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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당한 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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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당한 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1> '디아스포라'는 누구인가?
프레시안은 돌베개 출판사와 공동으로 재일 조선인 도쿄 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서경식(54) 교수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번역ㆍ연재한다. <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デイアスポラ紀行-追放された者のまなざし)은 서 교수가 일본의 진보적 월간지 <세까이(世界)>에 기고했던 인기 연재로 일본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며 국내에서는 프레시안 연재 후 보완을 거쳐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경식 교수의 둘째, 셋째 형은 바로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의 희생자 서승, 서준식 씨이다. 1965년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된 후 모국을 알기 위해 또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는 목구의 동포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던 20대 초반의 재일 조선인 형제는 1971년 봄 간첩으로 몰려 각각 19년, 17년의 수감 생활을 했다. 서승 씨는 현재 일본 리츠메이칸대 법학부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서준식 씨는 석방 후 국내에 남아 1993년 인권운동사랑방을 만드는 등 인권운동에 헌신해 왔다.

두 형이 모국에서 정치범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서경식 교수 역시 '한국의 동포들과 더불어 좋건 싫건 정치적 폭풍의 눈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이 경험은 서 교수가 끊임없이 재일 조선인의 정체성으로 한반도, 동아시아, 세계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서 교수는 이 개인적인 경험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그들의 연대로 승화시켰는데, 이번에 연재할 '디아스포라 기행'에는 그 사상과 고민의 정수가 담겨 있다. 서 교수는 온갖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세계 각국의 디아스포라들의 사연을 1990년대 초에 소개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박이엽 옮김, 창비)나 최근 출간된 <소년의 눈물>(이목 옮김, 돌베개)에서 잘 드러난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과 섬세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서경식 교수의 안내를 따라 세계의 디아스포라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 2회에 걸쳐 진행된다. <편집자>

***프롤로그 : 수레바퀴 자국 고인 물 속의 붕어(학철부어)**

세계 각지를 여행하게 된 지 어언 이십 년이 된다. 돌이켜 보면 여행 중 나의 눈과 마음을 끄는 것들은 항상 어딘가 디아스포라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건 내가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쓰기 시작하는 문장을 '디아스포라 기행'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그런데 '디아스포라'란 어떤 의미인가, 왜 나는 스스로를 디아스포라라고 느끼는 걸까.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본래 '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 어이자 '팔레스티나를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커뮤니티를 가리킨다'고 한다.(『世界大百科事典』, 平凡社)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 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티나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보다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diaspora)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컬럼버스의 신대륙 착륙 이후 수백만, 일설에 의하면 실로 이천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 인들이 신대륙에 끌려갔다. 그들과 그 자손을 '블랙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19세기 이후부터 많은 중국인들이 쿨리(苦力, coolie)라는 모멸에 찬 명칭의 하층 노동자로 중국으로부터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는데 이들이 '차이니즈 디아스포라'이다.

이전에 아메리카 서해안을 여행하던 중에 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세미티 공원을 향하는 길에 그 이름도 차이니즈 캠프라는 지명의 마을을 지나친 적이 있다. 대륙 횡단 철도의 건설 공사에 투입된 중국인 노동자들의 숙영지였던 지역이었다.

이 글에서 나는 근대의 노예 무역, 식민지 지배, 지역 분쟁 및 세계 전쟁, 시장경제 글로벌리즘 등 몇 가지 외적인 이유에 의해, 많은 경우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조선 사람들 역시 과거 한 세기동안 식민지 지배, 제2차 세계대전과 내전, 군사 정권에 의한 정치적 억압등을 경험해 상당수의 달하는 사람들이 뿌리의 땅인 한반도로부터 세계 각지로 이산했다.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총수는 현재 대략 600만 명이라고 한다. 재일 조선인은 그 일부이며 나는 그 한 사람이다.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세계 분할과 식민지 쟁탈전 이후, 전 세계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고 태어나 자란 땅을 뒤로 했을까. 더욱이 그들 디아스포라들은 이주한 땅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이며 소수자(minority)이다. 다수자(majority)의 대부분은 '선조 전래의 토지, 언어, 문화로 구성된 공동체'라는 견고한 관념에 안주하고 있다. 그와 같은 상황 안에 있는 한 다수자들에게는 소주자의 진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진짜 목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고정되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도 그것을 보는 편이 불안정하게 움직일 때는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 다수자들이 고정되고 안정적이라고 믿는 사물이나 관념이 실제로는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소수자의 눈에는 보인다.

이하의 글은 나 서경식이라는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가,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 광주 등을 여행하면서, 각각의 장소에서 접한 사회적 양상과 예술 작품을 테마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의를 탐색하고자하는 시도이다. 디아스포라라는 존재의 모습이 근대의 뛰어난 역사적 소산이라고 한다면, 이 시도는 디아스포라로부터의 시선으로 '근대'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근대 이후'의 인간의 가능성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일 조선인이란 누구인가?**

그럼 어떻게 써 나갈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설명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식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은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왜 여기에 있는가? 지금까지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얼마나 여러 번 이 물음과 마주해 왔던가.

