 '소농'을 농업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가능한 대안일까? 여전히 대규모 농업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우리 농민운동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까? 이런 질문들을 갈무리해 9일 저녁 광화문 농성장으로 향했다.

***"기자 만나는 것보다 활동가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

원래 오후 8시에 예정돼 있던 보베와의 인터뷰는 8시30분으로 미뤄졌다. 마침 최근 <WTO 시대의 농업통상법>(개마고원 펴냄, 2004)을 펴낸 농업문제에 정통한 송기호 변호사도 농성장을 찾을 일이 있다고 해, 보베와 같이 얘길 나누기로 약속을 해둔 터였다.

약속된 8시30분이 되자 보베 일행의 일정을 담당하는 활동가가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기자를 찾았다. 보베가 인터뷰를 미루거나 안 했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모처럼 맞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직접 보베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곤란하다"는 얘기였다.

보베는 "지금 지역의 농민운동 활동가들과 한국의 농업 현실과 '쌀 시장 개방' 문제를 토론하고 있는데, 기자를 만나서 내 얘기를 하는 것보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토론하는 것이 더 시급한 것 같다"며 "이것이 내가 한국을 방문한 이유에 더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기자를 만나는 것보다 활동가들을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었다.

활동가는 "간담회 중에 보베만 따로 불러내 기자를 만나게 할 예정이었으나, 보베가 간담회가 진행되면서 인터뷰에 응하는 것보다 간담회에 계속 참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아무리 선약이 돼 있었다고 하더라도 보베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자에게 출국 전에 다시 한번 자리를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2주 동안 틈틈이 준비해 온 인터뷰가 무산된 순간이어서 씁쓸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농업강국의 농민운동가가 우리나라 농업의 현실과 고민을 공유하기 위해 지역의 활동가들과 토론을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은 가슴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미국과 초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세계화'에 맞서는 가장 큰 힘을 실감했다고나 할까?

오히려 더 씁쓸한 것은 벽안의 농민운동가가 저토록 관심을 갖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우리 농업에 대한 우리나라 언론, 시민들의 무관심이었다. 어쩌면 보베가 인터뷰를 거부한 진짜 이유는, 길거리에서 박박 기는 자기들 곁의 농민들에게 무관심하면서, 명망 있는 외국의 농민운동가에게 열광하는 한국 언론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였을 수도 있다. "한국 농민에 관심 없는 한국 정부의 태도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 12일 단국대 강연장에서 보베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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