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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일본 때리기' 만이 능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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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위안부 문제, 일본 때리기' 만이 능사인가 [기고] 다시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며
오랫동안 한일 양국 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온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문학ㆍ50)는 최근 곤욕을 치렀다. 자신이 일본의 한 강연에서 했던 발언이 지난 6일 몇몇 언론을 통해 "위안부 문제, 한국도 책임 있다"는 제목으로 알려지면서 누리꾼의 맹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누리꾼은 박 교수뿐만 아니라 세종대 홈페이지를 찾아가 항의성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곤욕을 치르면서 박유하 교수는 "이른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좀더 상세히 국내에 알릴 필요성을 느꼈다"며 논란이 된 강연회에서 한 자신의 발언 전문과 함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생각을 자세히 적은 글을 보내왔다. 이 글은 최근 국제적인 화두로 떠오른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쟁적이면서도 또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박 교수는 국내의 대표적인 '지일파' 지식인으로 꼽힌다. 지난 2005년에도 반일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화해를 위해서>(뿌리와이파리 펴냄)라는 책을 통해서 교과서, 위안부, 독도, 야스쿠니 등 한일 간의 '역사 전쟁'에 대해 감성적 민족주의적 접근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나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편집자>


지난 6일 한 방송사의 기자의 보도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이야기의 중심이 '한국의 가해성'에 있는 것처럼 인상을 주는 제목을 단 점, 둘째 '파문이 일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없었던 '파문'을 유도한 점, 셋째 아베 수상의 발언을 '이해'한다고 말한 것을 마치 '지지'한다는 뜻처럼 내보내 오해를 야기한 점이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태여서 나는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이번 일이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한일 간의 문제에 대해 모두 함께 차분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를 비롯해, 지난 주말 일본에서의 나의 발언이 야기한 사태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이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깊이 사과한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방송에서 말하는 일은 가급적 피해 온 터였다. 시간이 한정된 상황에서 어떻게 말한다 해도 나의 진의가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체험해 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번 발언이 방송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예상 못한 것도 나의 불찰이고,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됐다.

아베 수상, 왜 그렇게 말했을까?

먼저 말해 둔다면 나는 문제가 된 모임에서 아베 수상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판했다. 나의 이번 방일의 목적은 <화해를 위해서>라는 나의 책의 일본어판을 주제로 한 세미나 참석이었다. 그런데 후에 다른 일정이 생겼고 방송에 나간 모임은 그 일정 중의 하나였다.

그 모임은 외국인기자협회가 주최하는 'Professional Luncheon'이었다. 내게 강연을 요청한 사람은 도쿄게이자이대학에 재직하면서 '역사화해연구소'를 창립해 운영하고 있는 한 헝가리인 교수였다. 그는 일본에 관해서도 한국에 관해서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유럽에서 이루어진 화해가 한일 간에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였다.

나 이외에 또 한 사람의 강연자가 있었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상을 위해 일본 정부와 국민이 공동으로 출자해 만든 '아시아여성 국민기금'의 설립에 깊이 관여했던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와다 하루키 교수였다. 이 글에 첨부될 당시의 발언 전문에서 내가 '기금'이라고 칭한 것은 바로 이 '아시아여성 기금'이다.

와다 교수는 2007년 3월에 해산된 이 기금이 그 동안 해온 일을 설명했다. 특히 그는 이 활동이 무수한 오해 속에서 인정받지 못해 일본이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라고 인식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며 '일본 국민의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호소했다. 이 와다 교수에 이어서 나는 미국에서 아베 수상의 발언이 비판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의견을 말했다.

처음 나는 기자와의 의견 교환 모임 정도로 이해했고 따라서 원고도 준비하지 않았다. 발언시간도 10여 분이라고 듣고 있었기에 말할 내용의 항목 정도를 메모해 갔을 뿐이다. 내 발언의 중심 취지는 한국 비판이 아니라 한일 간의 문제를 풀기 위한 더 근본적인 시각의 제공에 있었다.

