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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을 에워싼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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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을 에워싼 미스테리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41> 기이편 '수로부인'조
강릉, 삼척, 울진으로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1박2일의 여정. 나는 『삼국유사』 기이편 '수로부인'조의 자취를 더듬어 보겠다고 벼르고 벼르다가, 매번 철쭉 피는 철을 맞추지 못하던 끝에, 제 철은 아니지만 그 행로나 한번 더듬어 보자고 지난 연말에 때아닌 겨울 답사를 나섰다.

'수로부인'조는, 암소를 몰고 가던 노옹(老翁)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며 헌화가를 지어 불렀다든가, 바다 용이 수로부인의 자용(姿容)을 탐하여 납치를 했다든가 하는 섹시한 스토리 탓인지 그에 관한 연구도 매우 활발한 편이어서 아마도 '처용랑 망해사'조와 함께 『삼국유사』 중에서 가장 많은 논문들이 쓰여진 주제로 꼽히지 않나 생각된다.

길을 떠난 것은 섣달 그믐 전날이었다. 집을 나서면서 교통방송을 들으니 영동고속도로가 막힌다고 해서 나는 양평으로 가서 6번 국도를 탔다. 6번 국도를 따라 막히지 않고 둔내까지 가서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더니 둔내에서 옥계까지 한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아 비교적 수월하게 동해안에 도달했다.

옥계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나는 바로 바닷가로 향했다. 들러야 할 곳이 몇 군데 되었는데, 첫 목적지는 옥계 위쪽, 금진 항에서 정동진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였다. 이름하여 헌화로(獻花路). 강릉시에서, 이름 모를 노인이 천하일색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쳤다는 '수로부인'조 기사에서 따와 붙인 이름이었다.
▲ 해가사의 터_삼척. ⓒ프레시안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 봉우리가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그 위에 철쭉꽃이 만발하여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이것을 보더니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꽃을 꺾어다가 내게 줄 사람은 없을까?' 그러나 종자(從者)들은, '거기에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하고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이때 암소를 끌고 길을 지나가던 늙은이가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노래까지 지어서 바쳤다. 그러나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옹이 천길(!) 바위 위의 철쭉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건네면서 헌화가까지 지어바쳤다는 대목에서, 노옹의 정체를 두고 몇 가지 설이 있으나, 노옹이 지은 향가 '헌화가'만큼은 수로부인의 아름다운 자용(姿容)에 매혹된 노옹의 순수무구한 사랑에서 우러난 애정시가(愛情詩歌)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자주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향가 '헌화가'에서 이름을 딴 헌화로는 금진 항에서 시작되어 정동진 바로 아래쪽에서 끝난다. 해안을 구비구비 돌아가는 도로에는 군데군데 바다로 툭 튀어나온 바위 절벽이 나서는데, 해안도로 중간 쯤에는 길가 바위에다 '헌화로'라고 새겨놓기도 했고, 헌화로가 끝나는 어름의 마을에는 수로부인을 모시는 사당과 『삼국유사』 '수로부인'조의 헌화가(獻花歌)를 새겨 병풍처럼 세워놓은 장식물이 있었다. 강릉시가 그 일대를 '수로부인'조의 현장으로 조성했던 것이다. 경사가 급한 바위절벽이 바다까지 뻗어나간 모습하며, 바다 속에서 미처 자지러들지 못하고 뾰죽하게 솟아나 있는 바위들하며…… 그런 풍경 속에 철쭉꽃이 만발하면, 미상불 절세미인에게 꽃을 꺾어바쳤다는 노인의 모습이 떠오를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자들은 흔히, 기이편 '수로부인' 이야기를 바로 앞에 나오는 '성덕왕'조의, 기근과 그에 대한 구휼 기사와 긴밀히 연관된 것으로 보곤 한다. 그래서 '수로부인'조의 내용을, 기근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는 기우제 같은 제의(祭儀)를 지내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 많다. 그 경우, 기사 중에 나오는 해정(海汀), 임해정 등을 기우제를 행한 장소로 보고, 주선(晝饍)을 제물로, 거기다가 헌화가를 지어바친 노인이 끌고 왔던 암소까지 제의의 희생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이렇게 되면 수로부인은 자연스레 제의를 진행한 무당이 되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수로부인을 당시 신라 최고의 무당으로 간주하여 국무(國巫)라고 부르기도 한다.
▲ 헌화가 조형물_강릉. ⓒ프레시안

