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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 살해된 일본인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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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 살해된 일본인 청년 [권혁태의 일본 읽기] <7> 그는 왜 이라크에 갔는가?
이라크 인질 사건과 자기책임론

해외여행 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가정해보자. 요즘처럼 해외여행이 일상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해외여행 사고는 신문 가십이 되기도 힘들 것이다. 사고가 중상 이상이고, 그리고 다소 비극적인 배경이 곁들여질 수 있다면 신문 한 귀퉁이에 몇 줄 기사가 등장할 것이지만, 이를 읽은 사람들은 그저 "거 참! 운도 지지리 없는 사람이네"라고 한마디 내뱉고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일본 외무성에 따르면, 2006년 한 해 동안, 약 1700만 명의 일본인이 해외로 출국했는데, 이 중 약 1만 8000명이 사건, 사고를 경험했으며, 약 5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해외여행 중에 경험하는 '불행'은 그저 개인이 여행하다가 닥친 재앙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해외여행지가 위험지역이고, 더구나 그 위험지역이 정부가 입국을 제한하는 전쟁지역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고는 그저 개인이 여행 중에 당하게 된 우연한 사고의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 입국 목적이 공무 등, 정부정책을 직간접적으로 수행하다가 당한 사고일 경우에는 '순직'이라는 이름이 곁들여진다. 2003년 11월 일본인 외교관 2명이 공무수행 중에 이라크 무장 세력으로 총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본 정부는 '애도의 뜻'을 표했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여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기는 했어도 이 불행을 바라보는 일본사회의 눈이 '애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국 목적이 엔지오 활동, 취재, 선교, 봉사 등, 이른바 민간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이들의 입국 목적이 자국 정부의 정책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을 경우, 예를 들면, 일본 정부는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견하고 있는데, 자위대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라크에서 활동하다가 인질로 잡힌 경우는 어떨까? 이런 사례를 잘 말해주는 사건이 2004년 4월에 발생한 3명의 일본인 인질 사건이다.

일본인 3명의 인질은 넓은 의미의 반전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일본 정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라크에 입국했으며, "자위대 철수"를 석방 조건으로 내세운 이라크 무장 세력에 의해 인질로 잡혔다. 따라서 인질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인질 가족들이 일본 정부에 자위대 철수를 요구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자위대 철수 요구가 있자마자 사건의 성격은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한다. 인질 사건이 자위대 철수 여론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자업자득', '인질 조작', '자기책임론'을 적극 전개해 자위대 철수 여론을 차단한다. 그러면서 이들의 행동에 '꼬투리'를 잡고 싶었던 정치가, 미디어, 누리꾼들이 자기책임론에 벌 떼처럼 몰려들었고, 이들에 대한 '증오의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자기책임론'이다. 자기 의사로 입국했으니,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살아나기 위해 자위대 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일 살고 싶다면, 사죄를 해야 하며, 구출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이들이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이것이 자기책임론의 요체이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입국 목적이 위에서 예로 들은 선교도 아니고, 봉사도 아니며, 반전활동을 위한 것도 아닌 단순 관광이라면? 아니 관광 목적으로 이라크에 왜 들어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리고 관광을 목적으로 이라크에 들어가서 인질로 잡혀 살해되었다고 한다면, 누구나 그런 무모한 짓을 한 사람의 '철없음'을 지탄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2004년 10월에 이라크에서 일어났다.
▲ 고다 쇼세이의 사망을 전하는 일본 신문.()

이라크에 간 일본인 청년의 무모함

2004년 10월 30일 새벽, 바그다드에서 머리가 잘린 일본인 청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청년의 이름은 고다 쇼세이(香田證生), 24살이었다. 그의 영상이 일본 텔레비전에 보도된 것은 26일. 영상 속에서 고다는 "자위대를 철수하지 않으면 제 목을 자르겠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일본에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겁에 질린 채로 말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즉각 "자위대 이라크 철수 불가"방침을 천명하였고, 그로부터 불과 사흘 후에 고다는 처형된다. 일본인 중에 민간인으로는 첫 번째 희생자였다.

