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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없이 지낸 아바나의 첫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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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없이 지낸 아바나의 첫 밤 김재명의 쿠바 리포트 <1>
<프레시안> 뉴욕 통신원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가 3주 일정으로 쿠바와 볼리비아 현지 취재를 떠났다.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 혁명의 성과와 문제점, 미국-쿠바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고, 볼리비아에선 체 게바라의 무장 게릴라 근거지를 돌아보면서 그의 실패한 투쟁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새겨볼 계획이다. 이 현지취재는 시사월간지 <월간중앙>과 공동협찬으로 이뤄졌다. 편집자

***입국 비자 필요 없고 여행자 카드로만**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중심이 돼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쿠바혁명(1959년)이 올해로 46년을 맞는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죽임을 당한 지도 벌써 37년을 넘겼다.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한 이래 지금껏 쿠바에선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아직껏 이루지 못한 혁명과제들은 어떤 것인가. 무엇이 쿠바혁명을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남도록 만든 요인들인가. 중남미를 자신의 텃밭으로 여겨온 초강대국 미국은 쿠바에게 어떤 존재인가. 쿠바의 일반 민초들과 지식인들은 쿠바혁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아울러 미국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 체 게바라가 지구촌 젊은이들에게 인기 높은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오늘의 쿠바를 어떻게 평가할까.

<사진1. 쿠바 아바나 시내 전경.@김재명

이런 물음표들을 지닌 채 쿠바 아바나 국제공항에 닿았다. 출입국 사무를 맡은 관리는 여권에다 쿠바 입국 사실을 나타내는 도장을 찍지 않는다. 그 대신 '여행자 카드'라 일컬어지는 조그만 입국서류에다 도장을 찍는다. 쿠바로 가기 전부터 이 여행자 카드 문제로 신경을 써야 했다. 쿠바 여행 안내책자엔 "쿠바 입국 비자를 받아도 되는 대신에, 이 여행자 카드를 들고 가야 한다"고 돼있다. 그렇다면 한국과 외교관계도 없는 쿠바에 들어가려면, 문제의 여행자 카드를 손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미국에서는 쿠바행 비행기 표를 살 수가 없다. 캐나다나 멕시코로 가야 한다. 미 부시행정부는 미국인들의 쿠바행을 막기 위해 그런 원칙을 지키도록 여행사와 항공사에게 강요한다. 미국 안에 있는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비행기 표를 사려 해도 불가능하다. 결제과정에서 구매자가 미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캐나다항공에 전화를 걸어 표를 사려 해도, 미국에서 전화를 건다는 사실을 알면, "전화를 그만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2. 미국 식민지 유산을 지닌 건물들이 아바나 시내 곳곳에 있다. 건물 앞 차량들은 아바나 특유의 2인용 '코코' 택시들.

문제는 필자에게 쿠바행 비행기 표를 판 캐나다의 한국인 여행사가 여행자 카드에 관한 정보에 대해선 깜깜했다는 점이다. 쿠바행에 대해 물어오는 한국인 손님이 그만큼 드문 탓이기도 했다. 답답했다. 필자의 쿠바 취재길에 합류하기 위해 서울에서 비행기 표를 산 K씨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캐나다의 쿠바 대사관에까지 전화를 걸어 "토론토 공항에서 쿠바행 비행기를 타기 바로 직전, 공항 출구(gate)에서 항공사 직원들로부터 그냥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공짜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서울로 K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한국여행사로부터 6만원을 주고(택배료까지 합쳐 7만원) 그 서류를 받았다"는 얘기였다. 와아! 항공사에서 거저 나눠주는 서류를 6만원이나 받고 팔다니....쿠바로 떠나는 날 아침 토론토 공항 출국장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문제의 그 여행자 카드란, 인천공항에 들어오기 앞서 비행기에서 나눠주는 입국신고서처럼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과 주소 따위를 적어 넣는 아주 간단한 서류였다. 쿠바에서 머물 주소는 일반적으로 아바나에 있는 호텔(Hotel in Havana) 쯤으로 적어 넣으면 됐다.

<사진3. 쿠바는 미국에서 이미 폐차된 지 오래인 중고자동차들의 박물관이라 일컬어진다. 1950년대 만들어진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다니며, 고장 나 길 한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흔하다.

쿠바가 입국비자를 요구하지 않고 여행자 카드라는 이름의 간단한 출입국 신고서로 갈음하는 까닭은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과 직접 관련된다. 쿠바의 주요 외화벌이 재원(財源)이 관광산업이다. 해마다 10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이 쿠바를 찾고 있다. 기후가 좋고 해변 휴양지가 많기 때문이다. 부시행정부 들어 미국은 쿠바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카스트로 체제 전복과 쿠바 민주화를 앞당긴다는 명분에서였다. 이에 따라 미국인이 멕시코나 캐나다를 거쳐 몰래 쿠바를 다녀온 사실이 드러나면 최고 25만 달러의 벌금, 징역 10년을 살도록 돼있다.

