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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변 중국 시부모의 탈북 며느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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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변 중국 시부모의 탈북 며느리 사랑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 <7>

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넷째날 오전] 린장(臨江)-중강진-따오거우(道溝)

조선족 이민사의 시발점 린장(臨江)

바이산(白山)에서 하루 묵은 우리가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단 그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창바이(長白)까지 가야 했다. 바이산에서 창바이까지 거리도 거리지만, 계속 중국 농촌마을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점심을 먹을 만한 식당도 적당치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시간도 절약할 겸 도시락을 준비하여 출발하였다.

▲ 린장 건너편의 북한마을 모습 ⓒ황재옥

가는 중간에 린장(臨江)에서 잠시 쉬면서 북한의 중강진을 바라보기로 했다. 바이산을 출발하여 린장으로 가는 버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중국의 농촌을 보면서 우리의 새마을운동이 연상되었다. 중국 쪽은 윤택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간이 강 건너로 보이는 북한 쪽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한여름에 펼쳐지는 진초록의 들판과 산림인데도 어쩐지 강 건너 북한 쪽은 빈약하고 초라해 보였다. 산야만이 아니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 서 있는 중국 쪽 가옥의 지붕은 주황색, 벽은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초록의 산야와 대조를 이루었다. 마을 중심에는 공공시설로 보이는 건물이 새로이 축조되고 있는 곳도 많았다. 특이한 점은 단순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지붕에 태양광 집열판을 이용하고 있는 가옥들이 제법 많다는 것이었다. 집 안에서 쓸 수 있는 조명이나 온수를 공급하는 정도겠지만 변방의 시골 주택에까지 친환경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농가의 지붕을 개량하고 시골 구석구석까지 도로가 놓여 있고, 중국인의 삶이 질적으로 나아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어쩌다 보이는 북한 쪽의 가옥들은 진회색 기와가 바람이 불면 곧 날아가게 생겼다. 그리고 얇게 발라진 시멘트벽으로 어떻게 추운 겨울을 나는지. 북한 주민의 척박한 삶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나는 추위를 너무 타기 때문에, 한반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겨울나기를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는 잘 닦인 도로 위를 달려 오전 10시 전에 압록강 중상류에 있는 작은 도시 린장(臨江)에 도착하였다. 북한의 중강진과 다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린장은 삼림면적이 전체면적의 79%를 차지하는 임업 도시이다. 임업도시답게 길가에는 베어다 놓은 목재들이 널려 있었다. 예전에는 뗏목으로 목재 등의 물자들을 수송하였다고 한다. 도로사정이 안 좋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퉁화(通化)에서 창바이(長白)까지 공로(公路: 도로)를 통해 목재와 물자들이 운송된다고 한다.

린장은 한반도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1800년대 초·중반, 조선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조선조 관리들이 각종 명목으로 백성들을 쥐어짜던 일)가 심하던 시절 많은 조선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만주로 건너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1831년(순조 32년) 조선인 2명이 린장 부근으로 건너왔는데, 그들이 최초의 중국 이주(移住) 조선인이었다. 이후 이들을 따라 강을 건너 린장으로 온 조선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만주지역의 미개간지를 개척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조선인의 만주이주 역사가 바로 린장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조선조 때는 대청(對淸)무역의 중심지였던 중강진

중국의 린장(臨江) 건너에는 한반도에서 백두산 인근의 삼지연군 다음으로 가장 춥다는 중강진이 있다. 중강진(中江鎭)은 강 가운데, 즉 압록강 중류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중강진은 1949년 자강도가 신설되기 이전 평안북도에 속하였고, 1952년 중강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자강도의 중강군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른다.

