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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을 박차고 나오는 날 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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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교실을 박차고 나오는 날 머지 않았다" [전태일통신 60] 고교생들의 반란, 어제와 오늘
중간고사로 모든 학교가 시험기간이었던 어느 날,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저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나 정말 다른 애들 때문에 내가 등급이 내려가는 꼴은 절대로 못 봐. 정말 지금 당장 아이들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야."
- 2005년 6월 18일, 경쟁적 입시제도 대안마련을 위한 청소년대표 초청 토론회, 고1 청소년 발제 글에서


벌써 2년이나 지나버린 2005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에 갓 올라갔을 무렵, 학교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대학입시에서 내신 비중을 늘리고, 수우미양가의 절대평가에서 1등급에서 9등급까지의 상대평가로 바꾸는 내신등급제가 도입되었다. 학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물론 고3, 고2들은 내신등급제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직접적인 대상이었던 고1 후배들의 분위기 때문에 학교 전반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던 것이다. 우리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한 청소년단체에서 활동을 해 많은 고1 후배들을 만날 수 있었던 나는 고1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해듣고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들이 전해준 얘기는 교실에서 '누군가'에 의해 교과서나 문제집이 없어지고, 필기한 노트가 찢어지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런 일들을 대비하기 위해 좁디좁은 사물함 열쇠 구멍에 자물쇠를 3개씩 잠그고 다니고, 친구들에게 빌려주는 교과서와 자신만 보는 교과서를 따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자기 눈으로 보았다는 친구, 혹은 옆 학교, 옆 교실에서 소문으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친구. 입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고3 교실에서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고1 청소년들은 1등급으로 결정되는 4% 안에 들어가기 위해, 조금이라도 높은 등급을 위해서 바로 옆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들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치열한 경쟁 상황 속. 교실 안에서는 극단적인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는 우리들 사이에서, 그리고 언론보도를 통해 사회 속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내신등급제 시행 이후 첫 번째 시험. 중간고사는 어느 때보다 더 고1 후배들에게 묵직한 공포로 다가왔다. 이미 1학년 교실에서는 긴장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학생들의 신경은 갈수록 날카로워져갔다. 시험을 치를 때, 교실에서는 과목의 결과 하나하나에 희비가 엇갈렸다. 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는 자책감. 대학입시에 실패할 거라는 불안감. 주위의 시선. 나보다 더 점수를 잘 받은 친구. 다각도로 다가오는 스트레스 속에서 1학년 후배들은 신음했다.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아니 어쩌면 그 과중한 스트레스를 이긴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한 상황 속에서 어떤 청소년은 죽음을 선택했다.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학생은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몇 시간 전, 자신이 사는 아파트 17층에서 화단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내신등급제의 1세대들인 나의 후배들은 스스로를 '저주받은 89년생'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내신등급제는 비단 고1 후배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신등급제와 함께 내신 부풀리기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우리 학년과 고2 후배들의 시험 난이도 역시, 덩달아 유례없이 높아졌다. 고1 학생들보다 입시를 조금 더 앞둔 상황, 나의 또래들은 자신의 책상 앞에 놓인 시험지를 보면서 칼날 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목을 조르는 듯한 스트레스 앞에서 나의 친구들은 고통스러워 했다. 몇몇 고등학생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거나 자신의 목을 매어 죽음을 선택했다. 실제로 2005년, 신학기가 시작되었던 두 달 동안 특목고, 인문계를 가릴 것 없이, 10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막다른 곳으로 내몰린 듯, 입시를 불안해하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렸다. 소위 '자살정국'이었다. 누군가는 입시제도 속에서 자살하는 청소년들의 상황을 이렇게 꼬집었다. 사형은 김대중 정권 이후, 한 번도 집행되지 않았으나, 교육제도는 사형보다 더 많은 청소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80년대 이후 한국의 입시정책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마치 가열을 넘어 폭주로 치닫는 이 미친 입시경쟁이 역사적 추세인 것만 같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은 대학입시에서 내신성적 반영과 학교의 보충・자율학습을 허용하는 교육정책을 내놓았다. 내신성적의 도입은 학생들 간의 경쟁이 심화시켰고, 특히 강제적인 보충, 자율학습의 시행은 학생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말에는 당시 학생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오로지 성적만이 모든 것들을 결정하는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의 마지막 탈출 방법은 죽음이었다. "학생들이 3일에 한 명씩 죽어가는 상황이었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다. 1년에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상황. 비극 그 자체였다.

