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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이고 용감한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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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이고 용감한 여인들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10>런던에서 점퍼가, 핼프튼 코트
어느 날 우리는 홍익대 앞의 스페인 식당에서 꿀을 탄 세리주를 나눠 마시며 무어인의 마지막 한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알함브라 궁전을 지은 무어인의 왕이 알함브라 궁전을 빼앗기고 언덕을 넘어갈 때 뒤돌아보며 마지막으로 쉬었다는 한숨. 그 성에는 무어인 왕들의 딸들이 살던 왕녀들의 탑이 있다.

▲ 워싱턴 어빙의 여행기 <알함브라> 표지 사진.
<알함브라>란 최고의 여행기를 쓴 미국의 소설가 워싱턴 어빙은 어느날 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젊은 아가씨가 그 탑의 창문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것을 보고 그 탑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 탑은 대리석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중앙 홀과 높은 아치들, 격자 세공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라베스크와 치장 벽토 장식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가 그라나다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탑에 갇혀 살던 세 공주는 밤에만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공주들은 이따금 아직도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보석으로 장식한 승마용 말을 타고 외로운 산속을 달리다가 누군가 말을 걸면 바로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세 공주의 전설을 더 소개했는데 무어인 모하메드왕은 어느 날 포로로 잡힌 기독교 국가 아가씨의 용모에 반해서 그녀와 억지로 결혼을 하고 세 딸을 한꺼번에 낳게 되었다. 점성술사들은 공주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특별히 폐하의 날개 아래 모아놓고 다른 누구에게도 보호를 맡겨서는 안됩니다라고 간언했다. 세 공주는 무척 아름답게 자랐는데 첫째는 호기심이 많고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만사의 근원을 캐기를 좋아했다. 둘째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고 꽃과 보석과 장신구를 좋아했고 거울과 분수 속에서 자기 모습을 찾아내 보는 걸 좋아했다. 셋째는 꽃과 새와 동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따뜻한 소녀로, 공상을 좋아해 몇 시간씩이나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나 달빛이 비치는 바다를 지켜보곤 했다.

어느날 세 소녀는 무어인 군인들에게 끌려오는 기독교인 포로를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기품 있고 당당한 세 명의 젊은이 들이었다.공주들이 그들을 흠모하게 되었다.공주들이 마침내 사랑에 빠질 몸과 나이가 된 걸 알자 무어인 왕은 점성술사의 말에 따라 그녀들을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대신 화려한 보석과 옷으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치장해줬다. 하지만 공주들은 나날이 웃음을 잃고 수심이 깊어갔다. 공주들은 결국 각각 짝을 맞춰 기독교인 포로들과 왕의 눈을 피해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웃음과 활기를 찾았다. 시일이 좀 흐르자 에스파나 기사들은 몸값을 치르고 그들의 고향인 코르도바로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갈 날이 되자 기사들은 세 공주들에게 함께 달아나자고 했다. 알함브라 궁전에는 남몰래 드나들 수 있는 지하 통로가 있었는데 통로는 강둑까지 연결 되어 있었다. 공주들이 그 지하통로를 통해 출구까지 가면 기사들이 그 곳에서 국경을 넘을 준마를 대기시키고 함께 달아나기로 약속했다. 드디어 탈출의 날, 공주들은 갇힌 탑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 막내 공주는 주저하며 덜덜 떨었다. 그녀의 다정다감하고 연약한 마음은 혼자 남을 아버지를 생각하자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발코니 아래서 언니들이 애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때 순찰병이 돌기 시작했다. 막내는 이렇게 소리쳤다. "나 결정했어요. 사랑하는 나의 언니들, 알라께서 언니들을 인도하고 축복하실 거예요." 나머지 두 공주는 기사의 등에 매달려 말을 타고 달려갔지만 곧 발각되었다. 그들은 강으로 뛰어 들어 파도에 몸을 던졌고 다행히 알라의 보호인지 성모 마리아의 보호인지 코르도바의 해안으로 밀려갔다. 왕이 두 딸을 찾아오는 일에 마음을 썼는지, 얼마나 애통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신 그는 남은 딸 하나를 지키는 일에 무척 마음을 썼다고 한다. 나중에 알함브라 궁전엔 일찍 죽은 왕녀의 눈물 젖은 무덤이 하나 생겼다고 한다.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이 스페인에게 함락된 건 카스티야 아라곤 공동왕인 이사벨라 여왕과 남편 페르디난도 때의 일이었고 바로 그 때 무어인 왕은 알함브라 궁전을 언덕에서 내려다보며 마지막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왕녀의 탑에 꽁꽁 갇혀 눈물 흘릴 필요 없는 어여쁜 공주들이 그 무어인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뛰어 놀게 되었다. 이사벨라 페르디난도 부부는 자신들의 네 왕자와 공주를 무어인에게 빼앗은 알함브라 궁전에서 길렀던 것이다. 이사벨라 -페르디난도 시절 때의 스페인을 존슨 박사의 개라고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뒷다리로만 걸어 다니는 묘기를 보여 사람들을 깜짝 놀래켜 준다는 그 개처럼 스페인도 변변치 않게 여겨졌다가 갑자기 유럽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을 놀래켜줬다. 유럽 사람들은 스페인의 도약에 어찌나 깜짝 놀랬던지 그 시절을 두고두고 스페인의 황금시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때 일어난 일들은 1492년 그라나다의 무슬림 완전 정복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그리고 종교재판소 설립이었다.