내가 아베 수상의 발언을 '이해'한다고 말했던 것은 그의 말을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말의 배경을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그 역시 아베 수상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은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사실과는 많이 다르고, 그런 인식이 결코 문제의 해결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 비판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지만 그것은 한국 비판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 필요한 인식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그런 말은 가슴 아픈 것이었지만, 그것이 목적하는 바가 결코 일본을 옹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은 전문을 읽어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이른바 '왜곡 교과서'는 자신의 문제-수치를 직시하지 않으려고 한 데서 발생했다. 그런 욕망이 어떤 문제를 낳았는지는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다. 미국 의회에서의 결의안 상정과 통과를 지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 '전 세계'가 일본에 압력을 가하면 일본이 굴복할 것이고, 위안부에 대해 '사죄와 보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설사 결의안이 통과되더라도 일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일본이 위안부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사죄와 보상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궁금한 이들은 <화해를 위해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어쨌든 그들의 상태가 이렇다면 의회 통과가 최종 해결책이 될 리 없다. 오히려 한일 양국의 오해와 불신의 벽은 그 높이를 더해가며 다시 이어질 것이다.

아베 수상이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부정한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여기서 확실히 할 게 있다. 아베 수상이 부정하고 싶은 것은 위안소 '설치'에 관한 군의 관여가 아니라 '모집'에 관한 관여 부분이다. 말하자면 길거리에서 군이 갑자기 납치하는 식의 '강제성'을 그는 부정한 것이다. 전쟁터가 된 중국 등지를 제외한다면 식민지에서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듯하다.

우리는 오히려 아베 수상이 그럼에도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1993년의 '고노 담화를 준수하겠다'라고 언급한 사실에 더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아베 수상의 진심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고 고노 담화를 인정하는 이상, 아베 수상은 총체적인 '군의 관여'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아베 수상이 정말은 전부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고노 담화를 그래도 '계승'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타국을 의식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일부 우익을 제외한 일본인 대부분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민이 있는 일본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알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지점을 고려할 때, 한일 간의 화해의 문을 여는 게 가능하다.

위안부 문제, 일본만 책임져야 할 문제일까?

강연에서 위안부 문제는 민족 문제일 뿐 아니라 성의 문제이자 계급 문제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남성 비판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병사는 분명 위안부와의 관계에서 가해자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내일이면 죽을지 모르는 운명 앞에서 그들이 하룻밤 따뜻한 '위안'을 원했다고 한다면 누가 그들을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의 그런 심경이 남성주의적 발상이라는 점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을 가해자로 만든 것은 단순히 전쟁터로 떠민 국가만은 아니다. 그들을 국가로부터 지키지 못하고 자신을 '지켜줄' 것을 기대하며 황폐한 전쟁터로 떠나보낸 책임은 후방에 남은 일반인-여성에게도 없지 않다.

한국에서 지난 50년 동안 위안부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존재가 '민족'이라는 것이 늘 자랑스러운 것이어야 하는 민족주의자에게 수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엔 여성주의와 인권 사상이 결부되면서 오히려 '위안부'는 민족의 순결한 딸로서 거꾸로 '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이 이상할 것은 없다. 그것이 바로 민족주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민족주의는 위안부가 아닌 자신을 위해 위안부를 이용한 셈이었지만 민족주의자도 '위안부' 자신도 지금까지 그 모순을 의식하는 일은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아시아여성 국민기금'을 둘러싼 논란은 좋은 예다.

우리는 자민당은 보수파이기 때문에 과거의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 파렴치한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민당 안에도 극우파부터 진보에 가까운 사람까지 다양한 이들이 존재한다. 당연히 식민지 지배가 빚은 일에 대해 책임과 사죄의식을 갖는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이 기금이 만들어진 데도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기금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여론은 완전히 양분화 되었다. 정작 기금에 가장 반대한 이들은 보수 우파나 우익이 아니라, '법'에 의거하지 않은 사죄 방식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한 진보적 지식인과 언론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정부와 정치인에게 '양심'이 존재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뒤에는 역시 일본 정부와 정치인의 '양심'을 믿지는 못했던 한국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 10여 년 동안 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한일 간의 불신과 대립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기금의 돈을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분열되고 말았다. 기금의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게 배척당한 이들은 현재 이 단체와 대립하며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정대협과 그 관계자들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드높인다. 정대협 관계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지원 활동을 발판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었는데 정작 자신에 대해 무관심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정성을 다해 도와주는 것은 일본인들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들의 말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유보해 두겠다. 문제는 사태가 그런 식으로 최악으로 치달았음에도 그동안 그런 사태에 대한 재검증이 적어도 가시적으로는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정대협이 여전히 10년 전과 똑같은 말로 일본을 비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아무리 문제가 있더라도 자기 나라의 일은 덮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같은 민족의 일이라면 무조건 덮어줘야 한다는 논리에 나는 더 이상은 동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코 문제의 해결을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옳은'지 아닌지일 터이다.

