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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타지설화의 현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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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타지설화의 현장을 찾아서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48>
백령도로 가는 뱃길은 멀다. 인천에서 쾌속선 명색으로 소요시간이 네 시간으로 잡혀 있지만, 일쑤 네 시간 반 이상 걸린다. 그 뿐 아니다. 배를 타려면 날도 잘 받아야 한다. 서너 달 전에 처음으로 백령도 가겠다고 배를 탔을 때, 인천을 떠난 후 한 시간 가량 잘 가던 배가 외해로 나가면서 롤링이 심해지는 것 같더니, "풍랑이 높아지고 있어 회항하겠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면서 배는 곧바로 뱃머리를 돌려 인천 연안부두로 되돌아왔었다. 그후 한 달 남짓만에 나는 다시 백령도행 쾌속선에 올랐다. 그렇게 두 번이나 별러서 배를 탔던 것은 순전히, 『삼국유사』 '진성여왕 거타지'조의 현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진성여왕 거타지'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왕[진성여왕] 때의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후백제의 해적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우리말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 심청각에서 바라본 인당수_멀리 뻗어나온 장산곶 앞바다가 인당수이다ⓒ김대식

여기에서 말하는 곡도(鵠島), 즉 고니섬이 바로 백령도이다. 백령도는 지금 남북 분단으로 인해 북쪽으로는 뱃길이 막혀 있지만 옛날에는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뱃길의 요충이었다. 백령도와 그리고 마주보는 황해도 장연군 장산곶 사이는 물살이 매우 사나워서, 여간 익숙한 솜씨가 아니면 바닷길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심청 전설에 나오는 인당수가 바로 그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예부터 그 일대의 물길이 험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당나라로 가는 신라 사신 일행이 거센 풍랑을 만나서 발이 묶여 있었던 곳이 바로 백령도였다.

풍랑 때문에 발이 묶여 있던 양패가 걱정 끝에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게 했더니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했다. 이에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았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양패공에게 말했다.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 두면 순풍(順風)을 얻을 것이오."
양패공이 깨어나서 그 일을 좌우에게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는 것이 좋겠소?"
여러 사람이 말했다.
"나무 조각 50개에 각각 저희들의 이름을 써서 명패가 물에 가라앉는 사람을 뽑으시면 될 것입니다."
공은 이 말을 좇았다. 이때 50명 궁수 중에 거타지(居陁知)의 이름이 물에 잠겼으므로 그 사람을 섬에 남겨 두고 양패공 일행이 떠나려 하자 문득 순풍이 불어서 배는 미끄러지듯 떠나갔다.


당나라로 가는 일행 중에 그 내력이 밝혀진 사람은 없다. 사신의 우두머리로 나오는 아찬 양패가 진성여왕의 아들이라고 나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진성여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이는 진성여왕이 후사(後嗣)를 얻지 못하여 큰오빠인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효공왕으로 세운 일로도 증명이 된다. 그럼에도 사행(使行)의 우두머리가 진성여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중국 사신으로 파견된 왕자는 대개 가(假)왕자였기 때문"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 섬에 남게 된 거타지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달리 기록이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진주목'조 건치연혁에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이니 달리 거타(居陁)라고도 한다"는 대목과, 『삼국사기』 지리지 강주(康州)조의 "거창군은 본래 거열군인데(혹은 거타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에 개명했다"라는 대목을 참고한다면, 거타지의 출신 지역이 지금의 거창이라는 점만을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지(知)라는 말은 신라시대에 남자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던 말이라고 한다.
▲ 연못이 있던 자리ⓒ김대식

혼자 섬에 남게 된 거타지가 못 가에 시름없이 서 있던 중에 갑자기 노인 하나가 못 속에서 솟아 나오더니 말했다.
"나는 서해약(西海若)인데 매양 해가 뜰 때면 중 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다라니(陀羅尼) 주문(呪文)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肝)을 빼어 먹는데 이제는 오직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또 반드시 올 것이니 그대는 활로 쏘아 주시오."

이에 거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나의 장기(長技)이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먹으려 했다. 이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를 했다.

"공의 은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거타가 말했다.

"나를 저버리지 않고 따님을 주신다니 참으로 바라던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의 품 속에 넣어 주고, 용 두 마리에게 명하여 거타를 모시고 사신(使臣)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당나라 사람은 신라의 배를 용 두 마리가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皇帝)에게 말했다. 이에 황제가

"신라 사신은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게다."
라고 하여 잔치를 베풀어 거타를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거타가 꽃가지를 끄집어내었더니 꽃은 여자로 변하여 거타는 함께 살았다.

