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에서 동쪽으로 900km.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미 해군기지가 있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를 타고 13시간 걸려 산티아고 드 쿠바를 가서, 다시 택시를 전세내 1시간30분을 달려 관타나모에 닿았다. 애당초 계획은 아바나-관타나모 사이를 하루 1회씩 오가는 국내선 비행기(비행시간 2시간30분)를 타고 가려 했다. 여행사에 가서 알아보니 앞으로 보름 동안엔 여유분 좌석이 없이 모두 팔린 상태였다. 비행기는 소형인데, 찾는 이는 많아서 그렇단다. 나중에 관타나모에서 들은 얘기로는, 예약된 비행기 손님의 대부분이 외국에서 호기심으로 관타나모를 찾는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사진1.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에 가까운 쿠바군 검문소 앞에 놓인 쿠바국기와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흉상. @김재명
하는 수 없이 저녁 6시에 떠나 밤새 달리는 버스에 몸을 맡겨야 했다. 버스 안에는 대부분이 외국인들이다. 쿠바의 시외버스 노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비아솔(Viazol), 다른 하나는 아스트로(Astro). 비아솔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선진국 수준의’ 높은 요금을 받는다. 쿠바 현지인들도 비아솔 버스를 탈 수는 있지만, 소득수준에 비해 엄청난 비아솔에 비해 훨씬 값이 싼 아스트로는 쿠바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수단이다.
말이 ‘대중교통수단’이지, 쿠바 사람들이 아스트로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려면 적어도 한달, 길게는 두세 달씩 기다려야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타려는 사람들에 비해 버스 대수가 많지 못한 탓이고, 이웃나라 베네수엘라 차베스정권의 우호적인 원유공급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쿠바의 기름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탓이다(쿠바-베네수엘라-미국의 미묘한 3각관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교육-의료는 천국, 교통은 지옥**
카스트로 혁명이 성공한 뒤 쿠바 사람들은 큰 변화를 실감해왔다.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 시절 미국인들은 쿠바 농지의 3분의 2를 소유, 현지 쿠바인들을 소작인 또는 저임금 농업노동자로 부려왔다. 카스트로는 그런 농지들을 모두 몰수, 국영농장으로 바꾸었다. 바티스타 정권 아래선 돈을 가진 집안에서만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으나, 카스트로 혁명으로 초중등 교육은 물론 대학교육까지도 거저가 됐다. 공부할 능력과 의욕만 있다면, 돈이 없어도 대학을 다닐 수 있다. 그런 덕에 현재 쿠바의 문맹율은 제로에 가깝다. 의료혜택도 쿠바혁명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입원비가 없어 병원 문턱에서 죽었다더라“는 얘기는 적어도 쿠바에선 들을 수 없다(쿠바의 교육과 의료체계에 대해선 이 연재에서 별도의 꼭지기사로 다시 다룰 예정이다).
<사진2.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전경.
쿠바혁명의 그런 바람직한 성공사례와는 대조적인 부분들이 있다. 도로, 교통, 인터넷, 수도, 전기, 전화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들(인프라)이 아직은 제대로 구축돼 있지 못하다. 특히 교통 사정이 열악한 편이다. 사회주의 통제국가인 쿠바는 주거이전의 자유가 없다. 수도 아바나에 살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마음 내키는 대로 이사갈 수가 없다. 평양에 살고 싶다고 신의주 사는 주민이 이삿짐을 맘대로 꾸릴 수가 없는 것과 사정이 비슷하다. 이사를 가고자 하는 쿠바 사람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자리가 바뀌는 등 나름의 그럴듯한 사유를 제시하지 않을 경우, 거절당하기 십상이다.
단기간의 여행은 허가 없이도 떠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동수단이 간단치 않다. 앞에서 적은 대로 아스트로 버스를 타려 해도 한달을 기다려야 한다. 기차표 얻기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실정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쿠바에서 오토바이는 아무나 타는 교통수단이 아니다. 경찰이나 업무상 필요하다고 인정된 경우에만 오토바이를 탈 수가 있다. 주말에 경춘가도를 따라 질주하는 즐거움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행위는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해악으로 여겨진다. 쿠바 경찰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도 한국 경찰처럼 크지 않아 기름 소비가 적은 것들이다.
