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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시장의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의 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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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총기시장의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의 참극 [시론]권력은 시장에서 나온다? 그러면 희생은 누구의 몫?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 핵심은 총기시장의 권력
  
  미국 "버지니아 텍"의 총기난사 사건은 기본적으로 인종혐오 범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의 출신지나 인종소속이 사건의 초점이 될 수 없다. 흑인 로드니 킹에 대한 백인 경찰의 무차별 폭력사태가 빚은 LA사건의 와중에서, 흑-백 갈등을 한-흑 갈등으로 교묘하게 교체시켜버렸던 상황과는 다른 요인을 안고 있는 것이다.
  
  사건의 핵심은 총기난사의 당사자가 저지른 행위의 범주를 넘어선, "미국 총기시장의 논리와 여기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국 정치권의 책임"에 맞춰져야 한다. 마약은 규제하면서 총과 총알은 쉽게 사고 팔 수 있도록 하는 이 무서운 현실을 바꿀 의지가 없는 사회가 직면한 비극의 되풀이이기 때문이다.
  
  "전국총기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의 이른바 "로비"라고 하는 "제도화된 뇌물공여"로 정치권은 돈을 타다 쓰고, 그 대가는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으로 전가되는 사태를 막지 않는 한, 이 비극은 거듭될 수 있다. 권력은 그야말로 총구에서 나오고 있다. 그 총구가 거머쥐고 있는 자본의 힘이 미국사회의 진정한 안전과 미래를 잔혹하게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일각과 정부가 보이고 있는 이번 사건에 대한 자세는 자칫 '한국계 범죄'라는 측면을 과도하게 부각시킬 우려가 있어, 도리어 해롭다. 총기규제 논의가 제기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세력에게 이용되어 한국계가 희생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문사절단 파견이라니?
  
  "조문사절단 파견"이라는 논의가 있었고, 미국 정부 당국이 난감하다며 거절한 사태는 이 나라 외교의 상식이 어디에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민 간 사람의 문제는 성인이 된 현재의 시점에서,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 모국이 책임을 느끼고 머리를 숙일 일이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의 표시는 인류적 차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조문사절단 파견은 총기시장의 권력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국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을 어이없게도 같이 떠안는 격이 될 뿐이다.
  
  이 나라 정부와 정치권은 그런 문제가 발생한 정치사회적 모순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구조적 현실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에 대한 고민이 보다 중요하다. 시장의 논리가 그 사회를 압도하면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지를 매우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총기시장의 자본이 정치를 휘어잡고 미국 시민 자신들을 죽음의 공포에 몰아놓고 있는 사태는, 노무현 정부와 신자유주의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시장논리"라는 주장과 신념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확인시켜준다. 공익성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마저, 시장의 논리로 해체시키고 있는 미국 자본의 탐욕이 어디까지 갔는가를 이번 사건에서 혼란 없이 목도해야 한다.
  
  미국 안에서 총을 팔아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있고, 밖에서는 군수산업이 전쟁경제를 지휘하고 있는 상황이 이번 사건의 근본토대다. 정당방위 논리로 총기시장을 엄호하는 미국 보수 세력의 대외정책은 네오콘의 침략전쟁 정당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총과 시장과 정치, 그리고 인간의 목숨
  
  주(州)마다 차이가 있지만, 21세 이상이면 되고 5일에서 15일 정도의 심사과정만 통과하면 매년 30달러 면허세 내는 것으로 총기소지가 가능한 사회, 그리고 전체 가구의 절반 가량이 총 한 자루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통계가 있는 나라의 총기사고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총기규제 문제가 나올 때마다 기껏 심사기일을 늘일 것이냐 줄일 것이냐 정도의 수준에서 논의가 있을 뿐인 현실에서 대규모 총기사고 발생을 미리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근본적으로 총기소지를 금지하게 한다든가 아니면, 전과조회를 의무화를 한다든가 하는 것도 전국총기협회 (National Rifle Association)의 압박으로 좌절되고, 전과조회는 위헌판결까지 나온 상황이다. 주머니에 600달러 정도만 있으면,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총과 총알을 살 수 있는 나라, 그리고 미국에서 총기구입이 두 번째로 쉬운 주 버지니아는 총기시장의 천국인 셈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난 후 1871년, 평화의 시기가 오면서 민간인의 총기 사용과 소지를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총기사업자들이 결속한다. 그 결과가 전국총기협회의 성립이다. 본부는 워싱턴 D.C.에, 그리고 회원은 430만 명 가량 되는 이 조직은 기본적으로 정치조직이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 대선 시기에도 그를 지원하는 등 정치에 매우 깊게 개입하고 있는 단체이다.
  
