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했던 바티스타 친미 독재정권이 1959년 혁명으로 무너졌을 때 쿠바의 민초들은 열광했다. 쿠바의 천연자원과 부(富)를 훔쳐가던 미국 기업들이 하나둘씩 몰수돼 국유화될 때 그들은 박수를 쳤다. 쿠바 민초들뿐 아니다. 세계의 진보적인 지식인들도 열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미국의 좌파 경제학자 레오 휴버만(Leo Huberman)과 폴 스위지(Paul Sweezy)도 그랬다. 쿠바혁명이 성공한지 1년쯤이 지난 1960년 3월 3주 동안 쿠바를 방문한 뒤 휴버만과 스위지 두 사람은『쿠바: 혁명의 해부』(1960년 초판)을 써냈다.
그 책의 결론은 낙관적이었다. 그 논리적 근거는 이러했다. 외부(주로 미국 기업들)로부터의 ‘무자비한 약탈과 착취’, 내부(바티스타 정권)의 ‘범죄적 관리실패’(다시 말해서 무능부패)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비옥한 자연환경 덕에 혁명 전에도 전세계 저개발 국가들 가운데 가장 잘 사는 편에 속했다. 그런데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으니, 쿠바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 잘 살게 될 것이라고...
***현재진행중인 미완의 혁명**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오늘, 휴버만과 스위지의 예언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듯이 보인다. 교육과 의료혜택이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주어지고 있다는 점에선 긍정적이고, 여전히 국민소득이 낮고 생활수준이 기대했던 것만큼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을 만하다. 말하자면 아직은 미완(未完)의 혁명이다.
쿠바 사람들은 이같은 현실에 얼마나 만족하며 살까. 3주 동안 쿠바를 여행하면서 바로 이런 점이 궁금했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지식인이든 거리의 보통사람이든 필자가 만난 사람들은 “몇몇 부자들만이 교육과 의료혜택을 입었던 옛날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고 대체로 카스트로 혁명에 후한 점수를 매기면서도, “현실에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이 연재 앞글에서 살펴본 쿠바의 교통난과 주택난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45년 전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은 아직도 진행 중인 사안이라 여긴다.
***“옛소련 몰락과 미 봉쇄정책 탓“**
쿠바 지식인들은 쿠바의 경제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꼽았다. 아바나 국립대학 탈리아 풍 리베론 교수(마르크스철학 전공)의 얘기.
“하나는 1990년을 앞뒤로 한 옛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몰락, 다른 하나는 미국의 봉쇄정책이다. 옛소련은 쿠바 사회주의의 후원자였다.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공산권이 1990년대를 앞뒤로 하나둘씩 무너지면서 쿠바에 주어지던 각종 원조와 교역 혜택이 끊어졌다. 그로부터 1993년까지 쿠바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다. 우리는 그때를 ‘특별한 기간’(special period)이라 불렀다. 지금 돌이켜 봐도 그때는 암담했다. 우유 한병 손에 넣으려고 길게 줄을 서야 했던 시절이 바로 그때였다”
옛소련 해체 뒤 에너지 공급이 끊어져 어려움을 겪은 북한과 마찬가지 사정으로 이해된다. 이어지는 리베론 교수의 얘기.
“지난 45년 동안 쿠바의 경제사정을 옥죄온 것이 미국의 경제봉쇄다. 미국쪽 용어는 embargo(금지)이지만 우리 쿠바 사람들은 그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훨씬 강한 blockade(봉쇄)란 말을 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 국내 반(反)카스트로 여론의 중심은 플로리다주의 반(反)카스트로 쿠바 이민사회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 아래서 검은 돈을 만지며 떵떵거리며 살았던 이들이다”
조지 부시 행정부 들어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은 더욱 강화됐다.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의 민주화를 앞당긴다“는 명분에서였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것과 같은 논리다. 얼마나 많은 달러가 송금되는지는 자료마다 추정치가 달라 정확하지 않다. 대체로 해마다 4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쯤이 쿠바로 송금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같은 송금은 달러가 한 푼이라도 아쉬운 쿠바경제로 보면 참으로 귀한 젖줄이다. 2004년 5월에 발표돼 7월부터 시행된 새로운 조치는 쿠바로 미국 달러가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는 쪽에 초점이 모아졌다.
△미국에 사는 쿠바인(Cuban-American)은 3년에 한번만 쿠바를 방문할 수 있다(전에는 1년에 1회). △쿠바에 사는 가족에게 보내는 송금도 1년에 1천2백달러로 제한한다 △송금이나 소포는 직계가족에게만 보낼 수 있으며, 카스트로 정권의 고위관리와 공산당원들에게는 보낼 수 없다. △미국에 사는 쿠바인이 쿠바를 방문할 때, 하루 50달러의 비용을 넘어설 수 없다(이를테면 10일 동안 쿠바에 머물 경우 필요경비로 5백달러 이상 가져가선 안 된다. 전에는 하루 164달러가 상한선).
