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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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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그러진'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인"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15> 디아스포라 예술가들
***아름다운 열대 풍경**

'도쿠멘타 11'에는 이밖에도 많은 디아스포라 예술가들이 출품하고 있었다. 하나 하나의 작품에 대해 논할 지면의 여유는 없으나 생각나는 대로 이름만이라도 소개하기로 한다.

시린 네샤트(Shirin Neshat)는 1957생의 이란계 미국인이다. (그에 대해서는 앞에서 썼다.)

트린 민하(Trinh T. Minh-Ha)는 1952년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태어나, 베트남 전쟁 후에 건너온 미국에서 아티스트 겸 문화연구자가 되었다.

피오나 탄(Fiona Tan)은 1966년생의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암스테르담과 베를린을 거점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모나 하툼(Mona Hatoum)은 1952년 베이루트에서 태어나 현재 런던에 사는 여성 아티스트다.

아이작 쥴리앙(Isaac Julien)은 1960년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양친은 카리브해의 작은 섬 세인트 루시아(Saint Lucia) 출신의 이민자다. 이 섬은 1502년 12월 13일 세인트 루시아의 날에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1979년에 영연방 내의 자치국으로 독립했다.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으로 끌려 온 아프리카인 노예의 자손이 지금의 주민의 태반을 차지한다. 그의 작품은 '흑인' '카리비안' '동성애자'라는 삼중의 마이너리티로서의 기억, 환상, 욕망을 다루고 있다.

잉카 쇼니바레(Yinka Shonibare)는 1962년 런던에서 나이지리아인을 부모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런던과 라고스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도쿠멘타 11'에는 커다란 설치 작품 <정사와 성교>을 출품했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단체여행이 모티프로 등장하는 남녀 인물들은 머리가 없고, 모두가 '아프리카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정말일까. 그것은 쇼니바레의 작품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테마다. 이와 같은 천의 색과 무늬는 인도네시아가 기원인 납염이 종주국인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가 맨체스터에서 영국인이 디자인한 것이 아프리카에 수출된 것이라고 한다. 원재료인 면화는 인도산이거나 동아프리카산이다. 즉 우리들이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는 색과 무늬의 이미지는 실제로는 근대의 식민 지배의 과정에서 종주국에서 생산된 뒤 식민지에 강요돼 온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쇼니바레는 '영국적'이라고 간주되는 것에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빅토리안 댄디의 일기>(1998)는 통상 '영국적'인 문화의 절정기라고 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부유한 시민의 일상을 찍은 사진 같지만 한가운데에서 하인이나 집사를 거느리고 앉아 주인을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인인 쇼니바레 자신이다. 가장 '영국적'인 것인 이미지의 한가운데에서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아프리카인'의 모습을 보고 관람자는 곤혹스러워지는 동시에 은폐된 식민 지배라는 사실에 직면한다. 쇼니바레는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무의식 중에 '자연스러운 것' '본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만 이미지 또는 미적 취미의 역사성, 정치성을 폭로해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한 디아스포라 아티스트들의 작품은 도쿠멘타 전시 전체로 보면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직ㆍ간접을 불문하고 어느 작품이나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수세대에 걸쳐 가해져 온 '거대한 일그러짐'을 문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본에 돌아온 후 2002년 가을에 열린 심포지엄을 들으러 갔다. 심포지엄의 취지는 '도쿠멘타 11'의 공동 큐레이터였던 여성을 초대해 그 성과와 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어떤 저명한 일본인 큐레이터가 자리나 빔지의 작품을 예로 들어 "그의 작품은 설명을 읽지 않으면 관객에게는 단지 아름다운 열대풍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매우 놀랐다.

물론 예술작품으로부터 무엇을 느낄지는 전적으로 보는 자의 자유다.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느끼라고 한들 공허한 짓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큐레이터는 정말로 자리나 빔지의 영상을 '단지 아름다운 열대풍경'이라고 느꼈을까?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나 작가의 경력에 대한 지식을 얻기 전부터, 폭력의 기억이, 그 냄새며 감촉과 함께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싫은 느낌이 되어 보는 자에게 전해져온다. 그것이 이 작품이 예술로서 걸작인 이유다. 이 큐레이터에게는 그 '느낌'이 전해져 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엿보이는 감성의 단절에 할 말을 잃을 뿐이다.

나는 여기에 일본 사회 자체의 문제가 얼굴을 내밀고 있음을 본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디아스포라인 재일 조선인이라는 존재를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디아스포라 예술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 미술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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