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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도 파괴와 살육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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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도 파괴와 살육은 멈추지 않는다"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3> 칼 마르크스와 프리모 레비
***마르크스의 묘**

2001년 12월, 나는 열흘 정도 런던에 머물렀다. 특별한 용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화제를 모으며 개관한지 얼마 안 되는 현대 미술관 테이트모던을 찾는 것,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한두 편 보는 것, 필하모니아 관현악단과 BBC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는 것,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런던에 온 건 몇 번째인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네, 다섯 번째는 될 것이다. 젊을 때는 렌트카를 빌려 스코틀랜드며 웨일스를 도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스코틀랜드의 북쪽 끝, 하이랜드 지방에는 두 번 갔다. 두 번째 갔을 때는 에딘버러에서 인바네스로 차를 달려 북상해, 거기서 서쪽으로 더 간 스카이 섬의 단베건이라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돌아오는 길은 남쪽으로 내려와 포트윌리엄을 거쳐 그렌코를 지나 글래스고우까지 갔다.

도중에 인적이라곤 거의 없다. 키가 작은 관목이 산재하고 있을 뿐, 달리 나무다운 나무도 없다. 나지막하게 굽이치는 대지가 히스 꽃에 뒤덮여 황량하게 펼쳐져 있다. 크고 작은 호수가 나타나 지나쳐 간다. 바다가 가깝고 표고가 낮기 때문인지 늘 강한 서풍이 불고 지나가 눈앞에서 뭉게뭉게 강한 암운이 솟아올라서는 사라져간다.

하늘은 달음질치듯 사라져가는 구름에 끌려가듯 금세 흐려지는가 하면, 다음 순간 황금화살과도 같은 햇살이 구름틈새로부터 대지를 찌른다. 그럴 때 죽음을 생각한다. 인간의 필멸의 운명을 절절하게 느낀다. 죽는다면 이런 곳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1983년 나는 유럽 여행을 떠났다. 10대 때 두 번 한국에 갔던 것을 제외하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본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서른두 살이었다. 형 둘이 한국에서 옥중에 있고 부모님은 일본에서 잇달아 돌아가신 직후였다. 나는 정해진 직장도 없고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그리고 영국을 3개월 동안 무엇인가에 끌린 듯이 그림을 보며 돌아다녔다. 여행의 끝 무렵 내일이면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 칼 마르크스의 묘를 찾았다. 1983년 12월 1일이었다.

마르크스의 묘는 런던 교외 하이게이트 공동 묘지에 있었다. 추운 날이었다. 가이드북에 의지해 지하철을 타고 하이게이트 역까지 갔는데, 광대한 묘지의 입구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마르크스의 묘가 어디지요?" 라고 물어도 고개만 갸웃 거리길래 유명한 철학자라고 덧붙였더니, "아아 그 유고슬라비아인지 어딘지의……"라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 유명한 마르크스도 여기서는 수많은 망명자의 한 명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1818년 라인강 좌안의 도시 트리어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차별을 피해 변호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당시 프로이센의 지배적 종교였던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마르크스가 런던으로 망명한 것은 1849년으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저술한 이듬해의 일이었다. 이후 34년간을 망명지인 영국에서 살며 1883년 12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그 역시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였던 것이다.

반신반의인 채 행인이 가르쳐준 대로 길을 따라 갔더니, 과연 마르크스의 거대한 두상 조각을 얹은 묘비가 나타났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 (철학자들은 세계을 여러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꾸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제11항. <독일 이데올로기>에 수록되어 있는, 스물일곱의 마르크스가 쓴 글이다.

묘비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가 찾은 다음날이 바로 서거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묘비 주위에는 꽃다발이 몇 개 놓여있을 뿐 주위는 호젓하기까지 했다.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찬바람이 뼈를 찌른다.

2001년 12월의 런던에서 나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거짓말 같지만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것이다. 그 날 찬바람에 떨면서 나는 얼마나 세계를 바꾸기를 갈망했었는지.

그 후 수년이 지나 한국의 군사독재 체제는 종식을 고했다. 대만, 필리핀 등지에서도 권위주의 체제가 물러갔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붕괴했다. 그런 것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좋은 변화다. 그러나 팔레스티나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내전,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빈곤, 어느 것도 호전의 기미는 없다.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했다.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 지금은 시장경제 글로벌리즘의 큰 파도가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당시의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변화다.