내 아버지 서승춘은 1928년, 아직 여섯 살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를 따라 한반도의 충청남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나는 그의 넷째 아들로 1951년 교토 시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나는 재일 조선인 3세이다.

이처럼 문자로 쓰면 단 몇 줄이지만, 여기서 벌써 번잡스러운 주석을 덧붙여야만 그 다음을 써 나갈 수가 있다. 그 이유는 '재일 조선인'이라는 용어의 개념에 대한 인식의 공유가 이루어져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호칭과 '재일 조선인'이라는 호칭이 애매하게 뒤섞여 존재하는데, 후자는 일본에 거주하는 '북한 출신자' 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동시에 '재일 한국ㆍ조선인'이라든가 '한국어'라는 말도 상당히 보급되어 있다. 이들 용어는 모두 재일 조선인이 형성된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과 '한국'은, 전자는 '민족'을 후자는 '국가'를 나타내는 용어이며 관념의 레벨에서 차이가 있다. 혼란은 이와 같은 개념상의 구별이 애매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 배경에는 '민족'과 '국민'을 동일시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지 않는 단일민족국가환상이 뿌리 깊게 가로놓여 있다.

조선 민족의 생활권은 현재 현존하는 국가들의 경계를 넘어, 조선 반도의 남북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중국,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국가들, 아메리카, 유럽, 중남미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 사람들을 뭐라고 총칭할 것인가. 나는 현재로서 '조선인'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에서는 '한국인'이나 '한인'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외래어 표기 문자인 가타카나로 '코리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구소련의 조선 민족은 스스로를 고려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민족의 호칭 문제 하나를 보아도 속 시원한 통일은 어렵다. 이런 상황 자체가 식민지 지배, 민족 분단, 민족 이산을 경험해온 조선 민족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민족의 총칭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란 민족 전체의 광대한 생활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일부분을 차지하는 국가의 호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는 호칭은 국민적 귀속을 나타내는 한정된 의미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재일 조선인 2세이지만, 국적은 '한국'이다. 즉 내 경우 민족적으로는 '조선인'이며 국민으로서는 '한국인'인 것 이다.

읽는 분들은 여기서 이미 참 복잡하구나, 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복잡한 것을 써내려가야 한다. 디아스포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모어(母語)와 모국어(母国語)**

나의 모어(母語)는 일본어이지만 모국어(母国語)는 조선어이다.

'조선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한국어'라고 하면 한국이라는 한 국가의 '국어'를 가리키게 되기 때문에 민족어의 총칭으로서는 '조선어'라는 말이 적합하다.

일본에서는 모어와 모국어의 구별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원래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자. 일본에 의한 식민지 시기에, 조선의 공립 소학교에서 한 조선인 생도가 넘어졌을 때 엉겁결에 "아야!"라고 외쳤다가, 선생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심한 체벌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야!' 일본말로는 '이타이(아퍼)!'이다. 여기서 생도에게 '아야!'는 모어이며 '이타이(아퍼)!'는 강요된 모국어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상의 땅인 한국을 방문한 재일 조선인 3세가, 모여든 친척에게 "곤니치와"라고 인사를 했더니, "한국 사람이라면 '안녕하십니까', 정도는 말할 줄 알아야지"라고 꾸지람을 들었다. 여기서 이 재일 조선인에게 '곤니치와'는 모어이며 '안녕하십니까'는 모국어이다.

다나카 가츠히코 씨에 따르면 모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익혀 무지각적인 상태에서 자신의 내부에서 형성된 말이며 한 번 익히면 그로부터 벗어날 수없는' '근원의 말'이다. 통상, 그것은 모친으로부터 아이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모어'라고 한다. (『ことばと国家』, 岩波新書)

한편 모국어란 스스로가 국민으로서 속해있는 국가, 즉 모국의 국어를 가리킨다. 그것은 근대 국민 국가에서 국가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가르쳐,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하는 경우는 하나의 국가 내부의 언어 다수자들뿐이며, 실제로 어느 나라에든지 모어와 모국어를 달리하는 언어 소수자가 존재한다. 그 존재를 무시하거나 망각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모어와 모국어를 동일시하는 것도 단일 민족 국가 환상의 소행이라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언어 소수자란 하나의 국가 내부에서, 그 나라의 다수자와는 다른 모어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영국의 웨일스인, 스페인의 바스크인, 중국의 위글인 등이 그들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했던 시기, 일본은 조선 사람들의 모어를 부정하고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는 정책을 철저히 행했다. 즉 당시의 조선 사람들은 대일본 제국의 언어소수자였다.

