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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문방구 어음' 믿고 장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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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문방구 어음' 믿고 장사하라고"

[대·중소기업 상생, '말잔치' 아니려면·①] 기업구매카드 활성화해야

이명박 대통령이 변했다? 최근 많은 이들을 헷갈리게 하는 질문이다. 현대건설 회장 출신인 이 대통령이 갑자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주문했다. 취임 직후,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대기업을 챙겼던 이 대통령의 이런 변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일단, 시큰둥한 반응이 있다. 정치적 효과를 노린 '쇼'에 불과하다는 게다. 이 대통령의 인품이나 정치 행태에 대한 반감이 반영된 반응이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전부는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요구는 정권의 이념 성향과 별 관계없다는 입장도 있다. 마치 '범죄 추방'이나 '전염병 예방'처럼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필연적으로 챙겨야 할 과제라는 게다. 청년실업, 내수 부진, 사회경제적 역동성 쇠퇴 등 국민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경제 문제 가운데 대부분이 중소기업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 선 이들은, 그래서 현 정부가 실제로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를 주목한다. 이달 말 발표 예정인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한 종합대책'을 뜯어본 뒤로, 판단을 미루겠다는 게다. 요컨대 지금으로서는 대통령의 발언에 담긴 진정성을 가늠할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얼핏 보면, 이런 두 입장은 이달 말까지 계속 평행선을 그릴 듯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 전에라도 입장을 정리할 방법은 있다.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해 실제로 필요한 과제를 정리해서, 이에 대한 입장을 정부에 물어보면 된다. 그 반응을 보면,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 그저 '쇼'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꽤 기대를 걸 만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프레시안>은 중소기업이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하는 것을 막는 장치를 몇 가지 골라냈다.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가늠하는 지표로 삼기 위해서다. 이들 지표에 대해 정부 안팎에서 이뤄지는 논의를 살펴보면, 이 대통령의 최근 발언에서 비롯된 혼란은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지표는 어음 관행이다. <편집자>


"우린 아닌데, 아니라니까." "그럼, 어디냐?"
담임교사가 나쁜 짓 한 학생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의 교실 분위기와 닮은 반응이다. 최근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말을 놓고 재계에서 나온 반응이 꼭 이런 꼴이다. 윤 장관은 지난달 31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제주 하계포럼을 찾은 자리에서 "수십조 원의 현금이 있으면서 납품사에는 현금 대신 어음으로 결제하지는 않았는지, 그것도 일주일짜리 (어음을) 안 주고 한 달짜리를 주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금이 충분히 있는 대기업이 어음을 주는 것은 욕심이라고도 할 수 없고 탐욕 아니냐"고도 했다.

재계가 잠시 어수선해졌다. 윤 장관의 말이 구체적으로 어느 회사를 겨냥한 것이냐는 게다. 대기업이 협력업체에 직접 어음을 건네는 경우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는 항변도 나왔다.

어음 관행 문제 삼으니, 1차 협력업체 늘린다?

이런 항변은 절반쯤 맞고, 절반쯤 틀렸다. 대기업의 어음 결제 관행이 예전보다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등 주요 대기업들은 1차 협력업체에 대해 현금결제를 한다. 적어도 이들 기업의 공식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문제는 1차 협력업체의 수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어음 결제 관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중소기업이 극소수라는 뜻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1차 협력업체의 수가 800여 곳에 불과하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삼성 내부 계열사다. 삼성전자의 사업 분야가 전자 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1차 협력업체의 수가 턱없이 적다. 다른 대기업 역시 비슷하다. 포스코는 1차 협렵업체의 수가 100여 곳에 불과하며, 현대·기아차는 300여 곳이다.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수많은 부품을 모두 자체 생산하는 게 불가능한데, 협력업체의 수가 왜 이렇게 적은 걸까. 실제 생산은 2차, 3차 협력업체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1차 협력업체는 2차, 3차 협력업체에 어음으로 결제한다.

윤증현 장관의 어음 관련 발언 이후, 삼성전자는 2차, 3차 협력업체 가운데 일부를 1차 협력업체로 승격시키겠다고 밝혔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 삼성전자가 모든 협렵업체와 직거래하는 게 불가능한 이상, '현금결제'라는 혜택을 누리는 협력업체는 극소수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리고 1차 협력업체의 수를 늘리는 해법은, 대기업 입장에서 '잠깐 비를 피하는'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중소기업 문제에 대한 정권의 관심이 식는 순간, 1차 협력업체의 수를 예전으로 돌리면 그만이다. 정권의 변덕에 관계없이 유지되는 제도를 통한 해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어음 할인하니, 원가도 못 건졌다"

게다가 모든 대기업이 1차 협력업체와 현금 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다. 건설업의 경우, '무조건 어음 결제'가 아직 만연해 있다.