고다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은 매우 냉정했다. 아사히신문도 고다의 이라크 입국을 "무모"한 행위라고 하면서 "고다 씨의 행동에 의문점이 많다. 앞서 인질이 되었던 3명은 이라크 국내에서 자원봉사나 취재활동을 했다. 고다 씨가 이라크에 들어간 이유가 불분명하다 그의 상황인식이 지나치게 유치했다"고 보도했다. 불과 반 년 전에 일어났던 인질 사건 때에는 인질의 무사귀환을 위해 자위대를 철수해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던 미디어나 지식인들도 이구동성으로 "무모하고 경솔"한 고다 씨의 행동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렇듯 고다의 불가사의한 행동을 "무모", "경솔"이라고 비난하면서도 그가 왜 이런 무모하고도 경솔한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없었다. 철부지 20대의 한심한 행동이라는 평가로 충분했던 것이다.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교육도 받지 않고, 노동도 하지 않으며,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세대)나 아르바이트, 히키코모리(social withdrawal), 캥거루 족 같은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한심한 20대론'의 연장선에서 습관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런 비난 여론 속에서 고다가 이라크에 입국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족적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재구성한 책이 시모카와 유지의 『고다 쇼세이는 왜 살해되었는가(下川裕治,『香田証生さんはなぜ殺されたのか』,新潮社, 2005년)이다. 1970년대에 이미 멀쩡하게 다니던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배낭족 1세대로 자리 잡은 지은이는 고다가 걸어간 행로를 추적하면서 그가 왜 이라크 입국이라는 무모한 행동을 저질러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알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나 이 책에서 그는 실패한다. 왜냐하면 고다가 "살해된 이유"가 "무모하고도 경솔한 행동=이라크 입국"에 있었다고 한다면, 왜 이라크에 무모하게 입국하였는가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주어야 하는데, 이 책은 전혀 그런 대답을 준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매우 귀중하다.

고다 쇼세이의 평범한 인생

고다는 규슈의 북단 나오가타(直方)에서 태어나 자라났다. 나오가타는 인구 6만 명 정도의 전형적인 지방 소도시이다. 고다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통신제 고등학교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한다. 기록을 보는 한 딱히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공부를 못했거나 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흔히 그렇듯이 그저 그런 평범한 청년이었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여행을 좋아했고, 외모에 전혀 관심이 없어 항상 청바지에 샌들, 그리고 마치 히피를 연상시키는 산발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정도였다. 이런 점을 빼면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모은 돈으로 여행을 즐기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른 세대'는 취직하려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만 해서 여행을 즐기는 계획성 없는 이 젊은이를 매우 한심스럽게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가족들조차 고다의 한심한 무계획적인 생활방식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그는 2004년 1월에 일본을 출국해서 9월까지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받는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는다. 어학 학원 교실 구석 의자에 앉아 조용히 영어공부를 하던 그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경제적으로 궁핍해서 항상 돈에 쪼들려 있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런 그는 갑자기 뉴질랜드를 출국해 9월 9일에 이스라엘에 입국해 약 한 달 남짓 정도 체류한다. 이스라엘에 간 이유도 불분명하다. 관광비자로 입국해도 농장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이스라엘이 돈에 쪼들려 있던 고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이라크 입국을 위한 경유지였던 것 같지도 않다. 왜냐 하면 주변 아랍제국에 입국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입국 시 여권이 아닌 별도의 용지에 입국 도장을 받아 이스라엘 입국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그는 이스라엘 입국 시, 담당자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의 여권에 이스라엘 입국 도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 한 달 동안 이스라엘에 체류한 그는 10월 19일 요르단에 입국해 하루를 머물고 10월 20일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라크에 입국한다. 그리고 10월 23일에 인질로 잡힌다.

이렇게 보면 그의 이라크 입국은 '갑자기'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뉴질랜드에서 이스라엘로 향할 때, 이라크 입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이라크 입국을 결심한 것은 이스라엘에서였다. 그는 약 반년 전에 이라크에서 발생한 일본인 인질 사건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 이라크가 얼마나 위험한 지역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대충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이라크에 갔을까?