해가 저물 무렵 나는 헌화로를 따라 다시 옥계로 나왔고 차를 몰아 묵호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섣달 그믐날 아침, 수평선 위 구름 낀 사이로 잠시 모습을 드러내며 바다를 붉게 물들여준 섣달 그믐날의 일출을 구경하고는 삼척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삼척시가 근래 조성한 새천년공원. 그 공원은 일출로 유명한 추암(錐巖)이 바라보이는 해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공원에서 보이는 조망이 일품이었다. 바로 아래 백사장에서는 파도가 겹겹이 밀려와 부딪치고 바다 위에서는 또 쉴새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흰 포말로 바다를 무늬지우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뾰죽뾰죽 솟아 있는 추암 일대의 바위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공원에는 임해정이라는 새로 지은 정자도 있고, 그 앞에는 헌화가 본문과 헌화가에 나오는 풍경을 새겨놓은 공 모양의 조형물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아래쪽에는 또 '해가사의 터'라는 글씨가 쓰여진 석조 첨탑이 서 있었다.

'해가사의 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로부인'조는 수로부인이 노인에게 꽃을 선사 받고 다시 길을 가던 중, 이틀 뒤에 바닷가 정자에 이르러 점심을 먹는데 돌연 바다 용이 나타나 부인을 채가지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린 일을 기록하고 있다.

"남편 순정공이 발을 동동 굴렀으나 대책이 없었다. 그때 다시 한 노인이 나타나 '옛 사람의 말에 여러 입이 떠들면 쇠라도 녹인다고 했는데 지금 그까짓 바다 속 미물(微物)이 어찌 여러 입을 겁내지 않겠습니까? 경내 백성들을 시켜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고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때 백성들이 부른 노래가 바다노래, 즉 해가(海歌)였는데, "여러 사람이 해가를 불렀는데 그 가사에 이르기를……(衆人唱海歌, 詞曰……)"이라는 대목을, "여러 사람이 해가사를 불렀는데, 이르기를……(衆人唱海歌詞, 曰……)"이라고 잘못 새겨서 '해가사의 터'라고 이름지은 것 같았다.

'해가사의 터' 첨탑 말고도 새천년공원에서 또 혼란스러웠던 것은 노옹이 헌화하는 모습을 그려 넣은 구형(球型) 조형물이었다. 그렇게 헌화가 가사와 그림을 새겨 넣음으로써 공원은 '헌화가의 터'까지도 겸하게 했는데, 강릉시에서 '헌화가'의 현장으로 조성해 놓은 금진 항의 해안도로 일원에 더하여, '헌화가'의 현장이 두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로부인'조의 기사를 읽어 보면, 수로부인 일행이 명주(溟洲), 그러니까 강릉 가는 노정(路程)에서 헌화가의 현장이 먼저 나온 다음 그 이틀 후에 해가의 현장에 이른다고 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수로부인'조의 현장을 한 곳에 몰아놓은 삼척시의 추정(推定)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강릉시의 헌화로라는 이름에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 금진 항 일원이 헌화가의 현장이라면 꽃을 바친 현장에서 이틀을 더 가야 하는 '해가'의 현장은 순정공 일행의 목적지인 명주, 그러니까 강릉을 지나쳐 속초 방향으로 한참 더 가야 한다. 한마디로, 두 도시가 철저한 고증도 없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영역 안에 '수로부인'조와 관련된 도로 이름, 또는 공원 이름을 붙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수로부인'을 끌어와서 작명한 예가 이곳 말고도 또 있다. 삼척 아래 경상북도 울진군의 바닷가에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이 있는데 그 인근에도 '수로부인 바위'라고 불리우는 바위가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동해안 일대가 모두 헌화가나 해가의 현장이 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 헌화가 조형물_삼척. ⓒ프레시안

어쨌든, 삼척시에서 석조 첨탑에 새겨놓은 '해가'라는 노래에도 만만치 않은 내력이 들어 있다. 순정공 일행이 바닷가 정자에 이르러 점심을 먹는데 돌연 바다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가, 역시 이름 없는 노인의 도움으로 수로부인이 구출되는데 이때 부르는 '해가'는 향가가 아니라 가락국의 '구지가'를 변형한 노래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 뺏어간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역하여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라"

순정공 일행이 노인의 말을 따라 경내 백성들을 시켜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고,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렸더니 바다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바쳤다. 그런데 구출된 수로부인이 했다는 말이 다시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순정공이 부인에게 바닷속 일을 물었더니 부인이 말하기를 '칠보로 꾸민 궁전에 먹는 음식들이 달고도 연하고, 향기롭고도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더이다'라고 답했다. 부인이 옷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풍겼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향내였다. 수로는 자색이 절세미인이었으므로 깊은 산이나 큰 물을 지날 적마다 여러 번 귀신들이나 영물(靈物)들에게 붙들려 갔다."

