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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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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바보들 [오수연의 팔레스타인 명장면] <9> 버텨요, 버텨!
마지막 날 저녁, 우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나는 점심 무렵부터 잇따른 약속마다 이별주 한 잔씩 하다보니 파티 전부터 취해 있었고, 파티에서는 한국인의 음주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파티 끝나고도 진정한 술꾼들과 마지막으로 한 잔 할 약속이 남아 술집으로 향하는 나를, 자카리아 무함마드 시인과 그의 부인 살마 칼리디 선생님이 차 태워주었다.

보슬비가 내렸다. 차창에 빗물이 흐르고, 거리의 불빛도 녹아내렸다. 앞자리의 부부는 말이 없었다. 파티에서만이 아니라 그 전날 부부, 복태, 나, 넷이 오붓하게 저녁 먹으며 감회를 다진 바도 있기 때문에, 작별 인사는 할 만큼 하고도 남았다. 5분이나 10분 뒤, 차가 술집 앞에 서면 정말 작별이었다. 다음날 새벽 6시에 복태와 나는 출발하기도 돼있었다.

그런데 살마가 운전대에서 오른손 떼어 오른쪽 눈을 눌렀다. 왼쪽 눈도 눌렀다. 조수석에 앉은 자카리아도 손이 얼굴로 오르락내리락 했다. 이거 원, 도대체가, 쯧쯧. 내가 차에 타자마자 눈이 좀 갑갑해서 손으로 문질렀다 해도 그렇지. 우리가 몇 달이나 여기 있었다고, 어차피 잠깐 왔다가는 외국인들인데.

바보, 바보들.
▲ 고집불통 자카리아 무함마드.ⓒ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사람들이 그렇게 물러서 어떻게 살아.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이 물러 터졌잖아. 수박처럼 속이 펑퍼짐하고, 흥건하고, 푹푹 들어가잖아. 그러니까 아무나 숟가락 들고 와서 막 퍼먹잖아. 쇠숟가락으로 온통 쑤시고 헤집고, 먹기 싫어도 퍼다 버리잖아. 그렇게 당해놓고, 60년 동안 당해왔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자카리아, 바보! 살마, 바보! 그 날 마주치면 섭섭한 표정 지은 사람, 다 바보!

자카리아와 살마 부부는 주말마다 라말라 교외로 소풍을 간다. 우리도 몇 번 따라가 보았는데, 이스라엘 정착촌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사실 갈 데가 많지는 않은 듯했다. 하루는 도시락 먹기에 좋을 만한 자리를 찾아 골짜기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살마나 우리가 보기에는 괜찮은 자리들이 꽤 있건만, 자카리아가 경치가 별로라는 둥, 앉기에 편치 않다는 둥, 산꼭대기에 정착촌 철조망이 보인다는 둥, 갖가지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놓았다.

소탈한 그가 장소에 대해서만은 까다롭고 고집이 셌다. 살마가 고개 저으며 우리에게 말하기를, 실은 그가 고집불통이라고 했다. 결국 차는 골짜기를 다 지나 큰길까지 갔다가 돌아 나왔다. 그런데 한적하기만 헸던 골짜기에 난데없이 차가 밀렸다. 이스라엘군의 '날아다니는 검문소(flying check point. 이동 검문소)'였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소풍 나선 길이니, 줄서기 싫으면 우리는 차를 도로 돌려 좀 전에 다다랐던 큰길로 우회해도 될 터였다. 하지만 자카리아가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저들을 만나야만 해, 반드시."
▲ 소풍 가서 만난 일가족.ⓒ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검문소에는 이스라엘군과 함께 정착민들이 서있었다. 셔츠와 청바지 따위를 입었으나 그들은 군인과 똑같이 총 들고 탄띠 두르고 무전기도 옆구리에 차고, 군인의 일을 했다. 썬글라스 낀 오만한 얼굴을 차마다 들이밀고 손을 까딱하여 정지나 통과를 명령했다. 때는 주말, 심심한 민간인들의 군사 놀이? 군복만 갖춰 입으면 딱 인데, 그치? 실제로 정착민들은 간간이 팔레스타인인 사냥을 나서 농부나 목동을 저격하고 지나가는 차에 기관총을 난사하기도 한다. 자신의 주장대로 굳이 이스라엘 군벌과 대면했을 때, 차의 옆 거울에 비친 자카리아의 얼굴을 나는 보았다. 실로 그가 고집불통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자카리아, 그 고집으로 버텨요!