일본은 거품 경제의 광란의 향연과 그 파국을 맞았고, 90년대 이후 국기 국가법의 제정, 유사법제의 책정, 자위대의 해외 파견으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급속하게 변해가고 있다. 수년 내에 헌법 제9조의 개폐 문제가 구체화할 것이다. 이 문제도 이렇게까지 제동이 걸리지 않은 채 전락하는 식으로 전개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냉전 구조의 종식과 함께 '역사는 끝났다'거나 '세계 전쟁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들을 해 왔다. 그러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빈곤, 기아, 역병, 폭력, 차별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 같지 않다.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세계에 절망해, 어떻게든 세계를 바꾸려고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찾는 사람은 있을까?

***자폭하는 세계**

2001년에 내가 묵은 호텔은 런던 중심부의 메이페어라는 구역에 있었다. 큰 외관의 오래된 호텔로 노후화의 징조가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서 요금이 나 같은 사람도 묵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후 티룸에 들어갔다. 교양 있어 보이는 노부인이 애프터눈 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 호텔의 단골 숙박객인 듯 했다. 동행 없이 혼자였는데 그것을 배려해 지배인인 듯한 남자가 다소 과장스런 인사를 하며 그녀에게 말을 건다. 그 광경이 호텔에 묵는 내내 매일 판에 박은 듯이 되풀이되었다.

호텔 주변은 소위 고급 주택가인데 의외일 정도로 사람 모습이 눈에 띄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휴가철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마블아치에서 애자워 거리를 북서쪽을 향해 걸으면, 그곳은 중근동, 아프리카계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오고가는 지역으로 식사도 그 근처에서 하면 저렴하고 맛이 있었다.

호텔 가까이 있는 미국 대사관은 엄중한 경계 하에 있었다. 옆을 지나갈 때마다 경비하는 경관들이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는데, 동아시아인의 풍모를 한 나에게는 경계심을 늦추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중근동계나 아프리카계로 보이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경관은 나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던 듯 '뭐야. 일본인이야'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선진국'-이 세 문자를 쓸 때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거부감을 금할 수가 없다-이며 '대테러 전쟁'의 충실한 동맹국이니까.

일단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유쾌하지는 않다. 경관에게 '일본인이 아니고 재일 조선인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그래 본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건 안다.

호텔방에서 TV를 켜니, 영국의 BBC, 아메리카의 CNN, 독일의 ZDF, 그 외의 어떤 채널이든 연일 아프가니스탄과 팔레스티나의 전투를 보도하고 있다. 이즈음의 화제는 베들레헴의 예수강림교회의 크리스마스 미사에 참가하려고 한 PLO(팔레스티나해방기구)의 아라파트 의장을 이스라엘군이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도 이런 무의미한 이지메와 다름없는 행동으로 얻는 것보다는 굴욕을 강요당한 편의 반발로 잃는 것이 훨씬 더 클 터인데 말이다. 이렇듯 크리스마스에도 파괴와 살육은 멈추지 않는다.

***프리모 레비**

나는 예전에 한번 이스라엘에 간 적이 있다. 1996년이었다.

그 해의 정월, 이탈리아의 토리노에 가서, 프리모 레비의 묘를 찾았다. 묘비에는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문신해 받은 수인번호 174517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증인이며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게 인간인가>라는 그의 대표작은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アウシュビッツは終わらない)>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판도 나와 있다. (竹山博英, 朝日新聞社)

나 자신, 30대 초반부터 프리모 레비에게 끌려 그의 사색으로부터 많은 것을 흡수해 왔다. 그런 만큼 1987년 그가 자택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깊은 물음 앞에 세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의 저작에서 고난으로부터의 생환과 증언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나도 그 한 사람이었다-은 그의 자살로 자신의 천박함과 아우슈비츠라는 체험의 무게를 새삼 느꼈던 것이다.(<프리모 레비로의 여행(プリーモ・レーヴィへの旅)> 참조, 朝日新聞社)

레비는 아우슈비츠로부터 풀려난 후, 가족이 사는 고향 토리노에 생환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동유럽이나 중부 유럽 출신의 유대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고향의 유대인 공동체가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레비의 수용소 동료들 몇 명도 이스라엘에 거처를 찾았다. 그런 경험을 통해 레비는 '유대인 민족의 피난소'로서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할 필요성을 지지했다.