'수로부인'조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학계에서는 수로부인을 납치해갔던 바다 용을 중앙정부에 항거하던 지방호족으로 보고, 지방호족이 수로부인을 돌려줌으로써 양자 간의 갈등이 적당히 무마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해 왔는데 근래 한신대 조태영 교수가 이 대목을 새롭게 해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조태영 교수는 '『삼국유사』수로부인 설화의 신화적 성층과 역사적 실재'라는 논문에서 '수로부인'조를 "성덕왕 대의 역사를 조명하는 신화적 약호"로 보면서 『삼국유사』의 찬자인 일연은 "이 신이(神異) 속에 성덕왕대 역사를 압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내용을 축약해 보면 이렇다.

1)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純貞)공은 『삼국사기』 경덕왕 원년의 기사에 나오는 이찬 순정(順貞)과 동일인이다.
2) 수로부인의 호칭 '부인'은 왕의 삼친(三親) 부인, 즉 왕비, 왕모, 왕비모에게 내려지는 위호(位號)이다.
3) 이찬 순정과 수로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경덕왕의 왕비였다가 폐출된 삼모(三毛)부인이다.
4) 성덕왕 때 강릉 태수로 부임했던 김순정의 딸이 경덕왕 잠저(潛邸) 시에 왕자비로 있다가 효성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태자 헌영이 왕위에 올라 경덕왕이 되면서 태자비 삼모는 왕비가 되었다. 이때 수로부인도 왕비모가 되어 '부인'으로 책봉되었다.
5) 경덕왕의 왕비 삼모 부인은, 수로부인의 젊은 시절 그녀가 동해안 임해정에서 동해 용에게 잡혀갔다 돌아와 낳은 용녀(龍女)일 가능성이 있다.
▲ 헌화로 표지석_강릉. ⓒ프레시안

조태영 교수는 5)항의 추리 근거를 '수로부인'조 기사 중, 수로부인이 동해 용에게 붙들려 갔다가 구출된 피납 사태를 서술하는 논조(論調)에서 찾고 있다. 논문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해중사(海中事)를 고백하는 수로의 말에서 악룡에게 작해(作害)를 당했다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부인이 옷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풍겼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향내였다'라는 기술은 수로가 신성(神聖)과의 접촉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수로가 동해용과 관계하였음을 자못 암시하면서도 그것을 공공연히 노출시키기는 꺼리는 태도가 감지된다. 수로부인의 피납 사태를 한편으로는 불상지사(不祥之事)로 표현하면서 한편으로 신성한 듯이 표현하는 '시각의 이중성'을 발견할 수 있다."

조태영 교수는 이 일을 '용녀(龍女)왕비 탄생'으로 부르면서 '용녀 출생담'이 수로부인 설화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신화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항간의 구설에 떠도는 정도였던 것이 나중에 수로부인의 딸이 경덕왕비가 되자 이 이야기가 한때 경덕왕비 삼모부인의 탄생설화로 지위가 상승되어 수로부인 설화에 들어왔던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수로부인'조에 용녀왕비 탄생담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삼모부인의 신성(神聖)탄생이 불상지사로 뒤바뀌는 상황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즉, 삼모부인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전(變轉)과 설화 전승권의 변동, 그에 따른 해석의 변화와 설화 성층(成層)의 재조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삼모부인은 경덕왕 2년에 폐비, 출궁되어 사량부인으로 봉해졌고, 의충 각간의 딸이 후비로 들어와 만월부인으로 책봉되었다. 이 사실은 수로부인 설화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삼모부인의 폐출로 그녀의 탄생은 다시 불상지사로 비하되고 신성설화의 지위를 상실했으리라는 추정이다. 그리하여 수로부인의 미자(美姿)설화만 잔존, 전승되게 되면서 경덕왕비 탄생설화는 그것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흔적만 남긴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조태영 교수의 설명이다.

나는 이러한 분석에 솔깃해 하는 편이다. 이유는 이러한 분석이 '수로부인'조의 마지막 대목, 납치되었다가 구출된 수로부인의 발언이 주는 묘한 여운을 '시각의 이중성'이라는 말로 잘 설명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성대(聖代)라고 불리웠던 성덕왕 이후, 신라 하대로 접어드는 효성왕과 경덕왕 대의 정세 변화를 설명해 주는 단서도 아울러 제공해 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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