위안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본이 늘 비판의 도마에 다시 오른다. 당연히 일본이 실은 보상을 했고 적지 않은 수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실제로 보상금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무도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기금을 반대한 이들의 책임은 없는 걸까.

모순에 대해 침묵하는 일은 모순을 증폭시키며 직접적으로는 누군가의 현 지위와 그간의 주장을 온존시키고, 모순적인 구조를 공고히 한다. 말하자면 침묵이라는 가담은 갈등의 해결을 지연시켜 누군가를 억압하기도 하는 것이다.

미국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실은 나는 기금이라는 선택을 한 1990년대 일본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일본이 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졌더라면, 그래서 한일협정과 상관없이 새롭게 '법'을 만들어 보상했더라면 막대한 돈을 보상을 위해 사용하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현재와 같은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이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한국의 인식은 옳지 않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갈등 속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이들이 아직 다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일본으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도 하나의 사실로서 존재한다. 기금의 중심인물이었던 와다 하루키 교수가 앞으로 다른 방식의 새로운 보상을 추진하려 한다고 하니 기대하고 싶다.

결과적으로 보상 받지 못한 위안부가 존재하고, 그들의 데모가 계속되는 모습을 일본이 언제까지나 '이미 끝난 얘기' 만으로 치부한다고 하면 그 역시 불행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정대협이 그동안의 모순에 대한 검증 없이 변치 않는 비난의 말로 수요시위를 벌이는 데에 대해서도 나는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 간의 우호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지금 한일은 어떤 결단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양국이 함께 '진실화해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해도 좋을 것이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것은 비판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미국에 가서 해결해 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까지 와서 위안부 문제를 놓고 대립하는 아시아의 두 나라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나는 그들의 시선과 개입이 부끄럽다. 설사 결렬만이 계속된다 하다라도 한일 간의 일은 한일이 해결하는 모습을 나는 보고 싶다.

그것이 '세계가 공감했다'고 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각에 내가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다.
4월 6일, 도쿄 주재 외국인기자협회가 주최한 모임에서의 강연 전문