카오산과 일본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답은 일본을 떠나는, 혹은 떠나고 싶어 하는 일본인에 대해서이다. 즉 '평화' 속에서 살고 있는 일본 사회의 '답답함'에 대해서이다. 경쟁과 판에 박힌 삶을 강요하는 일본 사회가 젊은 사람들에게 거부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 현실이 젊은이들을 일본으로부터 몰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이라크가 아니어도 좋은 것이다. 일본과는 전혀 다른 삶 속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다는 소극적인 욕구가 고다로 대표되는 일본 젊은이들을 일본 밖으로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은이 시모카와는 태국의 카오산을 들고 있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 자리한 카오산(Khaosan road)은 '자유'를 꿈꾸는 배낭 족들에게 잘 알려진 저렴한 숙소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인도, 티베트, 네팔, 태국 등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배낭 족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 반전 운동이 일단락되고 나서부터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맛본 좌절을 아시아의 정신세계를 통해 치유 받고자 아시아로 몰려든 것이다. 물론 카오산은 이미 아시아가 아니다. 병든 '선진국 백성'이 보고 싶어 하는 아시아일 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인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풍요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일본의 젊은이들이 카오산으로 몰려든다. 29세의 일본인 여성은 카오산에서 말한다.

"고등학생, 17살 때 일이었지요. 남자 스토커한테 납치된 적이 있었어요. 그 일로 학교는 그만두게 되었지요. 그리고 거의 자포자기상태. 19살 때 카오산에 왔어요. 원래는 자살하려고 카오산에 왔지요. 3달 정도 있었지요. 그런데 카오산에 오면 죽을 수가 없어요. 뭔가 자유로워진다고 할까? 그 때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매해 카오산에 옵니다. 일본에 있으면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요. 그래서 거의 히키코모리 상태이지요. 그런데 카오산에 오면 달라져요"

카오산에 와서 치유를 받는다고 해서 카오산에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카오산의 물가가 싸다는 것, 그리고 경쟁, 눈치, 체면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카오산에 오는 일본인들은 일본에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카오산에 와서 자유와 해방을 느끼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카오산에 오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1년의 반을 카오산에서 생활한다는 30대 후반의 일본인 남성은 카오산에서 말한다.

"일본에서 일하는 기간은 두 달 정도. 시급이 높은 공장을 골라 잔업까지 하면서 열심히 일합니다. 두 달 정도 고생하면 카오산에 갈 수 있으니 견딜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 100만 엔 벌지요. 이 돈이면 일본 월세를 내고나서도 카오산에서 반년은 살 수 있어요. 일본에서 일이 없을 때는 거의 히키코모리 상태입니다. 친구들은 모두 결혼해서 가족들이 있고 또 회사일로 바쁘니 내 처지를 말해도 들어줄 수 있는 친구는 없는 셈이지요. 대낮에 길거리를 배회하면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요. 히키코모리 밖에 없어요. 그래서 카오산에 오지요. 카오산에서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빈둥하는 게 아무 이상할 게 없지요. 친구도 있고요"

이렇게 보면 카오산은 병든 일본 젊은이를 치유하는 신경과 병원인 셈이다. 안에서 병을 얻고 밖에서 치료를 받는 셈이다. 지은이는 이런 현상을 '히키코모리'가 아니라 '소토코모리'라 한다. 히키코모리가 사회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 자기 방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뜻한다면, 카오산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현상을 '밖'이라는 뜻의 일본어 '소토(外)'를 붙여서 '소토코모리'라 하는 것이다.

다만 히키코모리가 자기억압의 생활형식이라 한다면 소토코모리는 자기치유을 위한 탈출구라는 차이점이 존재할 뿐이다. 고다는 카오산에 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인 시모카와가 카오산이나 니트, 히키코모리 등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고다의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행동의 배경에 병든 일본 사회가 자리 잡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일본에는 약 250만 명의 히키코모리(NHK복지 네트워크 2005년 통계), 약 200만 명에 달하는 '프리타'라 불리는 비정규직 노동자(permanent part-timer), 그리고 약 100만 명을 넘는 니트가 존재한다. 이들은 소토코모리 예비군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권혁태, 「일본의 이라크 인질사건과 '자기책임론'」, 『동향과 전망』2006년 가을/겨울.

下川裕治,『香田証生さんはなぜ殺されたのか』,新潮社, 2005년。
同志社大學野健一ゼミ編『イラク日本人拘束事件と「自己責任」報道』現代人文社、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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