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사람들은 누구나 작은 수첩만한 식량배급카드를 지니고 있다. 카스트로 정권은 1959년 혁명이 성공한 뒤 기본 생필품들을 무상으로 나눠주어 왔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의 쿠바에선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보는 것처럼) 식량의 독과점으로 굶어죽은 사람이 나와선 안된다”는 논리 아래서다. 식량배급카드를 들고 정부가 운영하는 배급소엘 가면, 매달마다 1인당 달걀 8개, 설탕 2.3kg, 쌀 2.7kg, 식용유 200ml, 쇠고기 450-700g, 담배 10갑을 거저 얻을 수 있다. 7살 미만의 어린이를 둔 집은 하루 1리터 분량의 우유를 타간다.
쿠바에서 만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부에서 지급해주는 기본 식량으론 열흘을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20일 동안은 어떻게? 정부에서 운영하는 식품점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다행인 것은 값이 매우 싸다는 점이다. 세 식구가 하루를 견딜 만한 큰 빵 한 덩어리가 1페소다. 우리 돈으로 5원도 채 안된다(1달러는 28페소, 1페소는 우리 돈으로 약 4원). 따라서 쿠바에서 사람이 굶어죽었다는 얘기는 듣기 어려운 일이다.
***혁명 기억하는 노년층, 혁명 모르는 젊은 세대**
그러나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가 없다. 이 부분이 21세기로 이어지는 쿠바 혁명의 화두처럼 여겨진다. 이사벨 모날(65)은 여러 해에 걸쳐 쿠바의 유네스코 대표를 지낸 쿠바의 진보적 지식인이다. 좌파 사상지 <마르크스 아호라>의 편집인인 모날은 쿠바혁명 당시 대학생으로서 카스트로 혁명에 뛰어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바티스타 친미독재정권 시절의 빈부격차와 가난을 생생히 기억하는 노년층은 피델 카스트로 정권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혁명으로 빈부격차와 착취가 사라졌고, 가난한 사람들도 굶주림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로 갈수록 혁명에의 열정이 낮고 자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유혹이 강하게 느끼고 체제불만이 높은 편이다”
기본 생필품이 무상 공급된다지만, 쿠바의 임금수준은 높지 못하다. 노동의 강도가 세고 거리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이른바 3D 직종이라 할 경찰이나 청소부가 800페소(약 30달러), 의사나 대학교수가 600-700페소(약 20-25달러), 일반적으로는 월급 수준이 10달러에 그친다. 그런 쿠바 현실에서 ‘문명적 사치’를 부리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보다 멋진 옷, 보다 성능이 뛰어난 냉장고나 카메라를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쿠바에서 휴대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있는 젊은이를 만나기 어렵다. 컴퓨터 전공을 한 학생이 노트북은커녕 개인용 컴퓨터가 없는 것이 쿠바의 현실이다.
그런 물품들을 사려면 거액의 현금이 있어야 한다. 국가에서 대주는 기본식량과 최저임금(?)으로 굶어 죽지는 않지만, 카메라 한대를 사기 어려운 게 일반 쿠바인의 삶이다. 미국에서 가족이나 친척이 달러를 꼬박꼬박 보내주는 사람은 물론 형편이 다르다. 결국 달러다. 달러를 손에 쥐어야 카메라고 뭐고 살 수가 있다. 그러나 일반 쿠바인들이 거액의 현금을 모으기란 힘든 일이다. 따라서 집에 윙윙 잡음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냉장고를 바꾸고 싶어도 그저 참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쿠바 사람들은 달러 모으기에 열심이다. 외국인 방문자들과 접촉기회가 잦은 사람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든 제주머니에 1달러라도 챙기려 든다. 쿠바에 머무는 날이 더해질수록 음식점에 갈 때마다 계산서를 오래 쳐다보게 됐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합산이 틀렸다. 적게는 1달러, 많게는 3달러쯤 더 나왔다. 필자만 그런 경험을 한 게 아니다. 그곳에서 만난 외국 관광객들로부터 그런 얘기들을 거듭 들었다.
쿠바 사람들의 산수 실력이 형편없는가? 그렇지 않다. 쿠바에선 무상교육을 받을 기회가 넓기에 고졸 이상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조금 더 많게 합산해 계산서를 갖다준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그 차액을 ‘삥땅’하겠다는 속셈이다. 한달 월급이 20달러인 호텔 종업원이 하루에 5명씩만 그렇게 긁어내면, 하루 5-10달러다. 작은 돈이 아니다. 그렇게 속임수로 모은 돈에다 팁으로 받은 돈을 합치면 월급보다 훨씬 많게 된다. 그래서 외국인을 상대하는 그런 자리는 너도나도 하겠다고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하다.
***한 택시기사의 삥땅과 뇌물**
필자가 아바나에 머물며 자주 타고 다니던 택시는 한국에서 중고차로 멕시코를 거쳐 수출된 소나타 구형. 그 택시를 모는 50대 초반의 운전기사 헤르난데스도 쿠바에서의 생존술을 나름대로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필자를 태우고 다닐 때, 택시 미터기를 아예 끄고 다녔다. 하루(정확히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9시간)에 60달러를 주기로 했는데, 아마도 그는 많아야 40-50달러만 택시회사(국영)에 입금하고 나머지는 챙겼을 것이다.
쿠바에서의 마지막 날 호세 마르티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도 헤르난데스는 택시미터기를 켜지 않았다.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택시기사들이 요금을 정직하게 매기는지를 체크하는 감시인(inspector)들이 도로 곳곳에 있다고 하던데... 당신은 괜찮은가?” 조금 뜸을 들이던 헤르난데스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정규직 감시인에게 걸리면 골치가 아프지만, 보조직 감시인에게 걸리면 2달러쯤 주면 문제없다” 그렇다면 뇌물을 준다는 얘기다. “그들도 가족을 거느린 사람들이고, 따라서 돈이 필요할 테고...”