아시아 여성 기금에 관해서는 방금 와다 선생님께서 충분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제 이야기는 핵심만 짚어 간단히 말씀드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질문을 받아 다시 설명 드리는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저는 최근 문제시되고 있는 아베 수상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발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최근의 움직임도 이전부터 반복되어 온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만, 아시다시피 현재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결의안이 상정되려 하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동안 이러한 문제에 대해 미국이 적극적인 발언은 피해온 것 같습니다만, 이번에는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에서 아베 수상의 발언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에 대해 한국의 매스컴은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움직임, 혹은 미국에서의 반응에 대해 조금은 다른 의견을 말하고자 합니다. 제 생각에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진정한 이해-지금 와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대응방식을 포함해서 패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이해와 그 이전의 제국주의 시대 때의 위안부 문제의 진실에 관한 이해-가 한국 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좀 부족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본을 비판하는) 행동의 저변에 있는 심경에 대해서는 (저 또한) 충분히 이해할 뿐 아니라 지지합니다만, 제가 문제시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일본에 대한 비판과 의견이 한국 측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미국에서의 비판과 혼다 마이켈 의원의 결의안에 담긴 주된 내용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지지하는 단체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자세한 배경은 (시간이 없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지금 와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 같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대응은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국은, 민간 출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아시아 여성 기금을 비난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일본 정부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고 수상의 (사과) 편지도 첨부되어 있었다는 매우 단순하지만 상징적인 사실이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조차도 한국의 일반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은 일단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기금에 문제점이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기금에서 한 일의 내용이 한국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기금의 행동이 패전 후 일본의 어두운 면,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본성'이 또다시 표출된 것이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에 진실이 전해지지 않은 채, 오해가 발생했다는 것을 우선 첫 번째로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오해가 지금 일본이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는 국내의 비난 여론으로서 통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있어 특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두 번째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진실에 관한 사항입니다. 이 부분은 일본의 우파도 자주 말하고 있는 사항이므로 신중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 한국인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관련되어있다는 것은 사실이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식민지 치하라는 가해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피해 속의 가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한국인의 관여라는) 가해 사실을 두고 단순히 (일본 우파들이) 그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도, 한국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위안부에 동원되었던 분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양아버지가 팔아넘긴 여성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 역시 최근 일본 우파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만,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위안부를 필요로 하는 군대의) 수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한국이 관여했다는) 사태 자체에 대해서는 (저는) 비판하지 않겠습니다. 그 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듣고 난 후에, 저는 일본군과 팔아넘긴 아버지 중에 어느 쪽이 더 밉냐고 좀 심술궂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 분은 아버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어떤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 그런 마음(미움, 한)에 대해 대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가해성에 대한 책임은 분명 한국 안에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전쟁 때 한국 군대도 위안부를 운영했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러한 사실로써 일본의 가해성을 축소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 사실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비난의 내용도 조금은 바뀌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비판도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만, 현재의 비판은 한국 뿐 만아니라 다른 나라도 그런 위안부 제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희석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즉 저는 위안부문제를 일본만의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위안부 문제 자체(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할 계기가 사라질 위험성에 대해서 우려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일본의 실제 대응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여러 연구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는 위안부 문제 자체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 이 두 가지 점이 현재의 상황(일본에 대한 무조건적 비난)을 낳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베 수상은 광의의 강제성은 있었지만, 협의의 강제성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그 발언의 배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말을 할 때는 같은 사실을 말한다 해도) 누가 왜 그 발언을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개인의 심리 문제와도 통하는 문제입니다만 (즉 상대방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다가도 상대가 자신에게 큰 잘못은 없다고만 주장하면 그 때까지의 관용과 이해의 마음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러한 아베 수상의 발언(의 배경, 즉 하고 싶은 말) 자체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역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 발언이 마치 '위안부란 없었다'고 (근본적인 부정을 한 것처럼) 말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태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런 식의 아베 수상의 화법이라면 오해가 초래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재 한국은 금전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죄의 말을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과 함께 어떠한 사죄를 한다고 해도-법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되고 있는 것입니다만-반대 여론은 또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떠한 사죄를 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비판이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역시 (사죄를)받아들이는 것은 (즉 사죄를 성립시키는 것은) 피해자 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이 한 일의 실제 내용을 우선 정확히 아는 일이 이후 추구해 나가야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

- 수상의 편지는 거짓이 아니냐?

"지금 와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수상 (편지)의 서명은 거짓말 아니냐고 하는 것은 일본 내부에서도 정부 방침을 비판하는 이들이 곧잘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진실 여부는 사실 어느 누구도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와다 선생님은 양식이 있는 사람들의 단결(을 통한 보상작업)이라고 하셨지만 그에 대한 판단을 잠시 유보한다 해도 역시 정치상의 일인 이상, 하나의 '형태'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일단은 소중히 해야 될 것이고 또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그 편지에서 문장을 실제로 쓴 사람, 편지의 내용을 만든 사람은 수상 본인이 아니라 실무를 맡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든 수상이 서명 할 수 있는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으로 문장을 만들었을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은 사죄에 있어서의 '형식'이라는 것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죄에 있어서의 '마음'의 문제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의 패전 이후 60년이 지났지만 일본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라고 하는 것이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 아직 존재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것은 외국뿐 아니라 일본에서 가장 '양심적'인 진보 지식인에게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그러한 (엄격한 자기 비판적) 시각을 존경하면서, 그러나 위안부문제의 과정을 봤을 때 그런 생각에 영향을 받은 한국 단체가 위안부 당사자에게 (보상금을 일본의 보상을 위선이자 강압으로 정의하고) 못 받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을 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을 지는 '방식'에 대해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위안부 문제가 이 15년 정도의 기간 동안 그저 민족문제로만 이야기되고 그 대표적인 존재로서 일본이 규탄 받아 왔습니다만 (그 때문에 그 문제가) 정말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의 문제라고 하는 사실이 잊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 중에는 아시다시피 한국인 병사도 11만 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안부에 대해)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는) 계급의 문제이며 성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민족문제로서만 규탄하는 한 잊히게 됩니다. 또 그런 상황은 (또 다른 반복을 막을 수 없어)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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