***미국 달러에 매기는 10% '카스트로 혁명세'**

법대로라면 미국인의 쿠바여행길은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모험이다. 법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쩌다 운 없이 쿠바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드러난 미국인은 일반적으로 벌금 7천5백달러를 문다. 카스트로 정권은 그런 미국인 여행자들이 안심하고 쿠바를 다녀올 수 있도록 여행자 카드에만 입국사실을 기록한다. 그리곤 공항 출국심사장에서 여행자로부터 도로 그 서류를 걷어간다. 따라서 여권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사진4. 대중교통수단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터라, 2인용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쿠바로 미국 달러를 그냥 들고 들어갔다간 손해를 본다. 아바나 공항에서 일부 외국인들은 '카스트로 혁명세'를 바쳐야 한다. '혁명세'란 용어는 물론 없다. 사정을 잘 모르고 미국 달러를 갖고 입국한 사람들이 공항 환전소에서 달러를 현지 화폐로 바꾸려 하면, 10%를 무조건 뗀다. 달러가 아닌, 유로나 엔화를 갖고 들어가면 모두 제값을 쳐서 환전할 수 있지만, 달러는 90%만 값을 쳐주고 10%는 공제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런 특이한 제도가 시행됐다. 카스트로 정권의 설명은 "쿠바를 달러경제의 압박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다.

아바나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는 '20달러'의 정액요금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달러'는 미국 달러가 아니다. 카스트로 정권이 지난해 11월 만들어낸 새로운 화폐인 '전환 페소'(Converted Peso)다. 이 돈의 가치는 미국 달러와 거의 같지만, 정확히 말해 10% 더 세다. 100 미국 달러를 환전소에 내면, 90 전환페소를 받는다. 그렇지만 쿠바 현지인들은 이를 그냥 '달러'라 일컫는다. 일반 쿠바국민들은 '모네다 나시오날'(moneda nacional)이란 이름을 지닌 '쿠바 페소'를 주고받지만, '전환 페소'도 함께 쓴다. 시골지역으로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카페로 갈수록 '쿠바 페소'가 많이 쓰인다.

***우중충한 건물들, 몇십년 된 자동차들**

카리브해를 끼고 가로로 길게 뻗어있는 아바나는 얼핏 보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도시다. 바닷가를 따라 8km 길이의 말레콘(Malecon) 도로는 서울로 치면 강변도로같은 것이지만, 한켠에 인도를 만들어 연인들의 산책로로선 제격이다. 이 말레콘 도로를 건설한 이는 쿠바인들이 아니다. 1901년 쿠바를 식민지로 다스리던 미국인들이다. 아바나 시내 곳곳에 세워진 대리석의 멋진 건물들도 미국이 쿠바 식민통치를 위해 지은 것들이 많다(서울 경복궁 앞에 있던 옛 중앙청 건물이나 시청 건물이 일제가 지은 사실과 마찬가지다).

<사진5. 아바나의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모습이다.

이 글 앞 문장에서 아바나를 가리켜 '얼핏 보면 아름다운 도시'라 했다. 도시로 들어가면, 결코 아름답지는 못하다.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 우중충한 느낌을 준다. 서울에 그런 건물들이 있다면, 벌써 페인트를 새로 칠했거나 허물어 버렸을 것들이다. 그런 건물들 속에 사는 이들은 방 하나를 여러 사람이 같이 나눠쓴다. 인구는 갈수록 늘어가지만, 주택을 새로 짓지 못하는 탓이다. 나중에 쓰겠지만, 아바나에 사는 한국인 교민(농업노동자로 80년전 이민 온 한국인의 후손) 집에 갔다가, 너무나 처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아바나의 차량들도 오래된 것들이라 매연을 시꺼멓게 뿜어댄다. 1950년대에 생산된 미국 승용차들이 버젓이 굴러다니는 것이 아바나이고 쿠바다. 그래서 쿠바는 '세계 중고 자동차 전시장'이라고 일컬어진다. 길 한가운데 멈춰 본네트를 열고 수리중이거나, 뒤에서 여러명이 차를 미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거리에서 우리 한국의 중고자동차들도 많다. 구형 소나타에서 티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자동차들이 아바나 길을 메우고 있다.

<사진6. 쿠바의 여인들. 겉으론 화려해보이지만, 가난하기에 옷 한 벌로 몇 달을 버티는 여인들도 많다.

멕시코를 통해 들여온 이들 한국 자동차들은 쿠바에선 '좋은 차'로 꼽힌다. 워낙 미국차들이 낡은 탓에 상대적으로 새차라서 성능이 낫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전세내 타고 다녔던 차도 현대자동차의 구형 소나타. 운전기사 헤르난데스는 "이 차가 너무너무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부속품 구하기가 쉽지 않은 듯, "언젠가 소나타가 고장 나면 다른 차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50년대 미국산 자동차들의 부품은 쿠바에서 대용품을 자체 개발해 쓰기에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아바나에서의 첫 밤은 세수는커녕 발도 씻지 못했다. 호텔에 물이 나오지 않은 탓이었다. 호텔 쪽 설명으론 그 지역 일대에 수돗물이 끊겼고, 낡은 수도관 탓에 그런 일들이 가끔 있다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호텔 종업원들의 태도였다. 그들에게 물이 안나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주의경제 체제 아래 쿠바는 모든 것이 국유다. 부동산 개인 소유는 없다. 오로지 그 집에서 살 권리만 있다. 호텔도 국유고, 따라서 호텔 종업원들은 '국가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다. 물이 안나와 손님이 불평을 하면, "다른 곳을 찾아봐라"는 정도지, 어디선가 물을 날라다 주려 애쓰는 눈치는 전혀 없다(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이른바 사회주의적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여러 모로 이번 쿠바 취재길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애써 지우며 아바나의 첫 밤을 넘겼다.

필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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