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중심가인 타임 스퀘어에 가까운 곳에 자리한 <뉴욕 타임스>는 미 언론의 대표주자라는 자부심을 지닌 곳이다. 3백75명의 기자들이 중심이 돼 만드는 이 신문은 기사의 질(質)에서나 영향력에서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어왔다. <뉴욕 타임스>도 미국 언론이다. 9.11 뒤 불어닥친 미국적 애국주의 바람을 타는 기사들을 싣기도 했다.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죽어간 아프간, 이라크 민간인들 기사보다 아프간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 죽은 미군병사들을 더 비중 있게 다루는 모습을 보면, “이 또한 미국신문이로구나"란 느낌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는 맹목적인 미국적 애국주의 바람을 부추기는 대부분의 신문 방송들과는 얼마간 거리를 두어왔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워싱턴 포스트>와는 달리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를 질타하는 나름의 비판적 기사와 칼럼들을 실어왔었다. 그래서 부시행정부의 매파 정치인들이나 그들과 손잡은 싱크 탱크들은 <뉴욕 타임스>를 ‘좌파 언론’이라고 손가락질해왔다. 필자의 이웃 아파트에 사는 한 보수적인 뉴요커는 “뉴욕 타임스, 그것도 언론이냐? 나는 쳐다도 안 본다”고 내뱉듯 말했었다. 그는 당연히 부시 열성 지지자다.
그런 <뉴욕 타임스> 편집국에 최근 한 사건이 터졌다. 지난 5월1일 <뉴욕 타임스>는 기사 조작과 아울러 남의 기사를 베낀 짓을 한 혐의로 제이슨 블레어 기자(27ㆍ사진)를 파면 처분했다. 그 열흘 뒤인 5월11일자 <뉴욕 타임스>의 1면 왼쪽 앞머리에 블레어 기자 사건과 관련해 독자들에게 사과를 드린다는 내용의 기사를 크게 실었다. (관련링크 1). <뉴욕 타임스>기사의 요지는 “5명의 기자가 포함된 조사팀이 1주일 동안에 걸쳐 조사한 결과, 제이슨 블레어 기자가 2002년 10월 이후 쓴 73건의 기사 가운데 남의 기사를 적당히 베끼거나, 기사 발신지를 거짓으로 적거나, 만나지도 않은 취재원의 발언을 마치 직접 들은 양 조작하는 등 모두 36건의 기사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한국의 신문사로 치자면 사회부 또는 전국부 소속인 블레어 기자는 ▷지난 4월6일 기사에서, 이라크전쟁에서 실종된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병참부대 소속 한 군인의 장례예배에 관한 기사를 작성하면서 허위기사를 작성했다. 사망군인의 아버지(목사)가 집전한 장례예배가 열렸던 현지 클리블랜드엔 가지도 않은 채 <뉴욕 타임스>의 경쟁지라 할 <워싱턴 포스트>와 다른 미 일간지에 이미 기사화된 내용들을 베끼면서 취재원의 발언을 인용 표시도 없이 본인이 취재한 양 옮겨 썼다. ▷4월19일자 이라크전쟁 참전 군인들에 관한 기사에서 블레어 기자 자신이 국립해군병원으로 가 제임스 클링겔 상등병을 만나 인터뷰한 것으로 썼으나, 실제로는 병원에 가질 않고 전화취재를 했다. 클링켈은 나중에 뉴욕 타임스에 난 기사를 보고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기자가 마구 지어냈음을 알았다. 기사에 나오는 군인들과 그 가족들의 발언내용 대부분도 책상에 앉아 꾸며냈다.
기사의 정확도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이라 자부해온 <뉴욕 타임스>는 ‘편집자의 노트’라는 별항기사에서 블레어 기자 사건을 일컬어 “<뉴욕 타임스> 152년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라 적었다. 아울러 블레어 기자가 썼던 다른 기사 600건 이상의 기사들에 대해서도 면밀히 조사중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07년 동안 <뉴욕 타임스>의 대주주인 슐츠버그 가(家)의 아서 슐츠버그 주니어는 “(블레어 기자가) 신문과 독자들 사이의 신뢰관계를 저버렸다”고 한탄했다.
***"다들 베끼는데 뭘...”**
이 사건을 보는 필자의 결론부터 말한다면, "누가 블레어 기자에게 돌 던질 수 있는가“다. 한 젊은 기자의 도덕 불감증으로 벌어진 이 사건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라크전쟁과도 관련이 된다. 아마도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블레어 기자는 <뉴욕 타임스>에서 멀지 않은 맨해튼 록펠러 빌딩의 아늑한 카페에서 재즈를 들으며 뉴욕의 밤을 즐겼을 것이다. 9.11 테러사건 뒤 조지 부시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키면서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와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던(오히려 지향하는 바 이념적 노선 차이 때문에 서로 비방을 주고받던 사이였던) 이라크 사담 후세인이 9.11 유탄에 맞아 쓰러졌듯, 블레어 기자도 테러와의 전쟁의 한 희생자로 여겨진다.
