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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디아스포라, 삶이 일그러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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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중의 디아스포라, 삶이 일그러진 사람들"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14> 자리나 빔지
***이중의 디아스포라**

자리나 빔지는 우간다 태생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아니다. 백인도 아니다. 인도계다. 왜 인도계인 그녀가 우간다에서 태어났는가? 왜 영국에 건너갔는가? 왜 이와 같은 작품을 만들었는가? 거기에는 식민주의의 역사와 디아스포라의 생의 궤적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동해안 일대를 세력권 안에 넣었던 대영제국은 1890년 프랑스와의 협정에서 우간다를 영국의 동아프리카회사의 통치하에 놓을 것을 인정하게 했으며 이어 1894년에는 우간다를 보호령으로 한다고 선언했다(영국령 동아프리카). 영국이 식민지 지배의 촉수를 점차 오지로 넓혀가는 데에 그 중요한 수단인 철도 건설에 투입된 것이 역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로부터 이입된 다수의 노동자들이었다.

그 후 영국에 의한 식민지 체제의 확립에 따라 상인, 직인, 기술자, 정부의 중급 직원으로서 인도로부터 우간다로의 이민이 급증했다. 그것은 오지로의 상업망의 확대와 함께 통치 행정관의 확보를 위해 영국이 필요로 했던 정책의 결과였다. 1931년 우간다에는 약 1만5000명의 인도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수는 1940년까지 더욱 증가한다. 그러나 물론 그들에게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가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자리나 빔지는 이렇게 해서 우간다에 살게 된 인도인의 자손이다. 그의 부친은 1920년대에 인도에서 우간다로 건너갔다. 1960년대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독립국가의 수립이 잇달았는데 우간다도 1962년 우간다인민당의 오보테를 수상으로 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69년 이후 오보테 정권은 주요 외국 기업과 우간다 국적을 취득한 아시아계(대다수는 인도인)의 기업에도 국유화를 선언했다. 그 후 1971년 1월 이슬람교도이며 군사령관이던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아민은 1972년 8월 우간다 국적을 갖고 있지 않은 아시아계 시민(주로 영국 국적) 약 5만 명을 90일 이내에 국외 추방한다고 선언했다. 그에 따라 우간다 국적 소지자를 포함해 아시아계 주민의 거의가 국외로 퇴거했다. 이 조치는 도ㆍ소매업을 장악하고 있는 아시아계 대신에 아프리카계를 상업 분야에 진출시키기 위한 정책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간결한 역사 기술을 읽으며 나는 내 몸에 닥쳐오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말을 조금만 바꾸기면 이것은 조선인에 관한 역사기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10년 이래 조선 반도를 식민 지배했던 일본은 그 다음에 침략의 손을 뻗치면서 중국 동북 지방(소위 만주)에 조선의 몰락 농민을 이주시켜 노동력을 충당하는 정책을 취했다. 1931년에는 그 수가 63만 명에 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선인 이민과 중국 민중과의 관계는 미묘했다.

한편으로는 함께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동지적인 협력 관계에 있는 것이 확실했지만, 다른 한편에는 당연히 조선 사람을 일본 침략의 첨병으로 보는 중국 측의 반발도 있었다. 1931년 7월 장춘시 교외의 만보산에서 일어난 조선인 이민자들과 중국 농민들 사이의 충돌 사건은 후자에 속하는 실제 사례다. 이에 반응해 조선 내에서는 중국계 주민에 대한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이 만보산 사건은 일본에 의해 두 민족 간의 이간책으로 이용됐고, 그 직후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는 '오족협화(五族協和)'였다. 오족이란 만주국에 거주하는 일본, 조선, 만주, 몽고, 한(漢)의 다섯 민족을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는 '협화'와는 거리가 멀어 다섯 민족은 자금 수준은 물론 식량 배급의 질과 양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을 정점으로 하는 엄격하고 면밀한 차별의 서열에 따라 편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은 이 차별구조에서 일본인 다음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해방 직후 중국 동북 지방, 특히 북부 만주 지역에서는 거주 조선인에 대한 '토비(土匪: 토착의 무장세력)'의 습격 및 학살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이것이 거주 조선인들의 조선 반도(특히 남반부)로의 귀환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조선인 배척 운동이 그 이상 대규모로 퍼지지 않은 데에는 아마도 중국인과 조선인이 항일 투쟁에서 연대한 역사적 경위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 국공 내전기 때부터 한국전쟁에 걸쳐 중국 공산당의 영향 아래서 단결해 중국 국민당 및 미국과 투쟁하는 구조가 생겨난 것도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우간다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의 중국에서 권력을 차지하는 정치 세력의 성격에 따라서 우간다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사태는 얼마든지 일어났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는 상술하지 않지만 전후의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들이 치러야 했던 일본 국적의 상실과 기본적 인권의 박탈이라는 경험은 일본에 의한 일종의 '추방책'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우간다의 인도계 시민의 경험은 특수한 케이스가 아닌 것이다.