▲ 알함브라 궁전에서 놀며 뛰며 공부하며 지낸 공주가 바로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가 된 캐서린이었다.
그 어린 시절 알함브라 궁전에서 놀며 뛰며 공부하며 지낸 공주가 바로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가 된 캐서린이었다. 장미 전쟁을 치르고 왕이 된 헨리 7세는 아직도 취약한 정권을 그 당시 유럽의 핵심 세력으로 급부상한 에스파냐 왕실 공주와 아들과의 결혼을 통해 굳건히 하고 싶어했다. 두살 때 헨리 7세의 아들 아서와 정혼한 캐서린은 열두살 때인 1498년에 잉글랜드로 왔지만 결혼 여섯 달 만에 첫 번째 남편 아서가 죽고 만다. 그래서 캐서린은 아서의 동생인 훗날의 헨리 8세와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문제가 되었던 건 과연 아서와 캐서린이 초야를 치뤘냐 하는 것이었다. 캐서린은 아서와의 신혼 첫날밤에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운차게 침대로 뛰어들긴 했지만 그냥 잠만 푹 잤다고 주장을 해서 헨리 8세와 캐서린은 꽤 많은 시간을 보낸 뒤에 결혼하게 되었다.

헨리 7세의 뒤를 이은 헨리 8세에겐 너무나 많은 칭송이 있어서 그대로 믿기 힘들 정도다. 그는 수학, 천문학을 좋아했고 라틴어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했고 누구보다도 높이 점프를 하는 멋진 춤을 추었고 악기를 능수능란하게 연주했고 요즘도 불리는 찬송가를 지었고 시를 지어 사랑을 고백할 줄 알았고 여자처럼 예쁜 얼굴을 가졌고 특히 사냥이 끝난 뒤에 분홍빛 뺨은 너무나 예뻤고 탄탄한 허벅지는 일품이었고 키는 백 90 센티미터였고 하루에 여덟 내지 열 마리 말을 지치게 할 정도로 정력적인 사냥꾼이었고 바다를 유별나게 사랑해 현대 해군을 창시하기도 했다.

특히 내 마음을 끈 것은 그 시절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바야흐로 잉글랜드 땅에 착륙한 시기였단 점인데 헨리 8세야말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란 새 시대의 선구자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르네상스풍 새 시대의 선구자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르네상스적 인간이 되는 것이 학창시절 내 인생의 목표였다. 무참히 실패했지만.)

