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레모에 덥수룩한 수염을 가른 채 시가를 입에 문 체 게바라(1928-1967년). 그가 살아있다면 오는 6월이면 만으로 77세다. 쿠바에서의 편안한 자리를 박차고 11개월 동안의 볼리비아 게릴라 투쟁 뒤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살됐던 게바라. 그는 쿠바에선 국민적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해마다 그의 생일(6월15일)과 기일(10월9일)엔 그를 기리는 각종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쿠바 국영언론들은 하루 종일 체 게바라를 기리는 특집 프로그램을 다루며, 수만명의 인파가 그를 기리며 행진을 벌인다. ‘젊은 개척자’라고 일컬어지는 쿠바의 소년단원들은 ”우리는 체 게바라처럼 공산주의를 위한 개척자가 되리라“는 구호를 외치며 깃발을 흔든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체 게바라를 일컬어 “위대한 지성과 문화를 지닌 뛰어난 인물”이라 평가했다.
쿠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나기는 전혀 어렵지 않다. 거리 곳곳에서 그의 얼굴이 보인다. 공공건물들엔 체 게바라의 대형 얼굴이 양각(陽刻)으로 새겨져 있고, 밤에도 볼 수 있도록 네온사인 장치를 한 것들도 있다. 기념품 가게는 들어서는 입구부터 체 게바라 관련 티셔츠들이다. 게바라의 삶과 관련된 책자들, 오디오 테이프, 비데오 테이프, CD, DVD... 다양한 종류의 게바라 관련 품목들이 여행객들의 주머니를 노린다.
아바나 시내 한가운데, 전 독재자 풀겐시오 바티스타가 머물렀던 대통령궁을 개조해 만든 혁명기념관을 가보면, 온통 게바라다. 죽은 체 게바라가 살아있는 피델 카스트로를 밀어낸 것처럼 게바라 유품 투성이다. 그가 쐈다는 M-1소총과 권총을 비롯, 옷과 모자, 연설문을 비롯한 각종 어록(語錄), 주고받은 편지들, 쿠바혁명 당시의 사정을 전하는 신문기사들...
***검소한 혁명가의 구멍 난 양말**
쿠바를 이끌고 가는 혁명주체세력 가운데 체 게바라는 특이한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의 국적이 문제였다. 혁명 성공 두 달 뒤인 1959년2월 게바라는 쿠바 시민권을 얻었다. 게바라는 바티스타 잔재청산에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카스트로가 유화적이고 온건한 입장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게바라는 카스트로는 그런 게바라를 최고검찰에 임명, 바티스타 정권 아래서 고문과 살인을 저질렀던 자들을 혁명법정에 세우는 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게바라의 서명 아래 수백명이 처형당했다. 그는 말했다. “혁명적 정의가 참된 정의다. 우리(혁명법정)가 사형을 선고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다. 바티스타 정권의 고위직을 지낸 자는 집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무렵 게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정권의 2인자로 비쳐졌다.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에게 전문가들을 조직, 토지개혁 작업을 맡기기도 했다. 이어 카스트로는 게바라를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했다. 게바라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카스트로는 게바라를 믿었다. 혁명적 시기에 혁명적 발상을 지닌 자만이 미국의 달러에 지배를 받지 않고 쿠바 독자적인 화폐제도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 체 게바라에게 중앙은행 간부들이 “당신은 경제전문가(economist)인가”라고 묻자, 그는 "아니야, 나는 공산주의자(communist)야”라고 답변했다. 당시 쿠바 화폐(페소)는 미국에서 인쇄됐다. 체 게바라는 이를 동구 공산권 국가인 체코에다 맡겼다. 그리고 자신의 서명(che)을 새 화폐 안에도 넣었다.
쿠바혁명 1년이 갓 지난 시점인 1961년2월 게바라가 산업부장관을 맡은 것도 그가 전문가여서가 아니라, 혁명주체로서의 추진력과 게바라 특유의 검소함과 열성에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체 게바라는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 이와 관련된 얘기 한토막. 헤르니모 임(한국명 임은조, 79세)씨는 우리 한국인 후손. 1921년 멕시코의 농업노동자들이 살길을 찾아 쿠바로 옮겨갔는데, 헤르니모 임씨는 이민 3세다. 그는 아바나대학 법대에서 카스트로와 함께 공부했고, 카스트로가 시에라 마에스타 산악지대에다 근거지를 마련했을 때 그곳에 군자금과 정보를 건네는 조직에 가담했었다. 혁명 뒤 임씨는 산업부에서 관리로 일했고, 산업부 국장에서 정년퇴직한 뒤 일종의 명예직인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을 지냈다. 임씨가 전하는 일화.