▲ 중강진 마을 ⓒ황재옥

중강진이 지금은 삼지연 다음으로 추운 곳이 되었지만 우리 지리 교과서에는 상당히 오랫동안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기록되어 있었던 탓인지 그리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다. 중강진은 조선조 인조(仁祖)때인 1646년에 청나라와의 무역을 위해 호시(互市)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조선과 청나라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강호시(中江互市),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회령호시와 경원호시를 통해 공무역(公貿易)을 했다. 그중에서도 중강호시는 가장 유명했고 번성했었다. 조선에서는 주로 금, 인삼, 종이, 소가죽, 모시 등이 중국으로 팔려 나갔다. 중국에서는 비단, 당목(唐木: 목면으로 만든 실로 폭이 넓게 짠 천의 종류), 한약재, 보석, 서적 등이 중강진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중강진에서 공무역이 이렇게 번성하다 보니 중강호시 외에 중강후시(後市)라는 밀무역(密貿易)도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 역사가 있어서인지 린장에서 중강진으로 통하는 다리 앞에는 그럴듯한 해관(海關: 세관) 건물이 있었다. 건물 상태로 볼 때 최근에 지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세관 주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북한과 무역을 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린장과 중강진 사이에 요즘에도 무역이 제법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중강진이 저렇게 초라하게 보여도, 현재도 북한의 대중 무역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듣기로는 북한의 자강도 쪽에서 중국에 압록강 상의 섬 하나를 골라 북·중간 자유무역시장으로 만들자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게 성사된다면 아마도 역사도 있고 하니 중강진 가까운 곳에 있는 어느 섬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중강진의 사는 형편을 살피기 위해 강 건넛마을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의 망강루(望江樓)라는 정자에 올랐다. 누각 이 곳 저 곳에는 많은 것은 아니지만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다. 한국에서 생산된 과자봉지와 음료수병도 눈에 띄었다. 다른 한국 사람들도 왔다 간 모양이다. 8월의 태양 아래 펼쳐진 중강진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진 인가와 협동농장이 눈에 들어왔으나, 다른 지역보다 좀 더 사정이 어려워 보일 정도로 빈한한 마을이었다. 마을 거리에는 더워서 그런지 나와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북한 마을을 보고 있노라면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길에 나와 다니는 사람들이 적다는 것이다.

▲ 중강진의 협동농장 ⓒ황재옥

마침 학교로 보이는 건물의 중앙에 '지·덕·체'라 쓰여 있는 글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학교에서도 김일성 부자와 김정은을 찬양하는 글귀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란 곳이 학생들의 '지·덕·체'를 수양하기 위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학교는 한국의 학교와 다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신의주와 위원에서도 그랬지만, 중강진에도 강물이 범람할 때를 대비한 둑이 없었다. 린장 쪽은 강을 따라 시멘트 옹벽을 세웠기 때문에 걱정이 없어 보였다. 이에 반해 중강진 쪽은 불어난 강물이 논밭과 마을로 거침없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중강진에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찬양하고, 혁명수뇌부를 결사옹위하자는 등의 입간판들이 어김없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 눈에 안 들어오는 산 너머 마을은 린장과의 무역으로 그나마 실속을 차리고 있는지 몰라도, 눈에 보이는 강 건너 풍경은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도 척박해 보였다. 강에 나와 미역 감는 몇 안 되는 아이들이나 빨래하는 아낙네, 물고기 잡느라고 바쁜 군인들의 모습도 다른 곳에 비해 어쩐지 더 초라해 보였다.

따오거우(道溝)와 뗏목

오늘 우리는 따오거우(道溝)라고 불리는 곳들을 여러 군데 지나왔다. 따오거우(道溝)는 그 지역의 지형을 보고 지정한다고 하는데, 압록강 중류에서부터 상류까지 따오거우가 23개나 있다고 한다. 따오거우 이름이 붙은 곳에는 일반적으로 길(道)을 따라 흐르는 도랑(溝)이 있고 그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인 셈이다. 실제로 우리가 가는 길 왼편의 지형을 보니, 산은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너른 들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따오거우의 특성을 지닌 지형이라서 그런지 도랑물이 흐르는 양쪽으로 들판과 가옥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도랑물은 압록강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빠따오거우(8道溝) 건너편에는 북한의 김형직군이 있고 쓰얼따오거우(12道溝) 맞은편에는 김정숙군이 있다.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과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6따오거우와 7따오거우를 지나는 길에 우리는 정말 흥분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압록강을 흘러내려 가는 뗏목의 행렬이 나타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장면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인데, 다른 일행들도 뗏목은 처음 본다고 했다.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의 뗏목이 유유히 압록강 물길을 따라 흘러내려 가고 있었다. 우리는 가다 서다 하면서 처음 보는 뗏목을 유심히 구경했다.