결국, 어음 결제 관행 자체를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다. 어음 결제의 문제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IMF 외환위기 직후, '어음 폐지'가 정책 당국에서 진지하게 검토됐던 적도 있다. 판매자가 금융비용을 부담하는 구조가 대표적인 문제다. '가' 기업이 '나' 기업으로부터 물품을 받고 3개월짜리 어음을 주면, '나' 기업은 3개월 이자만큼 손해를 보는 셈이다. 또 당장 현금이 급한 경우에는 어음을 현금으로 바꿔야 하는데, 당연히 할인해야 한다.(3개월 뒤에 받을 돈에서 이자 및 위험 비용 등을 공제한다는 뜻) 그리고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이 발행한 어음일수록 할인율도 높다. 투기등급(BB+이하) 기업 어음의 경우, 연리30% 수준의 할인율이 적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높은 할인율이 적용되면, 납품 원가도 못 건지기 일쑤다.

어음이 아니라 현금 결제를 할 때도 할인이 이뤄질 때가 많다. 삼성 계열사와 오래 거래했던 한 중소기업인은 납품과 동시에 현금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받은 돈은, 납품 가격에 어음 할인율이 적용된 금액이었다는 게다. 어음할인을 위해 금융권을 돌아다니는 번거로움은 없지만,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억울한 노릇이다.

이런 관행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일본에도 어음 결제 관행이 일부 남아 있지만, 한국과는 다르다. 한 달 이상짜리 어음의 경우에는 이자가 붙는다. 요컨대 '가' 기업에 납품하고 3개월짜리 어음을 받은 '나' 기업이 3개월 뒤에 받는 돈은, 납품가격에 이자를 더한 금액이다. 이 경우, '나' 기업은 결제 자체가 이뤄지지 않을 위험은 부담하지만 금융비용은 보전된다.

외환위기 당시 '어음 폐지론' 나온 이유…흑자도산, 연쇄부도 위험

어음 결제 관행의 더 큰 문제점은 '전전유통(轉轉流通, 처음 발행한 쪽을 떠나 여러 단계를 거치며 유통된다는 뜻)'에서 생겨난다. 요컨대 '가' 기업에 납품하고 어음을 받은 '나' 기업은, 다시 '다' 기업에 어음을 준다. 이런 식으로 7, 8단계까지 어음이 도는 일이 흔하다.

이런 구조에서 경제위기가 닥치면, 연쇄부도가 일어난다. 외환위기 직후 어음 폐지론이 나왔던 주요 이유다. 당시 '흑자도산' 사례가 빈번했는데, 대부분 어음의 '전전유통' 때문에 생긴 일이다. 굳이 경제위기 상황이 아니어도, 기업 입장에서는 늘 아슬아슬할 수밖에 없다. '가' 기업이 발행한 어음이 여러 단계를 거쳐 '마' 기업에 전달됐다고 하자. '마' 기업은 '라' 기업과 거래하면서 이 어음을 받았다. '마' 기업은 오로지 '라' 기업의 신용을 보고 거래를 텄다. 그런데 알고 보니 처음 어음을 발행한 '가' 기업이 부실 업체였다. 멀쩡한 회사인 '라', '마' 기업이 전혀 관계없는 '가' 기업의 부도 가능성 때문에 불안에 떨어야 한다. 기업 활동의 불안정성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구조를 방치하면서 모험적 투자에 뛰어들라고 하면, 기업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 한 중소기업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뉴시스

걸핏 하면 터지는 딱지어음 범죄

세 번째 문제점은 다양한 사기 피해 발생이다. 어음을 발행하는데 엄격한 요건이 적용되는 외국과 달리, 한국에선 아무나 발행한 '문방구 어음(은행어음이 아닌 자가어음. 문구점에서 파는 어음 용지에 발행인이 임의로 내용을 적어 만든 데서 유래)'이 유통된다. 그리고 이런 어음은 은행에서 할인할 수 없다. 제도금융권 바깥에서 할인하여 현금으로 바꿔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따르는 다양한 위험이다. 은행의 지급보증이 없기 때문에,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한 중소출판사 사장은 "영업사원이 받아 온 문방구 어음을 보면, 잠이 안 온다"라고 말했다.

아예 대놓고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다. 어음 유통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맹점을 이용한 사기다. 이른바 '딱지어음'이다. 고의로 부도를 낼 계획을 세우고 발행하는 어음을 가리키는 말인데, 지난 5월에는 6576억 원어치의 '딱지어음'을 발행한 일당이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사상 최대 규모다. 당시 범인들은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에 '통현 산업개발'과 '철갑 종합상사'라는 유령회사를 차리고 은행에 당좌계좌를 개설했다. 그리고 이들은 어음용지를 발급하는 은행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5000만~1억 원의 자금을 계좌에 넣고 약 1년 동안 장당 수백만 원의 소액어음을 발행해 30여일 단위로 정상적으로 결제 처리하며 신용을 쌓았다.