아바나 시내를 굴러다니는 1950년대 미국 차들은 너무 낡아 장거리는 엄두를 못 낸다. 이래저래 적절한 이동 수단을 찾지 못한 쿠바 사람들은 지나는 트럭을 세워, 짐칸에 서서 가기도 한다. 산티아고 드 쿠바에서 관타나모로 가는 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빼곡히 실려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산티아고 드 쿠바와 관타나모 사이는 85km. 차로 달리면 1시간 반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러나 비아솔이나 아스트로 버스 모두 두 차례만 오간다. 급한 일이 생긴 사람은 트럭에 올라 타거나 쿠바인들의 소득(월평균 10달러 미만)에 비해 턱없이 비싼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 바가지를 썼는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관타나모 왕복에 85전환페소(지난번 글에 썼듯, ‘혁명세’ 10%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95달러)를 냈다. 이만한 돈은 쿠바 서민들의 열달치 소득이다.
<사진3.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캠프 델타 포로수용소. 같은 관타나모 기지 안이라도, 미 해군기지와는 따로 떨어져 있다.
(독자 여러분들이 설마 하고 놀라겠지만, 쿠바인들의 소득수준은 너무 낮다. 경찰과 청소부 등 육체노동을 많이 하는 직종이 가장 많이 월급을 받는데, 그 수준이 30달러다. 대학교수와 의사가 20달러, 나머지 대부분의 직종은 10달러 안팎이다. 식량배급카드로 국가로부터 밀가루, 식용유, 설탕 등을 거저 공급 받아 생활비가 덜 든다. 그러나 그만한 소득으로는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냉장고나 텔레비전 등 상대적으로 비싼 가전제품을 사들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많은 쿠바인들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나름대로 ‘요령’을 익혀왔고, 가전제품을 사들이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를 ‘생존술’이라 정의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따로 살펴보겠다.)
***노래 ‘관타나메라’와 호세 마르티**
고구마처럼 동서로 길게 뻗은 쿠바의 동쪽 거의 끝부분 남쪽에 자리잡은 관타나모는 인구 20만의 제법 큰 지방도시. 관타나모란 이름 자체는 노래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Guantanamera, guajira Guantanamera, 관타나모 아가씨, 촌뜨기 관타나모 아가씨)로 우리 귀에 익숙한 편이다. 지난 1960년대 미 반전가수 피트 시거가 불러 널리 알려진 '관타나메라'는 오래 전부터 쿠바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다. 가사를 들여다보면, 한편의 아름다운 시를 떠올린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이는 쿠바 시인이자 독립영웅으로 식민지 군대인 스페인군에 사살됐던 호세 마르티(1853-1895)다. 쿠바의 어딜 가나 사람들은 마르티의 동상과 마주친다. 쿠바의 관문인 아바나 국제공항의 정식이름이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다. 카스트로 사회주의 혁명정권도 호세 마르티를 인민영웅으로 떠받들어 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쿠바혁명의 정통성을 마르티와 연결시켜 풀이한다. 한 마디로 마르티는 '쿠바 혁명의 아버지‘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보는 쿠바군 관할 고지로 오르기 위해, 그곳 군부대가 설치한 초소 앞에 갔을 때도 마르티의 흉상을 볼 수 있었다.
<사진4. 미 해군기지를 내려다 보도록 쿠바군 관할 고지에 설치된 망원렌즈.
2001년 9.11 사건 뒤 6백명 넘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 포로들을 재판도 없이 가두어놓은 채 인권 침해시비를 낳아온 미 해군기지는 관타나모 도심지와는 뚝 떨어진 관타나모만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쿠바 취재를 계획했을 때부터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자체를 취재한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곳은 전세계 미디어의 사각지대다. 부시행정부에 협조적인 미국의 보수적 TV 매체 팍스 뉴스(Fox News)조차도 관타나모를 직접 취재하진 못했다. 그저 펜타곤에서 제공하는 영상자료를 받아쓸 뿐이다. 그런 관타나모 기지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쿠바군 관할의 마르티레스 고지다.