오해는 없어야겠다. 쿠바의 모든 택시 기사들이 달러 챙기기에 눈에 멀어 부패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관타나모에서 필자를 미 해군기지가 내려다보이는 쿠바군 고지까지 태워다 준 60대 초반의 택시기사는 매우 정직해 보였다. 그리고 “카스트로 정권이 하는 일이 아직은 다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지난날 친미 바티스타 정권 시절의 가난을 떠올리면 혁명은 성공했다”는 얘길 했다.
쿠바의 일부 택시기사들은 정년퇴직한 공무원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쿠바군에서 사령관을 지냈거나 고위관료 출신들도 있다. 퇴직 뒤 사회봉사 개념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연금으로 살아가면서 ‘문화적 사치’를 부리기엔 달러가 필요하기 때문에 운전대를 잡는다는 설명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그런 얘길 들으면, “그들이 현직에 있을 때 부패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니, 좋은 일 아니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쿠바 사람들의 달러 챙기기는 숙박업 종사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쿠바에는 국영 호텔 말고도 '까사 파르티큘라레스(Casa Particulares)'란 이름의 작은 숙박업소들이 많다. 쿠바 가정집에서 재워주고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말하자면 유럽이나 미국의 B&B(Bed & Breakfast)와 비슷한 집들이다. 집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20달러에서 30달러쯤이다. 물론 이런 숙박업소도 국가소유다. 다만 개인이 그런 업소를 운영하도록 국가로부터 위임을 받았을 뿐이다.
카스트로 정부는 개인이 살면서 운영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국가 소유인 '까사 파르티큘라레스‘ 종사자들로 하여금, 관광객들이 묵을 때마다 여권번호와 이름 등을 명확히 기록해두길 요구한다. 국고로 들어와야 될 달러를 개인의 주머니로 새는 걸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보름 동안 쿠바에 머물면서 필자의 여권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곳은 아바나의 큰 호텔말고는 별로 없었다.
택시미터기 감시인과 마찬가지로, 숙박업소들이 제대로 규정을 따르는지를 체크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감시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은 두세 명이 한 조를 이뤄 카메라를 들고 숙박업소에 불시에 들이닥친다. 그래서 업소 장부 기록이 또박또박 돼 있질 못하면(머무는 손님은 있는데, 장부상엔 기록이 없다면), 그날로 '까사 파르티큘라레스‘는 문을 닫아야 하고, 심한 경우 그 까사의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비워줘야 한다. 그런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달러가 한 푼이라도 아쉽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모험을 벌인다.
***달러 벌기 위해 수의사 그만 둔 민박집 주인**
쿠바의 중동부 도시 산타 클라라는 지난 연재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체 게바라 사령관이 쿠바혁명사에 큰 점을 찍었던 곳이다. 체 게바라의 혁명군은 그보다 숫자나 무장에서 압도적인 정부군을 기습공격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친미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1997년 체 게바라의 시신이 볼리비아에서 발굴돼 쿠바 산타 클라라로 옮겨진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다. 다음은 그곳 체 게바라 혁명기념관을 취재하려고 산타 클라라에 닿았을 때의 얘기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 언뜻 듣기에도 고급에 가까운 영어를 말하는 30대 중반의 사내가 다가왔다. 필자가 애당초 세웠던 계획은 그곳 중심가의 호텔로 1958년 산타 클라라 시가전이 치열하게 펼쳐졌을 무렵 박힌 총탄이 아직도 그대로 보이는 ‘리브레 호텔’(‘해방호텔‘이란 뜻)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내가 워낙 영어를 잘하는 데다, “우리 까사에 당신이 묵는다면, 쿠바에 대해서 궁금한 걸 내가 아는 한 다 말해주겠다”는 얘기를 듣고 취재욕심에 그를 따라갔다.
그의 까사는 방이 3개인, 매우 초라한 집이었다. 방 하나에 세 식구(아내와 네 살 난 어린 여자아이), 한국으로 치면 여인숙 정도다. 사내의 이름은 고메스. 알고 보니, 3년 전까지만 해도 병든 동물들을 치료하는 수의사로 일했다. 월급이 워낙 낮은데 비해(20달러쯤) 노동강도는 매우 높아서 그만 두었다. 고메스는 “몸이 아파서 수의사 일을 못하겠다”며 그만 두고, 살던 집을 수리해 까사를 열었다.
쿠바에서는 직업선택의 폭이 넓지 못하다. 카스트로 정부에다 그럴만한 사유를 대고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함부로 직업을 바꾸지 못한다. 고메스는 수의사를 그만두고 까사를 열도록 허락 받는 데 성공했다. 학교 다니면서 열심히 해둔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서였다. 방 하나에 아침 식사를 주고 하루 20달러. 수의사 한달 월급과 같은 액수다. 고메스는 내게 여권을 보여달라는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의 장부엔 따라서 그날 손님이 묵었다는 기록이 남겨지지 않았고, 20달러는 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을 터였다. 쿠바 생존술의 한 보기다.
필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사진 설명 @김재명)
1. 가난한 쿠바 사람들에게 1달러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국영기업 종사자의 월급은 10달러 안팎에 머물고 의사-교수가 20달러 수준이다.
2. 쿠바혁명의 감격을 기억하는 노년층과는 달리, 젊은 세대는 혁명에 관심이 낮고 따라서 체제불만이 높다.
3. “쿠바를 떠나 미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젊은 쿠바여인. 그녀에게 달러는 물신(物神)과 같은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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