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은 무엇으로 사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여성으로 살아왔기에 나는 당연히 남성들이 무슨 욕망과 꿈으로 복잡다단한 삶을 헤쳐나가는지 경험한 바가 없다. 요즘 들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2년 만에 부활한 고 장자연 씨의 편지 진위 여부 논란이 그렇다. 그 뒤에 여전히 봉합되고 은폐된 2년 전 문건에서 그녀 자신이 주민등록번호와 지장까지 찍으며 내용증명에 준하는 진실고백을 한 성상납(그보다는 성추태와 성폭행) 사건의 진실 증발도 이해하기 힘들다.
과거 <빨간 여배우>(1989)란 영화가 권력남이 여배우를 소비하는 방식을 문제 삼았지만 당시 풍미하던 에로영화붐에 묻혀간 것도 아쉽다. 민족영화인의 대표적 존재인 <아리랑>의 나운규 감독이 1930년대 한 일간지 좌담(1937. 1. 5.)에서 여배우 다루기가 힘들다면서 '여배우 매춘부론'을 언급한 것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데, 아직도 그런 작태가 룸살롱에서 이루어진다니 실망스럽고 한탄스럽다.
권력과 성노리개, 밀실과 은폐
그러다가 신정아 씨가 자신을 성추행한 권력층 남자들을 폭로한 책으로 화제가 되는 사태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진위 여부야 어찌되었건 우리 사회 권력층 남성들은 에로스 문화로부터 어쩌다 이토록 소외되어 버린 것일까? 그리하여 성과 권력의 함수관계가 이토록 파행적으로 결합하는 양상 속에서 공허함과 우울증, 결국 불행지수가 팽배한 사회가 돼 버린 것은 아닌가, 처참한 심정도 들었다.
양성의 가치를 대비할 때, 흔히 남자는 권력, 여자는 외모, 라고 말한다. 물론 실력 중심의 양성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시점에서 그런 대비는 퇴행적이건만 그래도 여전히 지배적인 기준처럼 작동하고 있다. 외모도 실력의 하나라고 믿기에 '성형공화국'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권력과 성의 함수관계는 권력층 남성들이 밀실에서 벌이는 업무와 유흥이 만발하는 '룸살롱공화국'을 형성하고 있다.
고 장자연씨의 2년전 진실 문건에 따르면, 언론, 방송, 재계 등 권력층 남성들은 아리따운 여배우의 성접대를 받으며 그녀를 능욕했다. 좀더 참고 견디면 출세할 것이라는 기대로 버티기엔 과도한 성추행이었다. 이런 상황이 중요한 일을 하는 권력층 남성의 스트레스 해소와 네트워크 다지기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바로 범죄적인 상황이다.
권력층이건 아니건 나이 든 남성이 젊고 어린 여성을 좋아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알려진 아리따운 여성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만큼 상대의 맘에 들기 위해선 상대를 인권을 가진 주체로 대해야 할 것이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기본인 에로스정신을 버리고 상대를 그저 일개 성노리개로 대할 수 있는 것이 권력의 힘이라고 누가 알려준 것일까? 권력을 가진 소수 남성들이 은밀하게 전수해 온 법칙일까? 유독 간통죄가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이기에 이런 위선적인 작태라도 벌여야 스트레스가 풀려서 그런 것일까?
여성이 좋으면 사랑을 하라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이없는 사태가 침묵에 갇히는 것을 보면서, 남성도 제대로 사랑할 권리가 있는 존재로 거듭나 살아가길 희망할 뿐이다. 여성이 좋으면 사랑을 하면 된다. 귀찮아서, 바빠서 사랑을 못한다는 핑계를 대는 남성, 특히 권력을 가진 남성은 불행하게도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 못했거나 해볼 의사도 없는 것일까? 성노리개로 여성을 대하는 반인권적 마취에서 풀려나 심리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남녀상열지사의 병폐가 공익을 해치며 지속적으로 터지는 이 사회에 진정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일이다. 권력을 갖더라도, 그에 더하여 사랑하고 싶은가? 성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상대를 자신과 같은 인격체로 대하고 마음의 소통과 몸의 소통이 합치되는 통합적인 관계를 공들여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 관계만들기가 남성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를 사회적 우울증 치료를 위해 희망한다.
* 이 글은 <다산포럼>() 29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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