그러나 1982년 6월, 이스라엘 군이 PLO의 거점을 공격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레비는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해 '유대 문화의 인터내셔널리즘적 측면'을 대신해 '공격적 의미로서의 내셔널리즘'이 강화되고 있는 것을 우려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레비는 자신들 다아스포라의 유대인은 이스라엘에서 강화되고 있는 공격적 내셔널리즘에 '저항할 책임'이 있으며, 디아스포라가 키워 온 '관용 사상의 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유대문화도 뛰어난 부분은 이산 상태에 있다는 것, 다중심적이라는 것과 관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레비는 이 인터뷰을 하던 시점에서는 적어도 말로는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이지 않았다. 사브라, 샤틸라 난민수용소 난민캠프에서의 학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한때는 국방상을 사임했던 샤론이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의 중심부에 복귀한 것, 종교 지도자인 메이어 칸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을 질문 받았을 때, "이스라엘이 칸의 광신적인 도정을 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애써 낙관적으로 대답하고 있다.(<프리모 레비는 말한다(プリーモ・レーヴィは語る)>, 多木陽介 옮김. 青土社)

토리노의 프리모 레비의 묘를 찾은 지 3개월 후, 1996년 3월 7일에 나는 파리에서 엘알항공을 타고 이스라엘을 향했다. 일본을 출발하기 전인 2월 25일 '하마스(이슬람 저항운동)'에 의한 자폭 공격, 이른바 '자폭 테러'가 일어났는데, 파리에 머물던 3월 3일과 4일에도 예루살렘과 텔 아비브에서 연달아 자폭테러가 일어나 모두 60명이 사망했다.

각오하고 있었지만 오를리 공항에서의 탑승 수속 때 보안 검색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짐을 열게 하고 이스라엘의 젊은 여자계원이 심문을 하는 것이다. 여행목적은 무엇인가? 호텔은 예약했는가? 여행 가이드 북은 갖고 있는가? (지도의 페이지를 펼치게 하고) 예루살렘의 위치를 가리킬 수 있는가? 누군가와 만날 예정은? 자기 소유가 아닌 짐을 맡지 않았는가? 심문은 30분 가까이 걸렸다. 바보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아 화가 나지만 매뉴얼대로 조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동아시아인의 풍모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도착해 보니 기후는 따뜻하고, 여기저기 꽃이 피어 있었다. 실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형용이 어울리는 풍요로운 토지였다. 숙박한 호텔은 신시가 중심부의 번화가였는데 사흘 전의 자폭공격사건의 현장은 바로 그 옆이었다. 노상에는 죽은 자를 추도하는 수십 개의 작은 초가 놓여 있었으며, 동안의 병사들이 사들이 자동소총을 서툴게 들고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프리모 레비가 살아 있다면, 오늘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나는 1996년의 예루살렘에서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발표되었을 때 국제 사회의 여론의 대세는 팔레스티나 평화로의 길이 열렸다고 하는 낙관론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로는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을 계속하고 있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의 일부에 잠정적으로 팔레스티나의 자치를 개시할 것을 정했을 뿐으로 예루살렘의 귀속, 난민의 귀환권, 유대인 이식자의 점령지로부터의 철수 등 팔레스티나로서 사활권이 걸린 중요한 현안은 일체 보류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팔레스티나에 있어서 '오슬로 협정'은 패배와 다름없는 타협이었는데 그래도 가까스로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에의 기대를 가질 수는 있었다.

그런데 1995년 11월 4일, PLO와의 화평교섭을 주도하고 있던 이스라엘의 라빈 수상이 교리주의 유대교도의 청년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다. 라빈은 팔레스티나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에게 굴욕적인 타협을 감수하게 한 장본인이다. 그 라빈조차 극우파에게 암살당할 정도로 이스라엘 국내는 호전적인 공기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프리모 레비가 애써 낙관론으로 감싸고 있던 '광신적인 도정'에의 의구가 차츰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1996년 하마스의 자폭 공격이 시작된 배경에는 이미 충분히 절망한 팔레스티나 인을 더욱 더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는 그와 같은 상황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스라엘 정권은 일시적으로 노동당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우파 정권이 들어섰으며, 점령지로의 이주를 추진해 '오슬로 협정'의 틀마저도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2000년 9월말부터 '알 아쿠사 인티파다'라고 불리는 팔레스티나의 대규모 저항운동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 이스라엘군은 제트 전투기와 전차를 투입하는 대규모의 무력 공격을 가했다. 2001년 2월에 레바논 전쟁에서의 학살의 책임을 추궁 당했던 샤론이 수상에 취임했다.

2001년 8월말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유엔 반차별 회의(정식 명칭은 '인종주의·인종차별·외국인혐오·불관용에 반대하는 세계회의')가 열렸는데, 이스라엘과 미국 대표단이 '시오니즘은 인종차별이다'라는 결의안에 반발해 퇴석했다. 이 회의에서 제3세계의 나라들이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인정해 사죄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선진국' 그룹은 이를 끝내 거부했다. 이 회의의 폐막 후 얼마 되지 않아 '9·11'이 일어났던 것이다.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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