이후 거래은행에서 '우량고객' 대우를 받자 사용하지도 않은 어음용지를 사용했다고 허위 신고하는 수법으로 어음용지를 수백장 받아 갔다. 은행 측은 서류만 믿고 용지를 발행해 줬다. 범인들은 어음용지를 수령한 날로부터 3개월 뒤를 부도예정일로 정하고 해당 기간 내에 생활정보지에 광고를 게재하거나 지인을 통해 통상 액면가 1000만~5000만 원인 딱지어음을 장당 280만~300만 원의 가격에 판매했다. 이 가운데는 액면가 350억 원짜리도 있었다. 구매자는 대부분 급전이 필요한 중소기업인이었다. 이렇게 팔린 어음 6576억 원어치는 6~7단계의 유통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액면가에 가깝게 가격이 형성됐다. 마지막 어음 소지자 400여 명은 발행자의 고의부도로 피해를 뒤집어썼다.

김구 선생도 이용한 어음, 중소기업인들은 '폐지' 원해

어음이 낳는 이런 폐해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2007년 중소제조업체 532개를 대상으로 조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조사 대상 업체의 78.3%가 어음제도 '폐지'를 원했다. 어음 결제 관행에 대한 중소기업인들의 반감이 드러난 조사 결과다.

당장 어음을 폐지하기 어렵다는 쪽 역시 폐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2007년 6월 '어음제도 개선방안' 공청회에서 "아직 어음이 지급수단으로 활용되는 비중이 높은 만큼 당장 어음제도를 폐지하기보다는 결제기간 장기화나 고의부도, 금융비용 전가 등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김 연구위원은 "1조 원의 어음교환이 이뤄질 때 단기적으로는 중소기업 생산지수가 2~3%포인트 상승하지만 장기적으로는 3~5%포인트 하락한다"고 분석했다. 당장은 기업의 자금유동성을 높여 생산성을 높여주지만, 어음 할인에 따른 수익성 악화가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대안이다. 그리고 이게 어렵다. 어음거래는 사인(私人) 간의 계약으로 이뤄지는 탓에, 법과 제도로 규율하는 데 한계가 있다. 어음거래를 통해 이익을 보는 쪽에서는 "조선시대 개성상인들도 이용했던 거래방식이다. 워낙 뿌리가 깊어서 쉽게 바꿀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역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백범일지>를 보면, 백범 김구 선생도 어음을 이용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김구는 일본인 중위를 살해한 뒤 뺏은 800냥을 동네 동장(洞長)에게 맡긴 뒤 어음을 받았다.(이 돈은 나중에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의해 거의 전액 회수됐다.) 19세기 후반 노래인 '동점별곡'에도 광부들이 어음을 주고받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어음이 널리 쓰였던 조선시대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을미사변 당시에 은행이 널리 이용됐다면, 김구 선생 역시 어음을 이용하지 않았을 게다. 은행과 지폐, 전자결제 시스템 등이 없었던 시대에 생긴 관행을 지금까지 고집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개인 거래에서처럼, 기업 간 거래에서도 카드 결제 활성화돼야

전문가들은 "정책 대안은 이미 충분히 논의됐다. 문제는 실행 의지"라고 이야기한다. 어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정부가 모르지 않는다는 것.

대표적인 사례가 기업구매카드다. 이는 기업이나 정부가 구매활동을 위해 사용하는 신용카드로 1999년 4월 도입됐다. 기업이 거래은행에서 전용카드를 만들고 납품대금을 어음이 아닌 전용카드로 결제하면 납품업체 관련 카드사(지급대행 은행)로부터 이 대금을 즉시 회수하는 방식이다. 구매기업이 카드를 발급받은 카드회원이 되고 다수의 납품업체는 카드가맹점이 돼 대금을 즉시 지급받는 것이다. 납품업체는 결제일에 대금을 전액 받거나 필요할 경우 그전에라도 할인해 받을 수 있다. 이 방식을 쓰면, 어음 거래의 문제점 대부분이 해결된다. 납품 대금 환수까지 걸리는 기간이 단축되고, 부도(지급불능)에 따른 피해 가능성 역시 줄어든다. 하지만 도입 11년째인 이 제도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감소 추세다. 지난해 기업구매카드 이용 실적은 69조108억 원으로 2008년보다 10.6%포인트 줄었다. 기업구매카드 이용 실적은 2000년 1조7233억 원에서 2002년 91조1682억 원으로 급증했지만 이후 60조~70조 원대에서 증감을 반복하다 감소세로 돌아섰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기업구매카드 이용에 인센티브를 줘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교한 인센티브 설계만 이뤄지면, 개인의 거래(B2C거래)에서 신용카드 이용을 일반화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기업 간 거래(B2B거래)에서도 신용카드 이용을 활성화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문제는, 결국 정부의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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