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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 재협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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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기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 재협상해야 한다 주한미군 역할변화와 감군계획은 '재협상 사유'
2006년 5월 4일 나는 대추분교에 갔다. 그날 새벽 정부가 진압을 시작해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는 보도를 접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만4000여 명의 경찰과 군, 철거요원을 동원했다.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강경진압은 안 된다. 우리가 중재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대추리로 갔다.

그러나 이미 대추리 일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행되고 있었다. 남은 학생과 시민들은 공권력에 밀려 대추분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옥상에는 10여 명의 신부님들이 계셨다. 나도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옥상에 있음으로써 경찰이나 학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차분해지기를 바라서였다.

대추분교 옥상에서 경찰의 진압작전을 지켜보면서 나는 너무 슬펐다. 미군에 기지를 주는 문제로 우리끼리 싸우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미국은 지주, 한국 정부는 마름(관리인), 평택 주민들은 소작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사정권 연상케 하는 정부의 강경대응

평택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군사정권을 연상케 했다. 정부는 1만4천여 명의 경찰과 군에 물대포까지 앞세워 진압에 나섰다. 시민들을 모두 연행한 다음에는 중장비로 대추분교를 부숴버렸다. 대추분교에서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집회를 하던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의 수는 1천여 명에 불과했다.

국방부는 볍씨가 뿌려진 드넓은 빈 들판에 철조망을 둘러쳤다. 그리고는 빈 들판을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5월 6일 철조망을 둘러싸고 시위대와 병사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러자 국방부는 병사들이 폭행당했다며 민간인이라도 군형법으로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철조망 훼손에 군용시설 손괴 조항(제69조)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군용시설이 되려면 군사적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철조망 안에 군사시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철조망 안에는 빈 들판이 있을 뿐 아무런 군사시설도 없다. 초병폭행 조항(제55, 56조)도 초병이 군사시설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므로 적용할 수 없다.

대검찰청도 엄단 방침에 따라 624명의 연행자 중 무려 60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16명을 빼고는 모두 기각(기각율 73%)되어 버렸다. 국방부와 검찰은 영장청구 대상자 중 주민은 없다며 평택사태가 외부세력에 의한 인상도 주려 했다. 당일 경찰은 나이드신 주민들은 차마 연행하지 못했다. 그러니 영장청구 대상자에 주민이 있을 리 없다.

세 번이나 땅과 집 빼앗기는 평택 농민들

미군기지 확장에 평택 농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분들은 미군기지 확장부지로 팽성지역에서 285만평(서울 여의도의 3배)이나 되는 땅을 내주어야 한다. 그런데 농민들은 벌써 두 번이나 땅과 집을 빼앗긴 경험이 있다.

일제의 대동아전쟁 말기인 1942년 일본군은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주민들의 땅과 집을 빼앗고 강제노역을 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됐지만 주민들은 땅을 돌려받지 못했다. 새로 갯벌을 간척해서 살아야 했다. 6.25 전쟁 끝 무렵인 1952년에는 미군이 기지를 만든다고 갑자기 땅을 밀고 집을 헐어 버렸다.

이렇게 주민들은 두 번이나 '내 땅'에서 쫓겨났다. 집도 없이 겨울을 나다 보니 어린아이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기도 했다고 한다. 작은 군용텐트에 두 가구가 살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다시 갯벌을 간척한 것이 오늘의 황새울 들판이다.

나는 2006년 3월 10일 대추리를 방문해 마을회관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그때 많은 주민들을 만났다. 땅을 다 내줄 수 없다는 그 분들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 분들에게 보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주민들이 백만장자라고 하며 더 많은 보상을 바라는 것처럼 매도했다.

미군 평택이전은 대북억지 역할 않는다는 뜻

이번 평택사태의 원인은 주한미군의 공세적 역할변화(전략적 유연성)에 있다. 용산의 미군 지휘부와 의정부의 미 2사단 등 주한미군이 평택으로 결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북방어는 한국군에 맡기고 주한미군은 전 세계 분쟁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다. 오산비행장과 평택항은 미군이 전 세계로 나가는 데 매우 편리하다.

이제 주한미군은 대북방어 역할을 하지 않는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2003년 3월 16일 대북방어는 한국이 부담한다고 말했다. 미군이 맡고 있던 한국 내 10대 군사임무도 2008년까지 한국군에 이양된다. 그래서 주한미군은 평택기지를 확장해서 전 세계 분쟁에 개입하기 위한 거점기지로 만들려는 것이다.

정부는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이나 주한미군 재배치(GPR)가 주한미군의 역할변화(전략적 유연성)와 관계없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정부 스스로 이것이 거짓말임을 입증했다. 지난 1월 19일 반기문 장관과 미국의 라이스 장관은 워싱턴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주한미군 역할변화와 감군은 재협상 사유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은 재검토해야 한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협상을 잘못했고 그 다음 정부들도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미국과의 재협상이 불가능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렇지 않다.

용산기지이전협정 제2조 5항에 따르면 "양 당사국은 이전의 시행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시설과 구역의 소요에 현저한 변화가 발생한 경우에는 상호 협의하고 이전계획에 필요한 조정을 가할 수 있다." 제2조 2항에는 "필요한 경우에는 양 당사국의 상호 합의에 의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전"도 가능하다고 돼 있다. 미 2사단 이전협정인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LPP) 개정안에도 같은 조항이 들어 있다.

주한미군은 재배치되는 것만이 아니라 대거 줄어든다. 2004년 10월 4일 주한미군은 2008년까지 1만2500명을 줄이기로 확정했다. 이렇게 되면 2008년 말 주한미군은 2만4500명이 된다. 더 줄어들 가능성도 크다. 2006년 4월 23일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주한미군의 추가감군도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윌리엄 팰런 미 태평양사령관과 버웰 벨 주한미군 사령관도 미 상하원에 그렇게 보고했다.

그런데도 주한미군 감군은 평택기지 확장 면적에서 고려되지 않았다. 주한미군이 3분의 1 이상 줄어드는 것은 용산기지이전협정이나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 개정안의 "주한미군의 시설과 구역의 소요에 현저한 변화가 발생할 경우"에 해당한다. 이렇게 되면 팽성지역 285만 평을 다 주지 않아도 된다.

농민 생존과 한반도 평화 위해 절반만 주어야

정부는 발상을 바꿔야 한다. 군사정권이 쓰던 강압적인 방법이나 공안사건으로 몰아서는 평택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국민의 반대여론을 미국과의 재협상에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의 재협상은 근거도 충분하고 논리도 부족함이 없다. 정부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

나는 주한미군의 대북 억지력과 감축 규모를 고려할 때 285만 평의 절반만 제공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국방부가 강제수용한 땅에는 주한미군의 골프장 부지도 포함되어 있다. 미군이 전용하던 성남골프장(28만 평) 대체부지다. 주한미군을 위한 각종 위락시설 부지도 많다.

이런 사유들을 모두 묶어 국방부는 미국과 재협상해야 한다. 재협상을 통해, 다시는 내 땅을 떠나지 않겠다는 평택 농민들, 오갈 데 없는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을 걱정하는 국민들의 염려도 덜어야 한다. 정부는 강제수용을 중단하고 생존과 평화를 바라는 평택 주민과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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