입시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살인. 그 명백한 사회적 타살. 청소년들은 더 이상 친구들의 자살행진을 방관할 수 없었다. 87년 7월 서울에서는 1000여 명의 청소년들이 '내신성적 불신경쟁 잃어가는 나의 친구', '살인교육 쫓아내고 민주교육 이룩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살학우 추모제 및 교육정상화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었다. 88년 8월, 광주에서는 고등학교 직선제 학생회를 중심으로 1000명 이상의 청소년들이 강제보충・자율학습 폐지 등의 요구를 걸며 단식 투쟁을 해 결국 광주시 교육위원회에서 폐지를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2005년 5월 7일. 저항의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 ⓒ프레시안

한 청소년 단체에서는 활동가들과 청소년 회원이 모이는 간단한 추모제를 기획했다. 광화문에서 입시경쟁에 희생된 자살 학생을 추모하는 자리. 그러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고1 청소년들 사이에서 문자메시지가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신반대 촛불집회 5월 7일 광화문 7시' 누가 문자를 처음에 돌렸는지 몰라도 청소년들에게 문자는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학교도 술렁였다. 서울 외에서도 부산, 광주, 전주 등 각 지역에서도 촛불집회를 열자는 문자가 돌려지기 시작했다.

청소년들의 대규모 움직임이 보이자 일부 보수언론은 자기 입맛에 맞는 대로 청소년들의 요구를 대학의 자율화, 본고사 시행 주장 등으로 왜곡했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청소년들은 경쟁적인 입시를 반대하는 것인데…. 한편 교육부에서는 청소년들의 집회 참여를 만류하기 위해서 공식적인 서한문을 각 학교에 내려 보냈다. 그리고 각 교육청,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집회에 참석했을 경우 교내봉사, 정학 등의 징계를 내리겠다고 협박을 공공연히 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5월 7일. 드디어 날이 밝았다. 수업을 엉성하게 마치고 옷만 갈아입은 채, 나는 서둘러 광화문으로 갔다. 광화문에는 6000여 명의 경찰과 1000여 명의 교사와 장학사가 배치되고 있었다. 광화문을 둘러싸는 벽이 세워지는 것 같았다. 과연 나오기는 하는 걸까? 사실 나는 시작 시간이 다가오도록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한 시간 전, 광화문 역 출구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과 그것을 막는 학생주임. 아마 자기네 학교 학생이었나 보다. 그 학생은 다시 역 출구로 돌아간다.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학생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마스크도 쓰고 있다. 두리번거리다 자기 학교 선생을 보고 도망가는 청소년, 그리고 언론의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얼굴이 나올까 부담스러워 하는 청소년. 그러나 한 명 한 명씩, 조심스레 촛불을 들고 자리에 앉기 시작한다. 20명, 50명, 100명, 500명, 약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광화문 교보문고 앞을 가득 메워버렸다. 학생들이 교사와 장학사라는 벽을 뚫은 것이었다.

그들은 소리쳐 외쳤다. 더 이상 나의 친구를 죽이지 말라고. 더 이상 우리를 죽이지 말라고. 무대로 올라온 자유발언자들은 한 목소리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입시에 종말을 선포했다. 그리고 교육의 틀을 바꿔 자유로운 학교, 함께하는 교실을 만들자고 했다. 또 우리가 원하는 학교를 위해 오늘 이 마음을 잊지 말고 끝까지 함께하자고 다짐했다.
▲ ⓒ프레시안

나는 촛불을 들고 앉아 있는 청소년들을 보았다. 눈동자에는 밝은 빛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살아 있는 사람의 눈동자였다. 교실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눈동자가 아니라, 진정 숨을 쉬고 희망을 찾고 있는 사람의 눈동자였다. 그들은 경쟁적인 입시교육의 해체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미 떠나버린 친구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옆자리에 있는 친구들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그들은 교실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소중한 수업을 거리에서 받고 있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삶을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몰래 조용히 눈물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그날 이후, 청소년들의 폭발적인 저항은 지금까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청소년들은 묵묵히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사람을 죽이는 교육 밑에서 다시 거리에 뛰쳐나올 그 날을 준비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친구와 손을 잡고 죽어버린 교과서를 던져버리는 그 날. 청소년이 친구와 손을 잡고 멍든 교실을 뛰쳐나오는 그 날. 청소년이 친구와 손을 맞잡고 하나 되는 그 날.

그 날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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