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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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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름 [황새울에 평화를! 릴레이 기고] 서수찬 '대추리는 몸시를 쓴다'
자식들이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가정의 울타리에 안주했던 나를 다시금 생명과 평화의 운동으로 일으켜 세운 이름. 죽어가면서도 개인적으로 안주한 나와 같은 모든 사람들을 떨쳐 일어서게 한 이름. 다른 사람 일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이기적인 정서를 하나로 묶어세운 이름, 대추리. 그 자랑스러운 이름 앞에 나는 서 있다.

이십대를 길 위에서 보내고 훌쩍 10여 년을 뛰어넘어 사십대에 다시 민중의 땅으로 돌아 온 것이다. 가슴이 벅차다. 대추리는 그런 나를 아무 말 없이 받아준 것이다. 이젠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전쟁이 없는 자랑스러운 땅을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만 그렇게 묻는 듯하다.

내가 사는 안산에서 자동차로 겨우 한 시간 거리에 있으면서도 그동안 대추리가 심하게 아픈 줄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살았다. 사람으로 치면 늑골 정도의 위치인데, 그 늑골이 터져 나가는데도 나는 모르고 산 것이다.

대추리에 문화예술인으로 드나들면서, 대추리 주민들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살을 바로 코 앞에서 보면서 대추리가 스스로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나 같은 사람에게 알리려고 그동안 얼마나 몸부림 쳤는가를 알 수 있었다.

맨손으로 일군 한 맺힌 땅
▲ 해방 직후 미군기지가 확장되면서 집과 땅을 잃었던 여든여덟의 조선례 할머니 ⓒ노순택

대추리가 어떤 땅인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농촌이 그렇듯이 나라가 버린 땅이고, 관리와 지주들의 참혹한 수탈을 겪었고, 거기다가 일본과 미국이라는 외세의 침탈로 인해 전쟁기지로 농토를 빼앗겼던 서러움이 더해진 땅이다.

자연적인 조건도 아주 열악하고 지금처럼 중장비가 있는 시대가 아니라서 바다를 맨손으로 개간해야 했고, 소금기를 빼내려고 등골이 휘고 허물이 다 벗겨지고 많은 사람이 죽고 자식까지도 시퍼렇게 가슴에 묻으면서까지 일군 한 많은 땅이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인지라 불평 한 마디 안 하고 황소처럼 선한 눈망울로 묵묵히 일만 하여 전쟁기지 때문에 두 번 다 맨몸으로 쫓겨났지만, 여의도 면적 서너 배의 들녘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들녘은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다. 어머니, 아버지가 묻힌 땅이고 형제가 한으로 묻힌 땅이다.

그런 땅이기에 바로 옆의 K-6 캠프 험프리 미군기지를 바라볼 때마다 활주로 밑에 묻힌 논이며 집이며 자식이며 어머니 아버지가 생각나서 펑펑 울게 한다. 피울음을 울게 한다. 그런 땅을 나라는 뻔뻔스럽게 솥단지 하나 보태준 것 없으면서 국익의 이름으로 미군기지로 세 번째 뺏으려고 하고 있다.

저들은 국책사업이다, 안보논리다 하며 가진 자의 기득권만 주장하는 정치선전이나 해대면서 올해도 오로지 농사 짓는 것이 소원인 농민의 소박한 꿈을 송두리째 앗아가려 하고 있다. 치졸하게도 '억대 보상' 운운하면서 돈 몇 푼 더 받아내려는 악덕 부동산 투기업자로 매도하고 있다.

그래, 엊그제까지 민중해방을 신념으로 삼았다가 권력의 맛을 보고 하루아침에 신념을 내팽개친 자들에게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권력을 향해 항상 해바라기하면서 그 밑에서 독버섯같이 자란 보수언론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대추리는 나에게 '몸시'를 쓴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들이 아무리 덧칠해놓아도 대추리의 진실을 보고 말았다. 대추리·도두리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벽시를 쓰면서 그들 마음의 진실을 보았다. 땅은 절대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평생 땅에서 배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대추리·도두리 농민들은 황소 같은 순한 눈망울로 나에게 '몸시'를 쓰고 있다. 다만 농사 짓고 그 땅에 묻히고 싶은 대추리·도두리 주민의 마지막 소원을 군홧발로 생매장 하지 마라.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강제 침탈에 빠짐없이 달려가서 맨몸으로 막아섰듯이 80년 광주처럼 군대를 동원해서 생명을 빼앗는다 해도 나는 또 달려갈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을 다 물리칠 없다면 군대와 경찰을 당장 철수시켜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슴에 둘러친 가시철조망을 거둬라. 우리 아이들에게 죽음을 위해 날아가는 미군 폭격기 대신 푸른 벼들이 자라는 생명의 땅을 보게 하라.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날 행복한 꿈을 그대로 꾸게 하라. 아무리 국가라 해도 그 아이들에게서 고향을 뺏을 권리는 없다.
▲ 새울 들녘에 세워진 설치작품 <미사일솟대> 앞에서 꽃을 따고 있는 소녀. 멀리 미군기지의 레이돔이 보인다. ⓒ 노순택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4일에는 대추리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마음을 굴착기로 마구 파헤치고,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야 할 들판과 솔부엉이 가만히 우는 밥 짓는 저녁풍경과 추억이 가득 새겨진 초등학교 건물을 순식간에 파괴해놓고서, 아이들의 고향을 송두리째 빼앗아놓고서, 돈으로 보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돈으로 아이들에게 추억을 사주려 하는가. 보상받은 돈으로 아이들에게 F-16기나 미사일이나 레이돔을 가지고 놀라고 하는가.

대추리·도두리 아이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마음을 가진, 타지에 사는 한 어린이의 편지는 고향을 빼앗긴 어린들의 엄중한 경고다.

"대통령 아저씨의 소중한 것을 가지고 가시면 정말 짜증나고 슬프고 마음이 아프겠죠? 대추리 사람들에게 황새울을 빼앗아 간다는 것은 대통령 아저씨의 소중한 것을 누군가 빼앗아 간다는 것과 같은 거예요."(지구지킴이 비빔밥반의 선이)

어린이의 '순결한' 경고마저도 휴지조각 취급하는 그들에게는 내가 주민들의 마음에서 보고 듣고 적은 벽시 역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귀와 눈이 있는 사람은 보고 들을 것이다.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염원을….
▲ 대추초교에 모인 대추리 아이들. 정부는 이 아이들의 놀이터마저 폐허로 만들었다. ⓒ 노순택

방승률 할아버지
-대추리 도두리 만인보 10

이제는
돌덩어리 하나 없는
우리 손주의 말랑말랑한 머리에다가
저 38선 같은 철책만은
둘러치지 말아야 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통 모르겠는
저 미군기지 같은
머릿속은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손주를 데리고
일부러 들판에 나갈 때도
잠자리 메뚜기 개구리
솔부엉이 기러기 냉이
순전히 들판을 떠나서는 살지 못하는 이름들로
모를 심듯 정성 들여
손주 머리에 심어 보는 것인데
내 죽어 묻힐 곳도
말랑말랑한 손주의 머릿속이어야 하는데
우리 손주의 머릿속이
온통 폭탄으로 가득 차 버린다면
남을 죽이는 음모로 철책 속에 숨어 버린다면
그건 내가 이 땅에서 평생 배운 언어가
아니다
나는 땅에서 배운 언어 이외에는
절대 손주에게 가르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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