게다가 재일 조선인의 경우 사태는 한층 복잡하게 꼬여있다. 나 자신도 그렇지만, 재일 조선인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본어를 모국어로 해서 성장한다. 즉 재일 조선인은 일본의 다수자 쪽에서 보면 같은 모어를 지닌 '에스닉 마이너리티(소수민족)'이며, 본국(한국 또는 북한)에서 보면 같은 민족이면서 모어를 달리하는 언어 소수자인 셈이다. 식민지 피지배의 후손이면서, 구식민지 종주국에 태어난 탓에 지배자의 국어를 자기의 모어로 지닌 아이러니컬한 운명을 짊어진 것이다.

***재일 조선인과 국적**

나는 태어나서 50년 남짓을 죽 일본에서 살고 있는데, 국적은 '한국'이지 '일본'이 아니다. 선거철이 되면 가끔, 투표를 의뢰하는 전화가 걸려올 때가 있다. 전에 고등학교 동창생이 지방 선거에 출마했을 때, 동창회 명부에서 보았는지 비슷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참정권이 없다'고 이쪽에서 설명해야 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며, 때로는 "어 왜?"라도 저쪽에서 물어오기라도 하면 말문이 막혀버린다. 요즘은 그런저런 상황이 귀찮아져서 일일이 진지하게 설명하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는다.

일본이라는 국가는 우리들 재일 조선인의 지방 참정권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일본인은 결코 많지 않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이 일본 국민과 똑같이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납세하고 있는데 참정권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 대개의 경우 "원 심하군요"라고 동정의 반응을 보이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이어서 "당신은 완전히 일본사람인데…"라고 할 때가 있다.

우리들 재일 조선인은 '일본인'이 아니다. 과거 일본은 동화 정책, 황민화(皇民化) 정책에 의해, 조선 사람들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개조하려고 한 적이 있다. '완전한 일본인'이라는 말을 듣고 좋은 기분이겠는가? 재일 조선인은 크게 나와 같은 '한국 국적 소지자', '조선 국적 소지자', '일본 국적 소지자'의 세 부류로 나뉜다.

여기서 '한국 국적' 소지자란 사실상, '한국 국민'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그럼 '조선 국적'소지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인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1910년대 이후 조선 사람은 '야마토(大和) 민족'과 똑같은 천황의 '신민'이 되어, 싫고 좋고에 관계없이 일본국적을 지니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대략 80년 전에 당시의 내지(内地) 일본에 건너왔다, 그때는 '외국인'으로 일본에 이민 온 것이 아니라 일본 국적 소지자로서 일본국의 영토 안을 이동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과 '야마토 민족' 간에는 가혹한 차별이 존재했지만 적어도 국적 상으로는 조선 사람은 '일본 국민'이었으며, '일본 국민'으로서, 일본 내지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 사할린, 남양 군도에 이르기까지, 대일본 제국이 식민지 지배와 점령의 촉수를 뻗쳤던 전역에 확산했던 것이다. 나아가 1939년 이후의 총력전 시기에는 대략 70만 내지는 100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내지의 탄광, 광산, 토목 공사 현장, 군수 공장 등에 강제 동원되었다. 그 결과 1945년 일본 패전시에는 적게 잡아도 23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일본 내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은 패전 후 즉각 이와 같은 재일 조선인을 비롯한 구식민지 출신자의 일본 국적이 연합국과의 강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 유효하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구식민지 출신자도 일본 국민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재일 조선인이 자력으로 설립 운영하고 있던 민족학교의 폐쇄를 명한 것은 이와 같은 논리에 의거한 조치였다. 그런 한편 1947년, 재일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하는 외국인 등록령이 발포되었다. 이것이 쇼와(昭和) 천황 최후의 칙령이었다.

'외국인'으로 간주된 재일 조선인들은 외국인 등록 수속을 할 때, 자기의 '국적'을 신고하고 기입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한반도에서 민족 분단을 둘러싼 대립이 심화된 상태로 조선 사람들의 독립 국가는 아직 성립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국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국적을 신고하라는 것이다. 할 수없이 많은 재일 조선인은 국적 란에 '조선'이라고 기입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 반도 출신,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의미, 즉 국적이 아니라 민족적 귀속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일본 국적의 박탈**

이듬해인 1948년, 38선의 남과 북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가의 수립을 선언했다. 마침내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는데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는 분단국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1950년에는 조선전쟁(한국전쟁)이 발발해 1953년의 휴전협정에 이르기까지 전투상태가 계속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일본 패전 후 7년째인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어 그 조약의 발효와 함께 재일 조선인들, 구식민지 출신자들은 일방적으로 일본 국적 상실 선언을 받게된다. 강화 조약 회담장에는 한국, 북한, 재일을 불문하고, 조선인 대표는 일절 참가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당사자인 조선 사람들의 의향을 전혀 묻지 않은 채, 국적 상실의 선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온 사람, 강제 연행된 사람, 그 자손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 모든 재일 조선인이 한순간에 사실상 난민이 되었다. (계속)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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