  총기규제에 대한 법제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60년대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케네디 대통령 저격살해 등이 계기가 됐지만 별 효력도 없는 방식으로 규제논의를 하는 것에 그쳤다. 케네디 암살 사건 때가 미국사회의 총기문제를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미국 총기시장의 논리는 이를 철저하게 좌절시켰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 암살미수사건 때 유탄을 맞아 반신불수가 된 공보비서 제임스 브래디가 제안해서 통과시킨 브래디 법안이 주목받았지만, 총기 구입 시 5일간 심사기간을 두고 구입이유를 명시하는 수준이었고, 앞서 말했듯이 전과조회는 위헌판정을 받아 있으나 마나 한 규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대선후보로 나설 채비를 하는 공화당의 존 메케인의 경우 벌써부터 이번 사건이 총기규제 논리를 강화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자기방어를 보장한 헌법정신과 총기규제는 서로 충돌한다고 총기시장을 엄호하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다른 정치인들도 대체로 총기규제에 적극 나서지 않는 모습이고, 다만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거나 또는 이번 사건의 진상에 대한 정보가 보다 더 확실해야 한다는 식으로 전국총기협회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눈물이 없는 권력
  
  이렇게 보자면, 총기시장의 논리에 휘둘리는 미국사회가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로 가고 있다는 점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나라의 최고 정치 권력자를 비롯한 정치권은 인간의 생명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있다. 다만 계산하고 유불리를 따져 전술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그렇기에, 미국의 이번 참사를 일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라크에서 하루에도 그 무수한 생명이 억울하게 죽어나가도 아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 군대를 파견한 나라가 이 나라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면서,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의 논리를 방어하는 일에 정권의 명운을 건 세력이 이 나라 정권 담당자들이다. 한-미 FTA 반대를 외치면서 분신한 허세욱 씨의 죽음에 대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통령은,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희생되었을 때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무고한 죽음을 겪은 미국인들은 범죄의 희생자들이다. 그 범죄에는 총을 쏜 개인의 죄악과 함께, 총기시장의 악마적 탐욕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 탐욕이 도리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니라면, 개인적인 폭력에 그칠 뿐 이런 학살에 가까운 참극은 벌어질 수 없다.
  
  그 사회의 공익성보다 자본의 탐욕을 옹호하고 그것을 발전의 논리로 삼을 때, 억울한 희생자는 생겨난다. 권력이 그 자본의 탐욕에 적극적인 동조자가 될 때, 특히 그 사회의 약자들은 무고한 희생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미국과 함께 가기"의 비극
  
  노무현 정권이 선택한 "미국과 함께 가기"에는, 바로 이러한 비극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벌써부터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무고한 청년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 아닌가?
  
  "맥도널드는 맥더글러스(미국의 군수산업)와 함께 간다"는 이 미국 자본시장의 현실과 논리는 이 나라에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과 한-미 FTA로 구체화될 전망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단지 소수의 부자들이 독점하는 사회와 다수의 빈곤층이 확대되는 사회적 양극화만이 아니다.
  
  이 갈등의 와중에 당연히 사회적 안정성은 무너지고, 범죄는 늘어나며 인간의 생명은 위협에 더욱 심각하게 노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기적 탐욕이 일상의 상식이 되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식은 사회에서 범죄는 더욱 잔혹해질 것이며, 정치는 자기 먹고 살 궁리에만 몰두하게 될 것이다.
  
  전체의 미래를 위해 약한 것들은 죽어나가도 된다는 식의 논리로 이끄는 사회에서 패자들의 가슴에는 무엇이 쌓이게 될까? 허세욱 씨는 이 나라의 비극적 미래를 감지하고 절박하게 저항하면서 자신을 불태웠지만, 만일 누군가가 무차별 다중 폭력을 행사하는 악마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면? 그래서 희망의 출구가 없는 사회로 변해버린 현실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일 수밖에 없으며, 자기는 자기가 지킬 수밖에 없다는 식이 된다면 누구도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
  
  이 진단이 과도하다고 여기는가? 시위 도중에 경찰에게 맞아 죽은 사람이 있는 현실은 그렇다면 안전한 사회일까? 자신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기껏 700명의 어민들일 뿐인데"라고 호통을 치는 대통령 앞에서 그들 당사자들의 생존은 낙관해도 되는가? 김선일 씨는 자신의 희생을 예감했는가? 허세욱 씨는 분신을 위해 평생을 살아 온 것인가? 우리는 이런 일을 보려고 노무현 정권의 탄생에 그토록 환호했던 것인가?
  
  총은 인간의 목숨을 겨눈다. 총기시장의 존재는 그 목숨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성립한다. 비극은 마음 아프다고 하면서도, 총기시장의 권력은 그렇다고 후퇴하지 않는다.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무장한 시장은 누군가의 피를 먹고 자라는 괴물이다.
  
  미국의 침략전쟁에 지지를 보내고, 손익계산에 기초한 냉정한 거래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거래 정도가 아닌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강제할 경제통합을 스스로 받아들이라고 윽박지르는 권력이 이 나라의 진정한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까?
  
  버지니아 총기난사 참극은 한 사회의 생명과 안전이 어떻게 확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인류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미국은 이미, 총으로 지구촌의 안전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핵심에는 총을 팔아 전쟁으로 살찌는 자본의 존재가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 답은 분명하다. 시장의 권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사회를 방어하는 일이다. 너와 나의 진정한 안전은,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희생의 논리를 정당하게 여기는 순간,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시장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과 그 권력자까지 포함해서.
  
  진정한 안전은, "희생의 불가피성 논리"가 철저하게 거부될 때 가능해진다. 발전은 그걸 출발선으로 해서 이루어질 때 모두에게 정의롭다. 그건, 이 사회가 미국과는 다른 사회적 대안의 상상력을 실현시켜나가는 기초이다.
  
  그 기초를 지키는 운동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존엄한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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