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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지맨(easy man)' 된 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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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지맨(easy man)' 된 노무현 대통령 [한미FTA 뜯어보기 420 : 분석] 왜 미국은 대통령의 약속이 필요했나?
노 대통령은 2일 발표한 담화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권고를 존중해 합리적인 수준으로 쇠고기를 개방하겠다는 사실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자신도 인정했듯이 그간 "미국산 쇠고기 검역 문제는 한미 FTA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단순한 '말 뒤집기'가 아니다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약속은 단순한 '말 뒤집기'가 아니다. 바로 국민의 건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식품안전과 관련된 검역 문제를 한미 FTA 체결과 맞바꿨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자신도 뭔가 꺼림칙한 게 있었던지 "(이런 사실을) 무조건적 수입 약속이나 이면계약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상황은 노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노 대통령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 번 살펴보자. 우선 노 대통령은 왜 미국 측이 한미 FTA의 협상의 본안도 아닌 미국산 쇠고기 검역 문제를 마지막까지 물고 늘어졌는지 따져봐야 했다. 양국 정상 간의 마지막 대화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면 더욱더 그렇다.

미국 정부와 뗑?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미국 측의 견해를 되뇐 국내 보수언론들은 오는 5월 열리는 국제수역사무국 총회에서 미국이 '광우병 위험을 통제할 수 있는 국가'로 분류되면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 완화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어차피 몇 개월 후면 검역 기준이 완화될 텐데, 왜 미국은 굳이 이 참에 노 대통령의 약속까지 받아낸 것일까?

바로 여기서 노 대통령이 간과했던 대목이 있다. 그간 박상표 국민건강을위한수의사연대 편집국장, 송기호 변호사 등이 조목조목 지적했듯이, 미국 정부는 국제수역사무국의 권고를 지렛대로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을 완화하는 게 쉽지 않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미국 당국이 부시 대통령을 앞장 세워 노 대통령의 구두 약속까지 받아낸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국민 생명ㆍ건강 저버린 노무현 대통령

실제로 국제수역사무국의 권고는 국내의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 완화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다수의 통상 관련 국제기구가 그렇듯이 미국의 영향력 밑에 있는 국제수역사무국은 과학적 잣대를 근거로 기준을 만들기보다는 주로 축산업계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국제수역사무국의 성격 탓에 세계무역기구(WTO)조차 "국제수역사무국은 국민 건강ㆍ생명과 관련된 보호 수준을 변경하여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즉 국제수역사무국의 권고에 대항해 명확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검역 기준을 정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일본은 그 예다. 일본은 국내에서 도축되는 모든 소에 대해 광우병 검사를 함으로써 국제수역사무국 기준인 30개월보다 더 어린 소에서도 광우병이 발생한 사실을 확인했다. 일본이 현재 미국으로부터 12~17개월의 소에서 얻어낸 쇠고기만 수입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기준에 만족하는 미국산 쇠고기는 미국 전체 쇠고기 생산량의 8% 이하다.)

물론 미국은 일본에도 계속 (한국처럼) 국제수역사무국의 기준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총리까지 나서서 "지금 필요한 것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최근에도 일본 관방장관은 부시 대통령의 "쇠고기 검역 조건을 완화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농림부는 국민 속인 파렴치범?

이런 사실은 농림부도 잘 알고 있다. 농림부 공무원들이 보수언론의 난타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국제수역사무국의 권고가 곧바로 검역 기준 완화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해 온 것도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더구나 농림부로서는 세계무역기구의 권고를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직무유기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농림부는 수차례에 걸쳐 2006년 3월 발표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 조건'이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일본처럼 광우병 전수검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농림부 역시 국민 건강을 위해서 할 만큼 했다는 것이다. 즉 농림부의 말을 들어보면, 현재의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은 어디나 내놓아도 떳떳한 과학적 기준이다.

그러나 만약 국제수역사무국의 바뀐 권고를 농림부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농림부로서는 수차례 지난 3월 발표한 검역 기준이 과학적 근거가 없었다는 미국측 주장에 동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농림부는 졸지에 국민을 속인 파렴치한 집단이 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결과를 예상했을까?

이제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 협상 타결을 위해 선뜻 미국 대통령에게 한 약속이 어떤 파문을 몰고 올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ㆍ건강을 좌지우지할 검역 기준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포기함과 동시에, 자신을 믿고 따라 온 농림부 공무원을 순식간에 믿지 못할 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대신 축산업계의 뒷심 덕을 본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수많은 정치인은 "'이지맨(easy man)'이 이번에도 확실히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약속했다"며 큰 소리 칠 수 있게 됐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은 하반기에 '뼈 있는 미국산 쇠고기'가 국내에 들어오면 청와대에서 제일 먼저 시식회를 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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