자리나 빔지의 일가는 1972년의 아시아계 시민 추방 후에도 2년간 더 우간다에 머물러 있었다. 영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하기까지의 2년간 내전 하의 수도 칸파라의 집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민이라고는 해도 이미 반세기를 지낸 토지. 친구와 친척이 살고 있고. 직장과 학교가 있으며, 소중한 생활의 기반이 있는 곳. 어느 날 갑자기 그 곳으로부터 폭력에 의해 퇴거를 강요당한다는 것은 어떤 체험일까.

열 살 남짓한 소녀였던 자리나 빔지가 그 때 경험했던 외국인 배척과 내전의 공포는 훗날 우간다를 다시 찾았을 때 제작한 2002년의 작품 <OUT OF BLUE>로 재현되어 고도의 보편성을 갖추고 나 서경식이라는 동아시아의 디아스포라의 심정이 공감하며 울렸던 것이다.

* * *

하기와라 히로코에 따르면 자리나 빔지는 1987년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청명한 정적, 그녀가 속삭인 것은 순수한 침묵>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네 장의 패널 앞뒤를 쓴 전부 여덟 개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도계 여성의 영국 이민 경험을 다루고 있다. 한 패널에 제시된 입국사증에는 1975년 11월 날짜로 영국 내무성 스탬프가 찍혀 있고 "이후 본 여권 소지자의 영국 체재는 불가"라고 쓰여 있다. 같은 패널의 반대 면에는 의료용 고무 장갑이 그려져 있다.

1970년대 중반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서 인도계 여성만을 대상으로 '처녀막 검사'가 행해졌다. 이미 영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도계 남성이 결혼 상대로 부른 여성들은, 입국 자격에는 문제가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 영국 이민국은 그녀들의 약혼 증명서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 '검사'를 실시했던 것이다. 남아시아 출신의 미혼 여성이라면 처녀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재영 인도계 여성들은 명백한 이민 제한 정책이며 성차별이라는 항의운동을 일으켰다. 자리나 빔지의 작품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영국 식민지주의의 편의에 따라 아버지 세대에 인도를 떠나 아프리카에 이민하게 되었다. 반세기가 지나 부친이 생활의 기반을 쌓은 아프리카의 땅,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토지로부터 추방당해, 어쩔 수없이 건너간 영국에서는 차별과 인권 억압이 기다리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의 사정에 따라 때로는 이용당하고, 때로는 배제당하며서 언제까지나 농락당하는 삶. 그것이 2중의 디아스포라로서의 자리나 빔지의 경험이다.

아민의 추방책의 난폭함과 우매함을 비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로 그 원인을 만든 영국이 마치 자신은 제3자인 것처럼 구는 것은 위선이 아닌가. 식민주의 자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정말로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우간다의 실패, 아프리카 국가들의 실패를 비웃기 전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너희들은 실패했다. 길을 잘못 든 것이라고 현대의 오리엔탈리스트는 말한다. 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V. S. 나이폴의 문학에의 공헌이다. 제국의 피해자들이 훌쩍거리며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그들의 나라는 점점 영락(零落)해간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의 개입의 영향을 참으로 표면적으로만 어림짐작 하는 것이다. 제국이 '열등' 민족이나 '피지배' 민족의 생활에 수 세대에 걸쳐 가한 거대한 일그러짐이, 참으로 간단히 잘리고 줄여져, 팔레스타인, 콩고, 알제리, 이라크 사람 등의 생활에 제국의 지배가 침입해 온 긴 세월에 직면하고자 하는 자세가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다."

여기서 사이드가 열거하는 사람들, 그 생활이 제국주의에 의해 수세대에 걸쳐 거대하게 일그러져 온 이들의 리스트는 실제로는 훨씬 장대하다. 그리고 거기에 자리나 빔지와 같은 인도계 디아스포라와 재일조선인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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