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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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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왔다 [오수연의 '팔레스타인 명장면'] <1> 은총의 비
다음은 소설가이자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회원인 오수연 씨의 팔레스타인 현장 에세이다. 지난 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석 달간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던 오 작가는 현장에서 접한 10개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에세이로 엮어냈다.

오 작가는 지난 2006년 7월부터 자카리아 모하메드 등 팔레스타인 작가와 신경림 시인 등 한국 작가와의 서신 대화 '팔레스타인과의 대화'를 기획해 <프레시안>에 연재한 바 있으며, 이 책은 지난해 말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오 작가의 이번 에세이는 매주 월,목 2회씩 앞으로 5주간 연재된다. <편집자>

정말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그냥 걸어 다녔다. 뛰지도 않았다. 방금 거리로 나온 사람은 머리카락에 빗방울이 이슬로 얹히고, 좀더 걸은 사람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었으며, 오래 걸은 사람은 등짝이 번들거리고 바지자락이 아래로부터 진하게 물들어 늘어졌다. 사람들은 그렇게 젖어갔다. 나와 '복태'*는 우산을 접고 버스 터미널로 들어갔다. 터미널 앞에서 만나 우리를 잘라존 난민촌*으로 안내하기로 했던 팔레스타인 친구는 오지 않았다.

안내원이 가리킨 승합차는 비어 있었다. 우리는 자리 잡고 앉아 다른 승객들을 기다렸다. 복태가 발갛게 언 손으로 오지 않는 팔레스타인 친구에게 네 번인가 다섯 번째로 휴대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운전사가 맨 마지막으로 타서 문을 쾅 닫고 차를 출발시켰다. 뒷사람이 우리 등을 두드리고 동전을 건넸다. 우리는 그 동전을 앞사람에게 건넸고, 앞사람은 운전사에게 건넸다. 운전사가 그에게 준 거스름돈은 우리를 통해 뒷사람에게 전해졌다. 우리의 차비와 거스름돈도 같은 방식으로 가고 왔다. 굵어진 빗줄기가 승합차 천정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앞차창의 와이퍼가 부지런히 움직여도 시야는 녹아내리듯 흐물거렸다. 안개마저 자욱했다. 가면 못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잘라존 난민촌에 들어가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정류소에서 따라 내리기는 했으나, 우리는 거기가 난민촌의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팔레스타인 친구가 보여주겠다던 어린이 도서관이 어딘지도 물론 알 수 없었다. 잘라존에 사는 그 친구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안 받았으며, 우리의 다음 약속까지는 한 시간이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그저 정류소에 서있었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지나가던 십대 남자애들이 굳이 길 돌아 우리한테 다가와 얼굴에 대고 "중국인!"이라고 고함쳤다. 혹시 하고 대비를 좀 했기에 망정이지, 넋 놓고 있었다가는 간 떨어질 뻔했다.
▲ 정육점에서 할랄 (피를 빼는 과정) 중인 양고기. 향초로 장식되어 있다.ⓒ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길 건너 정육점에서 소를 잡았다. 정육점 앞에 묶여있던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우리 눈앞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더니, 간단히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다. 분리된 머리통은 정육점 안으로 던져졌으며, 경사진 골목에서 쏟아지던 물이 시뻘겋게 물들어 길을 덮고 우리 발치에서 맴돌다가 흘러갔다. 다음 차례인 소의 눈앞에서. 그리고 그 다음 차례일, 저만치 트럭에 실려 있는 또 한 마리 소의 눈앞에서. 복태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등 뒤 상점에서 청년이 나와 우리더러 가게 안에 들어와 있으라고 했다. 친절하게도 기우뚱한 나무 의자마저 내주었다. 거기도 정육점이었다. 껍질 벗겨져 거꾸로 매달린 양들 옆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나는 복태에게 다음 약속 상대인 '하이쌈'에게 전화 걸어보자고 말했다. 그녀도 전화를 안 받으면 라말라로 돌아가자고도 덧붙였다. 복태가 번호를 누르는 순간, 나는 그녀도 전화를 안 받을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어쩐지 그럴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하이쌈은 전화를 받았다. 전화수화기를 통해 나오는, 지금 어디 있느냐고 커다랗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렸다.

그녀는 왔다. 당연히 우산 같은 건 안 쓰고, 쏟아지는 빗속을 척척 걸어왔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하도 씩씩하게 걸어, 작동 중인 로봇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5년 만에 보는 그녀는 앞머리에 회색빛이 돌기 시작했으나 안색이 좋았다. 여성운동가인데 5년 전에 그랬듯이 요즘도 정신없이 바쁘다고 했다. 우리도 우산 따위 안 쓰고 길바닥에 흥건한 핏물을 건너 그녀를 따라갔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내가 말했더니, 그녀는 코끝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싱긋 웃었다.

"비가 오잖아. 오늘은 나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 행복해. 축제 같아. 올겨울에 비가 안 와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데."

그 날은 행복한 날이었다. 인상 찌푸린 사람은 나와 복태뿐인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죄다 웃고 있었던가 싶어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침침한 가게들 안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잘 알아볼 수는 없었다.
▲ 여성운동가 하이쌈과 오빠네 가족.ⓒ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하이쌈의 집에서는 평소에는 잘 안 먹지만 오늘 같은 날씨에는 제 격인, 국을 끓이고 있었다. 우리는 우선 뜨겁고 단 차로 몸을 녹이고, 하이쌈이 샐러드에 넣을 향초를 뜯으러 옥상에 올라간다기에 따라갔다. 넓지 않은 옥상에는 물 저장통들과 드럼통에 흙을 채워 만든 텃밭이 빼곡하고, 텃밭 위로 빨랫줄도 이리저리 엇갈렸으며, 한쪽에는 비둘기장까지 있었다. 사방으로 빼곡한 옥상들과 다닥다닥 달라붙은 집들이 죄다 비슷했다. 공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1967년 전쟁으로 두 차례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거기 살고 있었다. 60년 동안 이스라엘한테 '보이지 않는 도살'을 당하면서 버텨낸 삶이 거기 있었다. 그 난민촌은 라말라에서 멀지 않아 형편이 낫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통 가정에서는 사나흘에 한 번 고기 반 근 정도 사다먹는다고 했다. 우리가 손에 꺾어든 여린 향초에서 진한 향기가 났다. 은총의 비가 내렸다.

점심상에 궐련 모양의 포도 잎 쌈이 올랐다. 맛있었다. 그 안에 든 소는 비둘기 고기라고 했다. 옥상의 비둘기들은 식용이었다.

*복태: 팔레스타인에 함께 다녀온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회원.
*잘라존 난민촌: 팔레스타인 행정도시 라말라 인근의 난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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