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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대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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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대한 감각 [오수연의 팔레스타인 명장면] <10ㆍ끝>
검문소가 생기면 사람들이 갈 길 못갈 뿐더러, 땅이 죽어버린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검문소를 피해 돌아가거나 숨어 다니지 못하도록 검문소 양쪽으로 기다란 철조망을 세우고, 시야를 가리는 나무와 덤불을 싹 밀어버린다. 땅은 먼지 풀풀 날리는 황무지가 된다. 그리고 색색의 비닐봉지들이 날아와 철조망에 처덕처덕 달라붙었다가, 일부는 떨어져 철조망 아래 둑처럼 쌓이고 일부는 철조망 넘어 멀리 날아가며, 또 일부는 철조망에 걸려 바람에 찢기면서 흩날린다. 그 쓰레기는 대개 검문소에 줄서있는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나온다. 사람을 줄 세워놓으면서 화장실, 쓰레기통 같은 편의시설을 준비해놓지 않은 이스라엘군 탓이기는 하나, 팔레스타인인들도 개의치 않는다. 검문소를 통과하기까지 1 시간이 걸릴지 혹은 12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이스라엘 병사가 전날 여자친구로부터 불친절한 소식을 받든지 해서 심통이 나지 않았기를 다만 바랄 수밖에 없는 그들이, 쓰레기까지 신경 쓸 수가 있겠나. 삶의 터전이 아니라 고통의 덫으로 변해버린 땅을 걱정해줄 기분이 들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

2년 전 그들은 지렁이를 만났다. 라말라를 벗어날 기회가 거의 없는 그들에게 지렁이는 낯설었다.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맨 땅에는 지렁이가 있겠으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우기가 겨울이라 비가 와도 지렁이가 기어 나오지 않는다. 코가 땅에 땋도록 숙여 지렁이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손바닥에 얹어 기어 다니게 해보기도 하면서 그들이 말했다. 예쁘다고. 환경을 위해 지렁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도, 지렁이가 예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렁이가 예쁘다고 느꼈다.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6-7 살짜리 코흘리개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집에서 싸온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남은 음식물을 유치원 뒤 흙 상자에 묻어두었다. 흙 상자에는 지렁이가 살고 있었다. 얼마 뒤 흙 상자를 헤쳐 보니 빵 조각, 사과 심지, 바나나 껍질, 요구르트는 지렁이가 먹어서 없어졌으나, 사과 심지를 쌌던 비닐, 요구르트가 담겼던 플라스틱 용기는 그대로였다. 비닐과 플라스틱은 지렁이의 먹이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기와 물을 막아 지렁이를 갑갑하고 힘들게 했다. 그들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어쩌지? 그들은 씻어서 계속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통에 도시락과 물을 담아오고, 그밖에 일회용품과 비닐봉지는 유치원에 가져오지 않기로 했다.
▲ 팔레스타인 마을에서는 아직도 울타리 대신 선인장이 자란다.ⓒ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교사들이 고생이었다. 물론 교사들도 그들의 결의에 대찬성이지만, 자기가 얼마나 일회용품에 젖어 있는지는 몰랐다. 직장에서 흔히 그러 듯 교사들은 점심 때 갓 구운 빵을 단체로 사다가 나눠먹는데, 빵집에서 빵을 담아주는 봉지가 으레 비닐이었다. 찻주전자에 붓는 물은 플라스틱 병에 담긴 미네랄워터, 가방에서 나오느니 휴대용 화장지였다. 하다못해 환경 교육 자재도 교사들은 슈퍼마켓에서 얻은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아 출근했다. 교실에 들어서서야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곤 했다.

"세상에 아이들의 눈처럼 무서운 건 없다."

그리고 부모들 차례였다. 어머니가 저녁 짓는 동안 그들은 유치원에서 받은 도표에 색칠을 했다. 음, 오늘 우리 집에서는 깡통 2 개, 알루미늄 접시 1개, 플라스틱 병 2개, 유리병 3개, 비닐봉지 8개.........를 버렸네? 일주일에 한 번 그들은 도표를 유치원에 들고 가서 산수 공부를 했다. 12+8+9+15+35=? 숫자가 많을수록 그들의 산수 실력은 늘겠으나 부모들이 뿌듯해할 수만은 없었다. 코흘리개들에게는 '대충' 또는 '무심코'라는 말이 통할 리 없으니, 부모들은 24 시간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왜 아이들한테 쓸데없는 짓을 시켜서 가정생활을 번거롭게 만드느냐고, 항의하는 부모는 없었다. 뜻밖에 학부모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 모든 게 점령 탓이다. 하지만 우리의 책임은 없을까? 마을 입구마다 쌓인 건축 폐자재, 야산에 버려진 가구들과 깨진 변기, 막혀 썩어가는 하수도를 보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군가 뭔가는 해야 한다고 늘 혀를 차면서도, 그 일을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여섯 살짜리 내 자식이 그걸 시작했다."

