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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의 '조선인학교'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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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의 '조선인학교'가 걸어온 길 ‘에다가와 학교’ 문제, 60년 조선학교 역사와 함께 해
도쿄도가 식민지 강제이주 역사와 그간의 협상과정을 무시하고 총련계 민족학교인 도쿄 에다가와 조선인학교를 제소했다. 일제 말기부터 조선인들이 일궈낸 조선인학교는 일본 사회 우경화와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강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재판을 진행중이다. 이에 에다가와 조선인학교 문제 대책위원회에서는 에다가와 학교뿐만 아니라 일본내 조선인학교의 전체 역사를 되짚어보는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60년 조선인학교 역사, “해외교포 교육역사에 유례없는 사변” **

“‘일시동인’‘내선일체’라는 말이 상징하듯, 근대 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탄압과 동화의 역사로 일관된다. 탄압과 동화의 정책 아래, 일본인은 조선인을 독자적 주체, 가치를 지닌 존재로 보지 않았다.” (나카야마 히데오 편 '재일조선인 교육관계 자료집', 1995. 명석서점)

일본인들은 조선과 조선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의 나라나 제대로 된 민족이나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아 왔고,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그 불씨가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부모들이 들었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일조선인들이 들어온 낱말 ‘조센징’이란 용어에 그 의식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우리에 대한 일본인들의 기층 사고를 이해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해 ‘조센징’이란 말에 담긴 어감을 이해하면 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본질을 강조할 뿐이다. 단, 쉽게 겉으로 드러내거나 쓰지 않을 뿐, 그러나 일본 땅에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은 그 공기를 다 느껴 알고 있다. ‘조선학교’, 아니 ‘우리학교’란 단어는 그래서 뜨겁다. 아직도. '우리'의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 감동을 주는 단어다.

해방 60주년은 재일조선인에게는 민족교육 60주년이기도 하다.

‘민족교육’은 ‘민족적 자각과 긍지심을 심는 교육’이라고 정의할 수 있고, ‘조선사람으로서의 기개를 지니게 하는 교육’이라고 총련 사람들은 표현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양심을 지키고 살 수 있게 하는 교육’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공기를 생각할 때.

그래서 민족교육, 조선학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재일조선인 문제는 일본과의 ‘역사’ 문제이자, 인류보편 ‘인권’의 문제다. 일본내 조선학교 체계는 “세계 해외교포 교육역사에 유례없는 사변”이기도 하지만 “세계인류인권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업적”이라는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크게 그려본다. 조선인 학교 60년 역사는 ‘학교 폐쇄령’, ‘총련 결성’, ‘한일 협정’을 중심을 나눠볼 수 있다. 둘은 탄압이고, 하나는 진흥의 계기였다.

***'학교 폐쇄령'-'한신 교육투쟁'**

“이제 일본 학교 안 가도 돼요?”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물었다. “응, 이제 안가도 돼.”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앞의 책)

그 아이들의 함성만큼, 1945년 이후‘국어 강습소’는 우후죽순처럼 일본 땅 여기저기서 솟아났다. 빼앗긴 말을 되찾고자, 어깨 좀 펴고 살고자. 또 고국에 돌아가 생활하려면 말과 글을 알아야 하니까.

1945년 10월 각 지역마다 난립한 단체들을 통합해 전국조직으로 결성된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은 민족교육사업에 주력하면서 이 강습소들을 학교의 형태로 만들어 나간다. “돈 있는 자는 돈을, 힘(노동력)이 있는 자는 힘을,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을 내자”는 말이 이 때 생긴다.