어느 날엔가 나는 그 부부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밥 내놓으라고 했다. 오후 3시, 점심때도 저녁때도 아닌데 나는 배가 고팠다. 그 전에 누군가를 만나 별 실속도 없는 이야기를 하느라고 진을 뺀 탓이었다. 살마가 급히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나는 서러움이 복받쳤다. 팔레스타인은 내게 환상이었다. 2003년에 내가 처음 왔을 때는 2차 인티파다 와중이라 훨씬 살벌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다들 투쟁의 한 대열에 서있었다. 그러나 어찌 모든 인간이 투쟁 전사가 될 수 있으며, 투쟁 전사라 한들 어찌 날마다 투쟁만 생각하고 살랴. 5년 만에 팔레스타인에 다시 와서 전보다는 길게 머무르면서, 나는 지지고 볶는 일상을 보았다. 그게 당연한 현실이건만 나는 환상이 깨지는 아픔을 느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바가지를 씌우더라는 사소한 일로부터, 나는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묵묵히 다 듣고 나서 살마가 말했다.

"우리는 쇠가 아니야, 인간이야. 60년 동안 점령당하면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뒤틀릴 수 있는 거야. 우리에게 가장 큰 저항은, 자신을 지키는 거야."

살마는 온유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별로 치면 태양처럼 열과 빛을 내뿜는 별이었다. 보통 사람은 다섯 명쯤이 할 일을 하루에 해치웠다. 그가 장애아 담당 교사로 근무하는 '프렌즈 스쿨'을 우리가 방문하면, 그는 휙 나타나 안내하다 휙 자기 수업 하러 갔다가, 또 어느 새 휙 휙 운동장, 교장실, 정문 앞 경비실 등에 가 있었다. 사람들이 다들 그를 찾았고, 그는 마치 모든 곳에 편재하는 듯했다. 그는 학교 바깥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정치, 사회, 여성, 환경, 모든 이슈에 흥분하고 간섭하며,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라말라 시내 알 마나라 광장에서 데모를 하자고 남편 자카리아와 함께 주변에 전화를 돌렸다. 매사에 이런 식으로 뛰어다니다가, 그는 다리가 4번이나 부러졌다. 2008년 1월 라말라에서 상봉했던 한 무리의 한국인들, 즉 어린이 문화학교 '사과'의 선생님들과 복태, 나는 급기야 조직하고 말았으니, '살마 팬 클럽'. 살마, 그 힘으로 버텨요! 제발 다리는 더 이상 부러뜨리지 말고.

억울할 때, 화날 때, 싸울 때, 당신들은 울지 않지요. 당신들이 울 때는, 사랑할 때. 사랑 때문에 가슴이 미어져 어쩔 줄 모를 때, 그 때.
▲ 무한 에너지 살마 칼리디. 버텨요, 버텨!ⓒ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다음날 비행기를 갈아타려고 들른 터키 이스탄불 거리에서, 나는 자카리아와 살마를 보았다. 지나가는 남자들은 자카리아, 여자들은 살마로 보였다. 미쳤지, 내가. 이빨을 앙다무는데 옆에서 복태가 땅이 꺼지게 한숨쉬며 중얼거렸다.

"이상해.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 팔레스타인 친구들로 보여."

내 애원과 협박에 못 이겨 팔레스타인 왔다가 시쳇말로 콱 물려버린, 복태! 너, 바보! 한국에 돌아가서 팔레스타인이 더욱 더 생각난다고 메일 보내는, 사과들 바보! 바보, 바보들.

사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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