'프렌즈 유치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유치원의 환경 보호 프로젝트는 아이들로부터 가정으로, 가정에서 이웃으로 퍼져나가, 2년 만에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환경 교육의 성공 사례로 꼽혀 라말라 시청의 의뢰로 워크숍을 열기도 했으며, 교육 과정이 DVD로 제작되어 팔레스타인 각지와 해외로까지 보급되었다. 그리고 환경교육을 시작하려는 여러 유치원, 학교들이 직접 와서 보고 배워갔다. 유치원 교사 '두하 마스리'는 말한다.

"점령이 너무 혹독하므로 정치 이외 여성문제, 환경문제 등은 미뤄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정치 문제가 풀린다고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풀리지는 않는다. 5년 전부터 환경 교육을 시작하여 아이들에게 말로 설명해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다가, 2년 전 지렁이 덕분에 크게 달라졌다. 우리도 아이들이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고 이토록 감동받을 줄은 몰랐다. 마음이 움직이자 아이들은 당장 변했고, 아이들이 변하자 부모들이 급격히 변했다. 아이들이 자기 눈앞의 지렁이를 괴롭히기 싫다는 마음이나, 자식들의 맑은 눈동자 앞에서 지금 당장 뭔가 하지 않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나, 결국 같은 게 아닐까?"
▲ 어린이들이 자기 집의 썩지 않는 쓰레기 배출량을 기록한 표. 쓰레기를 줄이거나 재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면 별 스티커를 받는다ⓒ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어느 날 해질녘 나는 나블루스의 알 후아라 검문소를 통과해 라말라 행 승합차를 탔다. 외국인인 나야 검문소에서 얼마 안 걸렸지만 차에 같이 탄 팔레스타인 승객들은 아침부터 온종일 서있던 터라, 조금 가서 또 있는 간이 검문소를 통과하기가 넌덜머리난다고 했다. 각자 돈을 조금씩 더 내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차량의 통행을 '불법적'(국제법상)으로 금지한 우회로로 '불법 주행' 해버리기로 했다. 지중해 연안에 전형적인, 흰 바위층과 숲이 층층이 이어지는 테라스형 지형은 아름다웠다. 나로서는 근사한 드라이브였다.

그런데 갑자기 차의 속도가 줄고 대화가 끊겼다. 전방에 차 한 대 서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차를 둘러싸고 맴을 돌고 있었다. 그 차가 왕복 일차선인 좁은 도로 한 가운데를 떡 차지하고 있으니, 지나가는 팔레스타인 차들은 조용히 아스팔트를 벗어나 자갈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다. 서있는 차는 이스라엘 차요, 맴을 도는 이들은 양쪽 귀밑머리를 돌돌 만 이스라엘 정착민들이며, 그들은 차를 돌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중이었다. 새파란 청년들이 손에 기다란 천 조각까지 들고 휘두르며, 하필 찻길 한가운데서 패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들을 흥분시킨 감정은 땅을 점령했다는 우월감마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모독하고 찍 소리 못하게 짓밟는, 말하자면 '엿 먹이는' 쾌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헤브론 인근에서 이스라엘 병사 둘이 팔레스타인 목동들 앞에서 바지를 까 내리고 제 엉덩이를 보인 사건이 있었다. 마침 근처에 외국인들이 지나가다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린 것을 나도 보았는데, 이스라엘 병사들의 메시지는 과연 추잡했다. 엿 먹어라!

팔레스타인에서 웬만한 땅은 다 차지한 이스라엘 군시설은, 무엇보다 추하다. 이스라엘군은 내나 이스라엘의 '보안'을 이유로 팔레스타인 땅을 덜컥 잘라 초토화시켜놓고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접근 못하게 하고 자기들이 돌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흉측한 시멘트 건물과 어수선하게 내던져둔 집기가 풍우에 낡아가고 반쯤 떨어진 휘장 따위가 펄럭여, 없던 수맥과 귀신도 죄다 모여들 것만 같다. 제아무리 명당이라 한들 흉지가 되고 말 듯하다. 이스라엘군이 원하는 바도 땅 자체라기보다, 거기서 아무도 못 살게 하는 것이지 싶다.
▲ '환경 보호단' 단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어린이. 실은 프렌즈 유치원의 모든 어린이들이 단원이다.ⓒ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를 완전히 둘러싼 8미터 높이의 시멘트 장벽은 그 안의 인간들, 경제활동과 함께 생태계를 질식시킨다. 설치류, 파충류, 작은 포유류 같은 야생 동물의 이동을 막아, 생명이 서서히 고갈된다. 올리브 나무가 잘린 걸 보면 팔레스타인인들이 느낀다는 '어지럽고' '맥이 풀리는' 감정이 이스라엘에게는 없다. 이스라엘이 1967년 이후 팔레스타인 전역을 점령하고 아직도 물러가지 않는 것이 국제법상 불법이나, 내 생각에는 이 무감각이 더 심각한 문제인 것 같다. 또는 감각이 있어도 일그러진 감각이라든지.

'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니다. 어린이들로부터 빌린 것이다.'

프렌즈 유치원 벽에 붙어있는 글귀이다. 원래 아메리카 인디언의 격언이라는데, 어디인들 후세로부터 빌리지 않은 땅이 있으랴마는 팔레스타인에서는 더욱 그렇다. 팔레스타인에서 땅을 지키는 건 희망을 지키는 것이다.

사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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