6만여 조선의 아들딸들은(당시 동포들의 전체 숫자는 60여만) 600여 개의 ‘판자집 학교’에서 눈치 볼 것 없이 조선말로 떠들며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재일조선인의 지위는 혼란스러웠다. “가능한 한 해방국민으로서 처우한다”(45.11.3)는 미군정(GHQ)의 모호한 태도는 1년이 못 가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지닌 것”으로 보며, 따라서 일본정부가 재일조선인을 통제할 권한을 지니는 것으로 바뀐다.(46. 11.20)

일본 정부는 잠시 “조선인이 그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학교를 신설할 경우, 부현(지방자치체, 시도)은 이를 허가해도 무방하다”고 했으나(47.4.12) 이 역시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48년에 들어서 본격적인 통제로 바뀐다. 그해 1월 문부성이 재일조선인은 일본 법령에 따라 일본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발표하자, 각 지방자치체는 3월과 4월 사이에 잇따라 조선인학교에 대해 폐쇄명령을 내린다.<제1차 학교 폐쇄령>

당연히 각지에서 반발이 일어 '한신 교육투쟁'이라고 부르는 항거가 시작됐다. 오사카 지역에서는 강제폐쇄과정에서 경찰의 총탄에 맞아 16세의 청년 김태일 군이 사망한다. 4월24일이었고, 그래서 ‘4.24 교육투쟁’이라고도 한다. “오징어도 생선이냐, 조센징이 사람이냐”면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진압한 경관도 있었다.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5월5일 문부성과 각서를 교환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 교육법령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과외나 방과 후 조선인에 의한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한다는 선에 머물고 만다. (그 결과로 생긴 것이 오사카 지역에 남아 있는 ‘민족학급’이다.)

다음해인 49년 GHQ와 일본정부는 조련을 강제 해산시킨다. 이어 10월에는 다시 제2차 학교폐쇄령을 발동한다. 경찰대의 학교 습격 등 강제 폐쇄에 맞서 저항했으나, 이 시기 3백여 개의 조선학교가 폐쇄돼 자주적 민족교육은 빈사 상태에 빠진다. 일본정부는 조선인학교를 접수해 일본학생과 격리 수용한 채 일본교장, 교사에 의한 동화교육을 실시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도쿄 에다가와 조선학교 역시 ‘도립 제2조선인초등학교’로 바뀐다.

***'총련 결성'으로 조선학교 문제 돌파구**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일본은 미군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재일조선인은 외국인이 됐고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교육 의무가 없어졌다. 과거에는 '일본 국적이므로 일본교육만을 받으라'고 몇 만 명이나 다니던 조선학교를 강압적으로 폐쇄시켰던 그들은 이제는 ‘나는 모른다. 너희들이 일본학교에 들어오고 싶으면 받아는 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말 잘들을 것, 찍소리 말고 가만히 있을 것’ 그런 서약서에 동의하는 사람은 받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일본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다는 실정을 알고 있으면서.

오사카의 한 학교의 예를 보자. ▲일본 법령과 학교규칙에 따를 것 ▲다른 학생에게 난폭한 짓이나 폐를 끼치는 행위를 하지 말 것 ▲급식비 등 학교가 징수하는 비용을 완납할 것 ▲학교 수용능력에 여유가 없어질 경우, 재학 중이라도 퇴학 처분에 응할 것 ▲이상을 위반할 시 퇴학시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했다. 거의 모든 학교가 대동소이했다. (앞의 책)

이 같은 상황에서, 55년 5월 총련(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이 결성된다. 총련의 결성은 곧 조선학교(민족교육)의 소생으로 이어진다. 재일조선인들은 총련 주도 하에 동화교육을 하던 공립학교를 인수한다. 에다가와 주민 역시 학교법인을 세우고 도립조선인학교를 인수해 ‘도쿄 조선제2초급학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조직이 생기자, 교육도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교육 목표, 교과서, 교육행정체제 등을 정비하고 본격적인 의미의 교육이 시작된다. 총련이 결성된 55년부터 70년대 전반기까지를 ‘조선학교 융성기’라고도 하는데, 55년 4월 2만3000여 명이던 학생수는 계속 증가해 60년 4월에는 4만6000여 명으로 5년 사이에 2배로 증가한다. 학교의 신증축 등 시설 확장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됐고 이때 조선대학도 설립돼 일본 땅 내에 독자적이며 완성된 교육체계를 만들었다.

57년 4월, 북한 정부의 교육원조비와 장학금(1억2000여만 엔)이 송금된다. 총련계 동포가 북한을 조국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 쪽도 어려울 텐데, 재일조선인의 교육에 이렇게 정열을 쏟고 있구나. 아! 우리에겐 김일성 수상이 있구나. 이것이 바로 조국이구나.” (무라구치 토시야 「우리학교」 2004 창풍사) 1세 할아버지의 회고담이다. 당시 총련계 동포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말이다.