거타지설화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많은 설화 중에서 각별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이는 거타지 설화가 『고려사』세계(世系)에서 작제건(作帝建) 이야기로 변환되어 실려 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작제건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조부이다. 『고려사』세계(世系)가 왕건의 조상들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거타지설화를 끌어다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제건설화'에서 용(龍) 구출의 모티프는 '거타지설화'의 그것과 거의 같다. 작제건이 항해 도중에 풍랑이 사나워져서 점을 치니, 고려 사람이 배에서 내려야 한다고 하여, 작제건이 섬에 내린다. 섬에 내린 작제건에게 서해 용왕이라는 노인이 나타나 부처의 모습을 한 자(者)를 퇴치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작제건이 노인을 해하려는 부처를 활로 쏘아 죽이니 그 부처는 늙은 여우로 변하였다. 그 뒤 용왕의 딸과 작제건이 혼인하여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이 '작제건설화' 중에는 용녀가 우물을 통하여 용궁을 출입한다는 용녀전승(龍女傳承)도 포함되어 있다.
▲ 지명으로만 남은 연지동ⓒ김대식

용녀가 일찍이 송악의 새 집 침실의 창 밖에다 우물을 파고 우물 속으로 해서 서해 용궁에 왕래하였던 것이니, 곧 광명사(廣明寺) 동상방(東上房)의 북쪽 우물이다. 평소에 작제건과 더불어 약속하기를
"내가 용궁에 돌아갈 때는 삼가 엿보지를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나이다."
고 말하여 왔는데 작제건이 몰래 이를 엿보았다. 용녀가 소녀와 함께 우물에 들어가 같이 화하여 황룡이 되어 오색의 구름을 일으키는지라 이를 기이하게 여겨 감히 말을 하지 않았는데 용녀가 돌아와 노하여 말하기를
"부부의 도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귀한 것이어늘, 이제 이미 약속을 어겼으니 저는 이곳에 살 수 없나이다."
하고 드디어 소녀와 함께 다시 용이 되어 우물에 들어가 버린 다음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한 용녀전승이 수모신(水母神) 숭배를 그 원형으로 삼고 있다든가, 우물 출입이 수중세계에의 반환(返還)으로 곧 생명원천에로의 복귀라든가 하는 등등의 신화적 해석을 젖혀두고라도, 우리는 용녀전승에서 소설 심청전과의 유사성을 찾아낼 수도 있다.

용녀가 우물을 통하여 바다로 왕래한다는 사실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져 바다에 들어가는 것과 대응되고, 용녀가 용으로 화하여 용궁출입을 하는 것은 바다에 빠진 심청이 용궁으로 인도되는 것과 대응된다. 그리고 용녀가 다시 인간이 되어 지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다시 심청이 연꽃에 싸여 이 세상으로 환생한다는 점과 대응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용녀가 우물을 통하여 바다를 드나드는 대목이나,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연꽃에 쌓여서 다시 환생하는 대목들을, "용왕의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 속에 넣어주고 나중에 꽃을 꺼내어 다시 여자로 환생하게 하는" 거타지설화가 엮어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거타지설화는 다시, 심청이 연꽃에 싸여 환생하여 왕비가 된다는 심청 전설로 연결되고 있다.

백령도는 이러한 거타지설화와 심청 전설의 공통적인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백령군에서는 인당수가 멀리 바라보이는 언덕에 꽤 큰 규모의 '심청각'이라는 정자를 세워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고, 백령도 안내 팜플렛에는 심청이 환생하면서 연꽃을 타고 나왔다는 전설을 따라 연봉바위라고 이름지은 바위도 표시되어 있다.

나는 그러나 백령도에서 거타지설화와 관련된 유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백령도를 직접 찾아가기로 한 데에는 백령도 지도에서 연화리(蓮花里), 연지동(蓮池洞)이라는 지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특히 연지동이라는 이름을 주목했는데 이곳을 찾아가다 보면 거타지가 서성대던 연못이 있어 거타지설화의 자취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연지동이라는 동네에는 연못이 없었다. 동네 주민들 몇 사람에게 '연지(蓮池)'라는 연못의 위치를 물었음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연못은 몰라도 '그 연못이 있던 자리'를 안다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안내를 부탁했더니 그 사람은 야트막한 야산 자락이 끝나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는데 옛날에 연못이었다는 그곳에는 자그만 물웅덩이 비슷한 곳에 갈대만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잔뜩 기대를 하며 허위허위 200km가 넘는 바닷길을 찾아왔던 이틀의 여정(旅程)이 허무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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