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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언어'로 글을 써야 했던 시인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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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언어'로 글을 써야 했던 시인의 사연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21> 파울 첼란
***언어만을 모국으로 삼아**

파울 첼란의 '브레멘상 수상 인사'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갖가지 손실 가운데에서 오직 그것만이, 즉 말만이, 전달되는 것으로, 가까운 것으로, 잃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남았습니다."

첼란은 쟝 아메리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독문학자 기타 아키라의 논문을 통해 알았다. 아메리의 <죄와 벌의 피안>이 간행된 것은 1966년이다. 기타의 연구에 따르면 같은 해 10월 30일, 첼란은 여행 중이던 취리히에서 이 책을 샀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고 한다.

"긍정적인 자기규정이 안 되는 유대인, 즉 파국에 처한 유대인은 이 세계에 대한 신뢰를 결여한 채 이 세계에 적응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구입한 지 사흘 후인 11월 1일 책을 독파했다는 메모가 보이며 이어서 첼란 자신의 감상이 쓰여 있다.

"고향…. 내 경우는? 나는 고향(집)에 있었을 때조차 한번도 내 집에 있다는 기분이었던 적이 없었다."

여기서 '고향'은 출생지 체르노비츠와 지금 살고 있는 자택,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시 첼란은 파리에 살고 있었다.

1998년 여름, 나는 파리에서 이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던 적이 있다. 그가 파리에 흘러든 1948년 당시에 살았던 소르본느 대학 근처의 하숙. 1957년부터 가족과 함께 살았던 16구 롱샹가의 집. 1969년부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혼자서 살았던 15구 에밀 졸라가의 집. 1970년 4월 19일부터 20일 사이에 그가 몸을 던진 미라보 다리. 미라보다리 위에서 들여다보면 세느 강은 그 풍부한 수량이 오히려 거친 격류와 같이도 보였다.

1998년 봄에 간행된 <첼란 연구의 현재>에 실려 있던 아이하라 마사루가 찍은 사진을 길잡이로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저히 그 짧은 시간에 다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런 여행을 했는지 물어도 대답하기 어렵다. 나의 최종 목적지는 파리의 남쪽 교외, 오를리공항에서 가까운 티에(Thiais)의 공동묘지였다. 거기에 첼란의 무덤이 있다.

파울 첼란은 1920년 동유럽 부코비나 지방의 체르노비츠에서 태어났다. 이 지방은 18세기 후반까지는 터키 제국, 그 이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루마니아령이 되었다. 첼란이 태어난 것은 루마니아령이 된 직후였다.

합스부르크 제국 시대 부코비나는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유대인, 독일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그 밖의 여러 민족이 대립 상황을 품은 채 공존하는 다민족, 다언어, 다문화의 지역이었다. 그 중심도시 체르노빌리에서는 유대인이 상대적 다수파이며, 그들의 언어는 독일어였다. 루마니아령이 된 이후 정부는 언제나 루마니아어를 국어로 하는 정책을 강요하려고 했으나 반드시 성공하지는 못했다.

또한 그곳은 헤브라이어, 이디쉬어, 유대교, 유대 공동체의 전승이나 우화 등, '유대 문화'가 풍요롭게 깃든 지역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유대 문화'의 배경은 서구의 동화 유대인인 레비에게는 없었으며 아메리에게서도 이미 상실된 것이었다.

첼란의 어머니는 독문학을 애독하는 교양인으로 독어 교육, 그것도 부코비나 지방의 방언이 아니라 '올바른 표준 독일어'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 이유는 그녀가 첼란이 '모어로서 독일어를 가능한 한 순수하게 지니며서, 지적인 직업을 갖고, 명예롭고 유복하게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독일어는 글자 그대로 모친(母)으로부터 그에게로 주입되어, 그의 '모어(母語)'가 되었다.

그런 한편, 아버지는 열렬한 시오니스트였다. 첼란은 소학교의 첫 1년간 독일어로 수업하는 학교에 다녔지만, 김나지움에 입학하기 전 3년간은 헤브라이어로 수업하는 다른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가정교사를 붙여 첼란에게 헤브라이어 교육을 했다. 그는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반항했으나 이디쉬어의 전승이나 우화에는 흥미와 애착을 보였다. 나중에 루마니아 국수주의의 색채가 짙은 김나지움에서 교사가 수업 중에 이디쉬어를 바보 취급했을 때 첼란은 "이디쉬어에는 훌륭한 문학이 있습니다"라고 반론했다고 한다.

부코비나라는 지역의 특성과 자신의 천재성이 어우러져 첼란은 독일어, 헤브라이어, 이디쉬어 외에 루마니아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주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많은 외국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고 새로운 언어를 쉽사리 익히는 재능은 있지만 나는 모어 이외의 언어로 시를 쓰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다음 해, 1940년 6월에 소련군이 체르노비츠를 점령했다. 소련군은 4000명의 '신뢰할 수 없는 분자'를 시베리아에 강제 이송했는데 그 절반은 유대인이었다. 1941년 7월 이번에는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은 루마니아 군이 체르노비츠를 점령했다. 체르노비츠에 도착한 독일군은 조직적인 유대인 박해를 개시해 유대인은 시민권을 빼앗기고 약 4만5000명이 게토에 갇혔다. 이와 함께 많은 유대인이 트랜스니스트리아라는 지역에 강제 이송되었다. 첼란의 양친은 부크 강남부의 강제수용소에 보내져 거기서 살해됐다.

첼란 자신은 수용소로의 이송은 면했으나 타바레슈티라는 마을에서 도로공사 등의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그동안 그는 수첩과 종이쪽지에 시를 써 애인 루트라쿠나에게 보냈다. 시를 쓰는 것, 그것이 언젠가 시집으로 엮어질 것을 꿈꾸는 것이 지옥을 살아남는 데에 힘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경험한 강제노동은 의심할 바 없이 가혹한 것이었으나 레비나 아메리가 보면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수첩과 종이, 필기용구를 가지고 시를 쓰는 것 등, 아우슈비츠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사치였다.

1944년 소련군이 재차 체르노비츠를 점령해 살아서 종전을 맞은 첼란은 부카레스트에 나와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는 독일어로 쓰인 것이었다. 그의 모어는 아메리와 마찬가지로 '적의 것'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 전쟁과 강제 수용소의 경험이 직접적으로 쓰인 가장 초기의 대표작 '죽음의 푸가'의 첫머리를 인용한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걸 저녁마다 마신다
우리는 낮마다 아침마다 그걸 마신다 우리는 밤마다 그걸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 하나를 판다 그 곳에선 좁지 않게 누울 수 있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과 더불어 논다 그는 편지를 쓴다
날이 어두워지면 그는 독일어로 편지를 쓴다 너의 금빛 머릿결 마르가레테
그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집 앞으로 나온다 별들이 반짝인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모은다
그는 유태인들을 휘파람을 불며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자 무도곡을 연주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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