▲ 압록강을 따라 흘러내려 가는 뗏목 ⓒ황재옥

뗏목은 같은 길이로 자른 목재들을 1/4이나 1/5쯤 펼친 부채 모양으로 묶은 다음, 그 부채 모양의 목재 다발을 앞뒤로 사이사이에 끼이도록 연결하였다. 전체 모양을 보면 커다란 마른오징어를 펼쳐 놓은 모양으로, 앞쪽은 좁고 중간 부분은 넓고 꼬리 쪽은 앞쪽보다는 넓지만 중간 부분보다는 좁게 목재 다발들이 묶여 있었다. 말하자면 유선형으로 목재 다발들을 묶되 서로 지탱이 되도록 앞뒤로 연결시켜 놓았다. 몇 날 며칠을 강을 따라 흘러내려 가는 동안에 때로는 풍랑이나 급류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한 것 같았다.

뗏목 위에는 5~6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기도 하고 3명이 탄 작은 뗏목도 있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유유히 흐르는 뗏목 위에 누워 낮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멀리서 봐서 그런지 뗏목의 물길을 잡아주는 키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궁금했다. 그냥 강의 흐름에 맡기고 물길을 따라 흘러가면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는 것인가? 강 언저리에 부딪히지 않고 강 중앙으로 잘도 흘러가고 있었다. 이 뗏목들은 모두 중국 측 것임을 나중에 알았다. 중강진과 린장이 임업이 발달한 도시라고 들었는데, 눈으로 확인하였다. 이 뗏목들이 거기까지 가는 것 같았다.

중국 시부모의 탈북 며느리 사랑

점심때가 좀 지났지만, 바이산 호텔을 떠날 때 챙겨온 도시락을 펴놓고 먹을 만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차가 다니는 도로변이라서 그런지 마땅한 장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둘러앉으려면 적당한 면적과 뙤약볕을 가려줄 그늘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찻길 양쪽을 두리번거려도 좀처럼 그런 명당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8따오거우 근처에서 마침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였다. 8월의 따가운 볕도 가려주고 압록강이 바로 아래로 흐르고, 김형직군도 건너다보이는 그런 장소였다. 그리고 앉아서 먹을 수 있게 커다란 돌덩이들도 몇 개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나무에 가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중국인 촌부 내외가 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점심 도시락 좀 먹고 갈 수 있겠는가?"하고 양해를 구했더니 금방 자리도 양보해 주었다. 자리를 양보해주면서 여분의 낚시 의자와 돗자리까지 가져다주었다. 낚시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 같았다.

중국인 촌부의 집이 바로 찻길 건너편이었다. 물도 쓰게 해주고, 화장실도 제공하였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면서 챙겨주기까지 하였다. 중국 시골의 화장실이 이상하고 불편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왔지만, 닭들과 강아지들이 드나드는 화장실은 참으로 불편하였다. 그래도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우물은 시원하기 짝이 없어 좋았다. 우리는 그분들의 친절에 보답하고 싶어서 여유분의 도시락을 나눠 드리려 했지만, 이미 먹었다면서 굳이 사양하였다. 우리는 준비해 온 과일을 나눠 드리는 정도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그런데 우리가 점심을 먹는 모습,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중국인 촌부는 남이 아닌 듯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눈빛이 외국인을 바라보는 호기심 어린 눈빛이 아닌, 인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참으로 정이 많은 분들인가 싶었더니, 그들에게 애처로운 사연이 있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자신의 며느리가 탈북한 북한 출신 여성이었는데 밀수를 하다 공안에 잡혀 사형을 당했다고 했다. 같이 밀수를 하던 자신의 아들은 지금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무엇을 밀수해서 사형까지 당하게 되었는지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마음씨 착했던 자신의 며느리를 그리워하며 같은 언어를 쓰는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것이었다. 며느리와 같은 언어를 쓰는 우리를 보면서 불쌍한 자신의 며느리를 떠올릴 만큼 그들은 며느리와 정이 들었던 것 같다. '인권'을 운운하기 전에 같은 여성으로서 탈북한 여성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과 비애를 생각하니 감정이 울컥하였다. 가슴이 찡해서 강 건너 김형직군을 건너다 볼 기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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