***카스트로, 대규모 군사훈련으로 부시와 신경전**
케네디 행정부 시절인 1961년 미 CIA가 훈련시킨 쿠바 출신 용병들이 쿠바 피그만을 침공했다가 쿠바군의 반격에 밀려 패퇴했었다. 이른바 피그만 침공사건이다. 부시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지켜보면서, 카스트로 정권은 쿠바를 겨냥한 또다른 군사적 침략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카스트로는 지난해 6월 20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아바나에서 열렸던 미 봉쇄정책 규탄대회에서 “제한공습이든 교묘한 소모전(war of attrition)이든 쿠바를 상대로 미치광이 모험을 할 엄두를 내지 말라”며 부시를 비난한 바 있다.
지난 해 12월 라울 카스트로 국방장관(피델 카스트로 수상의 동생)은 ‘2004 요새작전’이란 이름 아래 미그-29기까지 동원, 20년만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미국의 계속된 군사적 침공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라고 발표한 바 있다. 체 게바라처럼 혁명군 사령관의 한사람으로서 1959년 쿠바혁명에 공을 세웠던 라울은 쿠바군을 장악한 인물. 쿠바정권 권력서열 2인자로, 후계 0순위로 꼽힌다.
부시행정부 들어 미국이 대쿠바 봉쇄정책을 강화하자, 피델 카스트로 수상은 대중연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쿠바 사람들은 지난 45년동안 미국의 봉쇄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해왔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쿠바혁명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실제로 미국 안에서도 쿠바에 대한 봉쇄정책을 풀고 연성정책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쿠바 민주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주장들이 제기돼 왔다.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봉쇄 무용론을 펴는 대표적인 인물이다(카터는 2004년 8월 “쿠바로 가선 안된다”는 부시행정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아바나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얼굴을 맞댔었다).
***“쿠바 봉쇄정책은 미국에도 악영향”**
쿠바 지식인들은 오래 전부터 미국의 봉쇄정책 무용론을 펴왔다. 쿠바 아바나 중심가에 자리한 국제관계고등연구소(The Higher Institute for International Relations, 스페인어 약어로는 ISRI)에서 카를로스 알수가라이 교수(국제정치학)를 만났다. ISRI는 쿠바 외교관을 양성하는, 한국으로 치면 외교안보연구원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곳이다. 그는 미국의 쿠바 봉쇄론이 지닌 허구적 논리를 이렇게 지적했다.
“쿠바혁명 뒤 지금껏 미국 정치인들은 쿠바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심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카스트로 정권 붕괴를 꾀하려고 경제 봉쇄정책을 펴왔다. 그런지도 벌써 40년을 넘겼다. 이미 그 효과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볼쇄정책이 효과가 있다는 주장은 미국 안에서도 소수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우리 쿠바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 애써왔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쿠바는 몇몇 친미국가들을 뺀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은 상태다. 캐나다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 쿠바와 좋은 관계를 맺어왔다”
알수가라이 교수는 쿠바가 폐쇄된 나라가 아님을 강조했다. “부시 쪽 선전과는 달리 쿠바는 개방된 나라다. 김기자, 당신도 쿠바에 들어올 때 비자도 없이 여행자 카드 하나로 그냥 들어오지 않았는가” 부친이 주일 쿠바대사를 지냈고, 그 자신 EU 대사(1994-96년)를 지낸 카를로스 알수가라이 교수가 펴는 미국의 대(對)쿠바 강경책이 미국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경제봉쇄가 쿠바에게 이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수적으로 두 가지 효과를 낳아왔다. 첫째는 쿠바혁명 뒤부터 이뤄진 경제봉쇄가 쿠바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거부반응을 심화시킴으로써, 쿠바 안의 미국기업들이 활동할 여지를 없앴고, 결과적으로 쿠바가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도록 만들었다. 두 번째는 쿠바 대외무역과 투자부문에서 미국시장 말고 다른 대안(alternative)들을 찾도록 했고, 그 대안이 옛소련과 그 동맹국들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쿠바혁명의 리더십 안에 이미 강하게 들어있던 급진적 사회주의적 경향성이 더욱 커졌다. 만일 미국이 쿠바혁명을 역사발전의 순리로 받아들였다면, 쿠바는 미국과 부드러운 관계를 이어갔을 것이고 긴장관계는 그만큼 낮았을 것이다”
필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사진(@김재명)
1. 아바나 시내를 굴러다니는 50년대 미국 자동차들. 관광객들을 상대로 달러를 벌어들인다.
2. 아바나 시내는 수도관이 낡아 수돗물의 안정적 공급이 과제로 떠올랐다.
3. 미국에서 가족이 보낸 달러를 찾기 위해 아침부터 은행 앞에 줄을 선 시민들(산타 클라라).
4. “지난 45년 동안 미국의 경제봉쇄는 쿠바를 옥죄왔다” 아바나 국립대학 탈리아 풍 리베론 교수(마르크스 철학 전공)
5. “미국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쿠바혁명의 급진적 경향성이 더욱 커졌다” 쿠바 국제관계고등연구소(ISRI) 카를로스 알수가라이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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