그는 우선 궁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인문주의자들을 식탁에 초대했다. 헨리 7세에게 많은 유산을 넘겨받은 그가 화려하게 꾸민 궁으로는 그리니치와 리치몬드, 윈저, 햄프턴 코트(햄프튼 코트는 원래 헨리 8세 통치 초창기의 실세인 친프랑스계 추기경 토마스 울시가 템즈강변 옛 수도원 자리에 왕궁에 버금가게 화려하게 지은 궁인데 나중에 자신의 세력이 위협받자 자발적으로 헨리 8세에게 바쳤다.) 등이 있다. 그는 왕궁과 대저택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그 궁에는 자연스럽게 귀족, 성직자, 관료, 시종등이 따라붙어 궁에 머무르는 사람의 숫자가 많을 때는 수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헨리 8세는 남들에게 부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온 학자들을 우대했다. 왕이 식사할 때는 인문주의자, 시인, 예술가들이 배석해 열띈 대화를 나눴고 베르길리우스같은 사람이 화제에 올랐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트로이 전쟁 영웅이자 로마 건설자인 아이네이아스의 유랑을 읊은 서사시 아이네이아스를 썼는데 자신의 위엄과 미래의 비전에 관심 있는 통치자라면 베르길리우스의 민족적 예언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을 것 같다 .베르길리우스는 죽을 때 자신의 그 글을 없애달라고 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취소 시켜버렸다.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일세도 베르길리우스의 번역에 관심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좀 더 부드럽게 청동으로 주조하겠지
그들이 숨 쉬는 조상들을, 나는 정말 믿을 수 있어
그리고 더욱 살아있는 형상을 대리석으로 빚어내지
아주 유창하게 논쟁하고 지침을 이용하여
천체의 진로를 정확하게 찾아내고
떠오르는 별들을 정확히 예언하겠지
로마여,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통치하는
당신의 힘을 기억하라-당신의 기예는 이런 것들이야
평정하고 법의 지배를 부과하며
정확한 자들을 용서하고, 오만한 자들을 전쟁에서 꺾는 것
(아이네이아스-피츠제럴드 번역본)


르네상스 시절의 통치자들은, 베르길리우스가 목동들과 그랬던 것처럼, 떡갈나무 그늘에 앉아 차가운 포도주를 마시며 고대시를 암송하며, 여름날 저녁에 뜨거운 목욕탕에서 나온 로마인들의 왕과 그 목욕탕 안에서 나그네에게 들어와 함께 놀기를 청했던 관능적이고 용감한 여인들의 쾌락을 맛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 햄프턴 코트의 광경. 햄프튼 코트는 원래 헨리 8세 통치 초창기의 실세인 친프랑스계 추기경 토마스 울시가 템즈강변 옛 수도원 자리에 왕궁에 버금가게 화려하게 지은 궁인데 나중에 자신의 세력이 위협받자 자발적으로 헨리 8세에게 바쳤다.

그런 식탁에 앉았던 사람 중에서도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의 우정은 유별났던 것 같다. 네델란드 출신 세계적 지식인이자 유목민이었던 에라스무스가 당대의 불온서적이자 초특급 베스트셀러, 풍자와 조롱 문학의 극치인 <우신예찬>을 쓴 곳은 바로 토머스 모어의 집이었고 그리고 우신 예찬도 토머스 모어 경에게 바치는 것으로 되어있다.

"나 (우매함) 없이는 이 삶 속에서 어느 집단도 어느 사회도 편안하게 유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결국 모든 것에 나 우매함이 첨가물로 양념되어 있지 않다면 ,정말이지 민중이 군주를, 주인이 하인을, 시녀가 주인마님을, 선생이 학생을, 친구가 친구를, 아내가 남편을, 식당 주인이 손님을, 동료가 동료를, 즉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우신예찬>)

이것을 펼치고 읽다 보면 어느 날은 멍청한 듯,눈꺼풀 한 번 깜박거리며 어리석은 듯 사는 것도 꽤 좋겠는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당시 궁정 전속 화가인 한스 홀바인이 그린 그림 속에서 에라스무스는 작은 체구의 수도사 같은 몸으로 두 손을 책에 얹고 있는데 그 책에 쓰여 있는 문구는 '헤라클레스의 과업'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헤라클레스의 과업의 의미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 같다.도저히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정신의 힘을 나누는 것이고, 조용하지만 막을 수 없는 이성의 흐름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고, 미래가 평화롭고 현명하게 피 흘리지 않고도 다가올 수 있다는 한 줄기 가능성 쪽에 승부를 던지는 것이고, 교육 받은 위대한 지도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고 사람들은 밤이 되면 편히 잠들고 학자들은 그들의 양초가 닳도록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또 기쁜 아침을 맞는 것이고. 도시들은 도서관으로 이뤄지고 세상은 책 속 세상처럼 고통이 없고 배신이 없는 것. 바로 르네상스의 아침.