이 할아버지의 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고 총련의 헌신적 열정과 조직적 단결을, 그리고 북한 정부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정책과 지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조선학교를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재일조선인 문제의 한 올도 제대로 풀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의 육성”,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의 귀국을 염두에 둔 조선공민화교육이 이때부터 민족교육과 함께 자리를 잡아 가게 된다.

***조선학교, '한일 협정' 불구 권리 쟁취해 나가**

65년의 한일협정은 일본에게 조선학교는 학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속내를 태연히 드러낼 자신감을 제공해 줬다. 1965년 12월 28일, 한 해가 저무는 날, 문부성 사무차관은 조선학교를 요리학원 같은 교육기관(각종학교)으로조차 인정하지 말라는 지시를 지방자치체에 내린다.

그 내용은 두 가지로,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에 따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아동들은 일본학생과 차별 없이 일본학교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조선인만으로 운영하는 학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조선인 자녀를 일본학교로 보내라는 것, 민족교육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식민지 시대부터의 동화교육 체제를 완비하겠다는 것이다.

한일협정으로 동포사회의 분열은 고착화되고, 재일조선인의 교육은 공식적으로 일본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본 위정자들은 협정 체결로 식민지배의 과거에 대해 일말의 양심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 그 자유를 돈을 주고 샀다. 우리는 돈을 받고 팔았다. 무엇을? 누구를?

그러나 이런 지시에도 불구하고, 1966년에는 32개교, 다음 해도 28개교가 지방자치체로부터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아 낸다. 특히 1968년 4월엔 미노베 당시 도쿄도 지사가 문부성의 강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대학교를 각종학교로 인가한다. 75년 모든 조선학교가 인가를 획득한다. 재일조선인의 끈질긴 요구와 일본 시민사회의 양식이 결합된 것이다.

그 뒤 조선학교는 하나하나 권리를 쟁취해 나간다. 1970년 이후 교육지원금 획득 운동을 전개했다. 1997년에 이르러 조선학교가 설치된 27개 모든 현으로부터 명목에 지나지 않는 소액이나마 지원금을 받게 된다.

2003년에는 국립대학 입시 수험자격 문제가 대두됐다. 인터내셔널 스쿨에는 주고 조선학교 등 민족학교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조치가 발표됐다. 납치문제 이후 거세진 비이성적 흐름에 편승해 다시 한번 조선학교를 죽이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재일조선인과 일본 양심세력이 결합해 결국 이는 국립대학 판단으로 결정한다는 취지로 수험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이번 에다가와 조선학교 재판을 지원하는 '일본변호사연합회'의, 조선학교와 민족교육권리 획득을 위한 노력과 지원은 특기할 만하다.

현재 남은 주요 해결 과제는, 사립학교에 준하는 교육지원비 획득과 학교기부금에 대한 손금 처리 문제다. 조선학교의 재정 압박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교사들은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칠 정도의 박봉(초임자 10만엔 수준), 그것도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금은 전국평균 연간 1인당 9만6000엔으로 사립학교의 3분의 1, 공립학교의 9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대일역사청산 요구 앞서 재일조선인-조선학교 관련 무지 편견 없애야**

식민지와 분단, 역사청산, 일본사회의 뿌리깊은 국수주의와 차별, 조국과 민족, 우경화, 북조선 때리기….

그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에 누구도 쉽게 말을 못한다. 총련에 체질적 거부감을 지닌 듯한 민단 사람도 조선학교만은 인정한다. 실은 우리 모두 조선학교 앞에 어떤 부끄러움을 내심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지?

‘빨갱이’란 덮개 하나로 안의 내용물을 가릴 때는 이미 지났다. 조선학교 교실에서 초상화가 내려진 날, 우리 역시 조선학교를 덮어 싼 지독한 무지와 편견의 보자기를 벗겨내버렸어야 옳았을 것이다. 아니, 우리는 일본에 역사 청산을 외치지 전에 먼저,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에 대해 청산해야 될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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