“산업부장관 시절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의 특명전권대사 같은 임무를 띠고 자주 외국으로 나갔다. 어느 날 게바라 장관이 출장을 가게됐고, 그의 가방을 꾸려주느라 열어보게 됐다. 그런데 게바라의 가방에는 양말이 세 켤레쯤 들어있는데, 모두 구멍이 난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급히 새양말을 구해 가방에 넣은 적이 있다. 그는 바티스타 정권 시절 미국 기업들에 빌붙어 제배만 채웠던 부패하고 무능했던 관리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산업부장관으로서 쿠바의 대미종속구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산업구조 조정에 힘썼던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에게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주문하곤 했다. 아울러 마오쩌뚱 지도 아래 독자적인 개력을 실천해온 중국 사회주의 발전 모델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카스트로는 경제개혁이 너무 급진적이면 부작용을 낳을지 모른다며 신중한 편이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혁명기엔 신속하고도 전반적인 개혁이 요구된다”고 생각했다.
***카스트로, “체 게바라를 닮아라!”**
쿠바에서 체 게바라는 교육자료다. 쿠바 독립영웅이자 시인인 호세 마르티(1853-1895)와 같는 반열에 올라 있는 인민영웅이다. 마르티는 노래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Guantanamera, guajira Guantanamera, 관타나모 아가씨, 촌뜨기 관타나모 아가씨)로 우리 귀에도 익숙한 노래말을 지은 인물이다. 카스트로 체제는 쿠바혁명의 정통성을 마르티와 연결시켜 풀이한다. 쿠바의 어딜 가나 사람들은 마르티의 동상과 마주친다. 쿠바의 관문인 아바나 국제공항의 정식이름이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다. 한 마디로 마르티는 '쿠바 혁명의 아버지‘다.
쿠바의 학생들은 그런 마르티와 게바라를 같은 범주 안에서 생각하도록 학교에서 배운다. 피델 카스트로의 어록을 보면, 그런 교육지침이 읽혀진다. “앞으로의 세대가 어떤 유형의 인간을 바라는가에 대해선 우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체 게바라를 닮아라!’ 어린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린 서슴없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체 게바라의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그러나 보름 동안 쿠바에 머물면서 만나본 젊은이들은 체 게바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인간 게바라를 좋아하면서도, 그의 치열한 혁명사상이나 실천적인 삶은 지금의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모습들이었다. 필자의 통역으로 수고해준 리버 프로메타(28, 쿠바 외국어대학 시간강사)는 쿠바공산당의 하부조직인 청년동맹 회원. 그는 쿠바 젊은이들이 정치와 역사에 갖기보다는 힙합음악 등 미국의 ‘쓰레기문화’에 더 빠져들고 있다고 개탄했다. “리바이스 미제 청바지를 입고 싶어하는 내 사촌 여동생은 체 게바라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캠론(미 힙합가수)는 잘 안다”
***혁명은 탈색되고 이미지로만 남았다**
체 게바라의 얼굴은 지구촌 어딜 가나 흔한 모습이 됐다. 극단적인 보기가 체 게바라 이미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현실이다. 지난 2000년 스미르노프 보드카 회사가 게바라의 얼굴을 신상품 선전에 써먹으려 했던 것은 게바라 상품화의 한 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게바라는 시가를 입에 즐겨무는 애연가이지 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체 게바라가 추구했던 사회혁명의 불꽃은 10여년전 동서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이미 사드러들었다. 그렇다고 지구상에서 빈곤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2001년 새천년을 맞았을 때 집계된 유엔 통계에 따르면, 하루 생활비 1달러 아래의 비참한 삶을 꾸려가는 이들이 11억8천만명, 하루 2달러 아래는 27억3천만명에 이른다. 체 게바라가 추구했던 인간다운 삶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사회를 이루려는 이상을 지닌 진지한 젊은이들, 특히 60년대와 70년대 남미의 젊은이들은 체 게바라를 모델로 삼고 사회변혁운동에 뛰어들었다. 자본과 시장개방을 키워드로 하는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이 대세를 이루는 오늘, 체 게바라는 변혁을 꿈꾸는 전세계 노동운동가나 빈민운동가들에겐 굽힐 수 없는 의지와 용기, 나아가 영감(靈感)을 주는 인물로 자리 잡아왔다. 20세기 후반 지구촌의 반자본-반미 집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김 없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대형 플래카드가 나부끼곤 한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체 게바라는 그저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오늘의 게바라가 갖는 이미지는 다양하다. 젊은이들은 게바라가 지닌 반항아로서의 이미지를 찾아냈고, 여인들은 게바라에게서 섹시한 남성미를 찾아냈다. 거대한 제국(미국), 그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친미독재정권의 군대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혁명가로서의 게바라가 밤새워 털쳐내려 애썼던 불안의 덩어리는 쏙 빠지고 없다. 혁명은 탈색되고 그저 반항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로서의 게바라만 남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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