▲ 궁정화가 였던 한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 책에 쓰여 있는 문구는 '헤라클레스의 과업'을 뜻하는 것이었다.
성서를 번역하고 어린이들의 예법책 같은 것을 지어 당대 유럽 최고의 지성,'세상의 빛'이란 별명을 가졌던 에라스무스는 여덟 살 난 헨리 8세를 처음 봤을 때 조숙한 천재라 불렀고 사람들은 그에게 헨리 8세를 영국의 옥타비아누스라 소개했으며 그렇다면 그런 왕이 다스리는 왕궁은 그냥 왕궁이 아니라 뮤즈의 왕궁일거라 에라스무스는 말했다. 그러나 반은 중세인이었고 반은 르네상스인이었던 헨리 8세의 세상은 피와 고통과 배신이 난무했고 왕궁도 뮤즈의 왕궁은 아니었다.

잉글랜드 에스파냐 왕국을 꿈꿨던 에스파냐 출신 왕비 캐서린은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의 세력 관계 축이 흔들흔들 하는 동안 유산과 사산을 반복하다 결국 여섯 번의 임신 중에 딸 메리 하나만 건졌다. 갓난장이였던 딸 메리가 세상에 나와 처음 뱉은 단어가 '사제님 사제님'이었단 건 여러모로 광신적인 그녀의 앞날과 관련해 의미심장하다. 프랑스와 동맹(그때 동맹을 맺은 프랑스의 왕 프랑시스 일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후원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헨리 8세를 질투하고 골탕 먹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말들-내 선한 젊은 잉글랜드 왕은 제 구실 못하는 나이 많은 아내를 만나 아들이 없다. 헨리 8세도 프랑시스 일세를 질투해 그는 체격이 좋은가? 허벅지는 튼튼한가? 라고 물은 뒤 여길 보게나 내 정강이는 정말 멋지지 않은가? 라고 말했단 일화는 유명하다)을 맺어 왕자도 낳지 못하는 나이든 에스파냐 아내를 애지중지 할 이유가 없었진 와중에 헨리 8세는 치명적인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녀는 놀랍게도, 무관심한 척 왕의 애를 태우며 자신은 함부로 정부로 불려지길 거부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되었다가 버려지느니, 결혼해서 왕비가 되거나 아무것도 안 될 운명 앞에 서 있었던 그녀의 이름은 앤 블린이었다.

그녀는 캐서린 왕비의 시녀였는데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남편에게 선사해야 할 가장 값비싸고 고귀한 지참금인 제 정절을 잃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그 뒤로 앤에 대한 헨리 8세의 사랑은 악마같이 강렬했다고 한다. 사랑에 빠진 헨리 8세는 자기 옷에다가 '차마 공개 선언하지 못한다'라는 구절을 공개적으로 쓰고 그리니치의 파티에 참석했고 앤은 폭풍우에 흔들리는 배에 올라탄 외로운 처녀 모양의 보석을 왕에게 선물했다. 누군가는 앤 불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그녀는 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눈빛이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남정네들은 당장이라고 무릎 꿇고 충절을 맹세할 지경이었다.' 역사가들은 앤이 아름다운 푸른 눈으로 헨리 8세를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라 헨리 8세에게 왕권을 이어나갈 아들을 약속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헨리 8세는 1527년에 이혼에 착수했고 이혼에 걸린 시간은 자그만치 6년이었다.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은 1812년 에스파냐에 있는 프랑스 장교의 행복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는데 그 표현은 당시의 헨리 8세에게도 딱 들어맞는다. '여러분을 매우 고통스럽게 하고 장래에도 여러분에게 맞서고자 하는 여자, 그런 여자를 끌어안는다면 일종의 달콤한 쾌락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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