고지에 오르려면 적어도 하루 앞서 지정된 여행사를 통해 신청을 해야 한다. 수수료는 5달러(보다 정확히 말하면 ‘전환 페소’). 이 이 5달러도 쿠바정부로선 그런대로 괜찮은 수입원처럼 느껴졌다. 9.11 뒤 관타나모는 관광상품으로 떠올랐다. 그곳 고지에서 필자를 맞이한 쿠바인 안내원은 군인이 아닌, 쿠바 관광청 소속 공무원이었다. 그는 “이곳을 찾는 단체 관광객들을 실은 버스들이 하루에 적어도 한 대꼴로 온다. 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사람들이지만,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도 있다”고 설명한다.
고지에서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바라보는 광경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필자가 갖고 간 300mm 렌즈로는 기지 안에서 오가는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기 어려웠다. 고지에 붙박이로 설치해놓은 전망대로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내원 설명에 따르면,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면 사람 걸어가는 게 보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날은 햇살이 한국의 가을하늘처럼 맑은 데도 그렇질 못했다. 현재 해군기지 안에는 군인 1천명, 관련 미국인 2천명이 머물고 있다.
***“혁명으로 미군 상대 술집과 창녀 사라졌다”**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는 주권국가인 쿠바 영토 안에 파고든 미국 점령지다. 지난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더불어 쿠바를 빼앗으면서, 관타나모만 일대는 미 해군기지로 개발됐다. 쿠바가 1903년 ‘형식적인’ 독립국가로 됐을 때, 관타나모는 영구임대 계약으로 미국에 넘겨졌다(역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국은 쿠바인들에게 영원히 미군 점령지역으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미국의 쿠바내정 개입을 인정하고 독립을 얻을 것이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했다. 쿠바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의 내정간섭을 합법화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택했다).
<사진5. 1950년대 미군 술집과 창녀들로 흥청댔던 관타나모 시가지. 카스트로 혁명으로 술집과 창녀들은 모두 사라졌다.
미국은 해마다 금화 2천개(지금의 화폐가치로 4천달러)를 지불하기로 한 관타나모 기지 임대차 계약조건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점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계약 쌍방이 함께 계약을 끝내기로 서로 합의했을 경우에 한해서만(if both parties mutually consent to terminate the lease)' 쿠바인들이 관타나모 기지를 돌려받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관타나모 기지는 영원히 미국인 것이다.
1959년 1월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 불평등계약조건은 문제가 없었다. 쿠바혁명 뒤 카스트로 정권은 계약 파기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합법적으로 임대계약을 맺었는데 무슨 소리냐. 계약서를 잘 들여다봐라”며 딴전을 펴왔다. 카스트로 체제는 혁명이 성공한 바로 뒤 미 해군기지로 들어가는 식수와 전기를 끊고 소규모 총격전마저 벌였다. 그런 긴장관계 속에 쿠바정부는 미국이 해마다 관타나모 기지를 빌린 대가로 보내오는 4천달러 짜리 수표를 은행에 돌려 현금화하지 않았다.
관타나모 사람들은 미 해군기지를 복합적인 감정으로 바라본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퇴직했다는 고메스(67)를 시내에서 만났다. 그는 1950년대 관타나모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1959년 카스트로 혁명 이전에 관타나모 시내엔 미 해군들로 늘 흥청댔다. 그들 때문에 이 지역경제가 흥청대긴 했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술집이 즐비했고, 창녀들이 많았다. 술 취한 병사들이 지나는 여인들을 희롱하는 일도 잦았다. 쿠바혁명으로 그런 모습들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게 참 다행스런 일이다” 관타나모 주민들은 9.11 뒤 볼썽사납게 알 카에다 포로들을 가둔 채 인권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미 해군기지가 하루 빨리 쿠바에게 반환돼, 쿠바 해군기지로 거듭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필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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