블레어 기자가 억울하다고 주장하거나 변명하자는 게 아니다. 그가 흑인 기자라서 인종차별에 걸렸을 것이란 억측을 하는 것도 아니다. 블레어는 이라크 전쟁과는 관계가 없는 사건들(이를테면 지난해 미 워싱턴 일대에서 벌어졌던 무차별 총격사건)등에서도 ‘양심 불량’ 기사들을 작성했었다. 그러나 필자의 요점은 9.11 뒤 부시행정부가 아프간전쟁과 이라크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관급기사들을 양산했고, 미 언론들은 그것들이 사실인지를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은 채 일단 기사화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을 입사 4년차의 블레어 기자가 “선배들도 베끼는데 뭘...”하며 쉽게 생각하며 남의 기사를 베끼다 터진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언론에 베껴진 뒤 드러나는 거짓말들**
이라크전쟁 보도에서 독자 여러분도 느꼈듯,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언론들은 펜타곤(미 국방부)과 카타르 도하의 미 중부군사령부가 공급하는 보도자료를 베끼기 바빴다. 이를테면, 이라크전쟁 초기인 지난 3월 미 군부가 심리전의 일환으로 “이라크 기계화사단인 51사단 투항” “사단장도 투항설”이란 미확인(사실상 허위!) 정보를 현지 종군기자들이나 펜타곤 출입기자들에게 흘리면,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미 언론이 이를 보도하고, 한국 외신들도 덩달아 이를 번역을 하든, 번안(飜案)을 하든, 기사화했다. 이를 읽는 독자들은 이라크전쟁이 빨리 끝날 것으로 여겼고, 그런 소식을 전해듣는 이라크 사람들도 패배감에 젖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즈음 이라크전쟁을 치르면서 미 부시행정부와 영국 블레어 정권은 결정적인 거짓말들을 퍼뜨렸음이 드러나고 있다. ▷후세인 정권이 생화학무기를 보유한 위험스런 정권이고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조직과 연계돼 있고 ▷따라서 후세인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리지 않으면 세계평화에 위협을 받는다는 논리를 폈다. 미 언론들은 후세인의 잔혹성을 강조하는 그같은 주장들을 이렇다할 검증 없이 받아썼다. 극단적으로 말해 관급(官給) 보도자료를 베끼기에 바빴다. 이미 드러난 사실이지만, 그들이 베낀 것들 가운데는 영국 정보기관이 미 대학원생의 논문을 표절해 작성, 신뢰도가 떨어지는 문건 <이라크: 그들의 은폐, 속임수, 위협의 구조>도 들어 있었다. 콜린 파월 미 국무는 이 문건을 바탕으로 지난 2월 유엔 안보리에서 후세인 정권의 위험성을 강조했고, 이는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됐었다.
또다른 단적인 보기가 위해 지난 80년대 쿠르드족을 상대로 생화학무기를 썼다는 기사들이다. 부시 대통령과 럼즈펠드 국방은 기회 있을 때마다 사담 후세인을 일컬어 “자국 국민을 가스(gas)로 죽인 자”로 묘사했다. 그리고는 지난 1988년3월 이라크 북부 할랍자 마을에서 5천명의 쿠르드족이 화학무기 가스로 떼죽음을 당한 사건을 보기로 꼽았다. 진실은 미 국방정보국(DIA)이 현지 조사 결과 작성된 기밀보고서에서 드러난대로, 당시 할랍자 마을 쿠르드족 주민 5천명을 죽인 것은 이라크 군이 아닌 이란 군이었다.(필자의 뉴욕통신 <9> 기사 참조). 그러나 미 언론들이 쿠르드족 관련 기사를 썼다 하면, “후세인=화학무기=할랍자” 등식을 되풀이했다. (한국의 일부 언론들도 이런 기사들을 보고 재탕, 삼탕 했고...).
이즈음 미국의 일부 노련한 기자들은 이라크 전쟁 뒤 기고만장해 있는 부시행정부의 아픈 부분을 조금씩 들춰내고 있다. 이를테면 세이무어 허시가 최근 주간지 <뉴요커>에 기고한 “럼스펠드의 특수정보원(源)은 믿을 만한가”라는 기사가 그러하다(관련링크 2). 허시는 이 기사에서 이라크전쟁 기간 중 럼즈펠드 국방과 월포위츠 부국방이 9.11 테러사건 뒤 펜타곤 내에 특수계획부(Office of Special Plans)를 운영하면서 잘못된 정보를 가공, 언론에 배포함으로써 미 국민들이 잘못된 현실인식을 갖도록 했음을 파헤쳤다. 이는 펜타곤 안에 포진한 매파들이 편향된 정보원들의 정보보고-아흐메드 찰라비가 이끄는 이라크국민평의회(INC)를 비롯한 반(反)후세인 망명세력, 9.11 뒤 정세 판단에서 미 중앙정보국(CIA)과는 다른 해석들을 냄으로써 묘한 라이벌 관계가 된 미 국방정보국(DIA)과 소수의 매파 참모들이 내는 정보보고-들을 바탕으로 “후세인이 생화학무기를 가지고 있고, 알 카에다와 연계됐다”는 주장을 펼친 데 대해 그 신뢰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기사다.
요점은 미 언론들이 럼즈펠드의 펜타곤 기자회견을 비롯한 미 매파들의 주장들을 그대로 미 국민들에게 전달했고,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언론들은 다시 그런 기사들을 베끼기 바빴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 블레어 기자 표절사건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터진 것으로 보인다.
관련링크 1 //www.nytimes.com/corrections.html
관련링크 2 //www.newyorker.com/fact/content/?030512fa_f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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