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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이기적 인간이 권력을 가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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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이기적 인간이 권력을 가졌을 때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에서 점퍼가, 햄프튼 코트
이혼에 착수하기 전 헨리 8세의 손가락은 레위기 20장으로 향한다. 다산의 상징인 석류를 자기 자신의 상징으로 가졌던 왕비 캐서린이 유산과 사산을 반복했단 것과 그녀가 원래 헨리 8세의 형 아서의 아내였다는데 사실에 생각이 미쳐서인데 그가 어두운 마음으로 들여다봤던 레위기 20장의 내용은 이렇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니.'

그때 레위기 20장을 바탕으로 헨리 8세가 교황청에 보낸 이혼 서류는 지금도 바티칸 비밀 문서 보관실에 잘 보관되어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해서 이단 심판을 받게 된 그 서류들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때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를 매끈하게 처리하지 못한 울시가 쫓겨나고 뒤를 이어 왕을 보좌한 것이 토마스 모어였다. 헨리 8세가 시간만 질질 끄는 이혼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고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을 선언한 것은 이후 영국인의 정서나 정신적인 독립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토마스 모어는 앤 볼린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헨리 8세를 교회의 수장으로 하는 왕위 계승법의 선서를 거부하였다가 1535년에 참수되었다. 그가 죽으면서 한 농담은 유명하다.

"내가 안전하게 올라가도록 보살펴 주게. 내려올 때는 내가 알아서 내려 올테니까"

▲ 토마스 모어의 초상화. 그는 헨리 8세를 교회의 수장으로 하는 왕위 계승법의 선서를 거부하였다가 1535년에 참수되었다.
그리고 사형 집행대에선 턱수염을 옆으로 치우면서 "턱수염은 국왕에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으니까…"그의 마지막 말은 "국왕의 충직한 종복이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제일가는 종복"이었다. 뛰어난 법률가이자 학자였던 그는 전천후 인간. 사계절의 남자로 불렸는데 그가 쓴 <유토피아>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함께 아메리카로 건너간 라파엘 히슬로데이라는 사람이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고 베스푸치의 선원 중 한사람이 찾아낸 이상향의 섬에 머무르면서, 그 섬 생활에 깜짝 놀라고 신기해하면서 적어본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물론 소설이다)그 섬 사람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부자고 노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푼다. 그리고 놀랍게도 결혼 전에 남녀는 서로의 알몸을 먼저 봐야한다.그리고 실제로 지은 죄만큼이나 마음의 죄도 중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남는 시간엔 모두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며 보낸다. 법률가였지만 성직자도 꿈꿨던 그가 유럽의 이런 저런 모순과 죄악들을 보면서, 수도원이 아닌 신세계라는 신화적인 섬에서 이상적 공동체를 찾는 과정은 내 마음을 약간은 서글프게도 한다. 왜냐하면 16세기 신대륙의 발견 이후 외따로 떨어져 있던, 자기 고유의 논리를 갖고 있단 점에서 단순하고 바람직했던 공동체들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졌던가? 어쨌든 이후로도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평소의 염원과 불만, 안타까움, 속터짐을 모아 모아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을 펼쳤는데 유토피아 소설들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 하나만 소개하고 싶다. 라블레의 팡타그뤼엘에 나오는 건데,

"팡타그뤼엘리옹은 사람이 그것을 추구하고 노동하고 항해하고 투쟁하는 모든 것을 확실히 가져다 주면서 믿기 어려운 해방감을 선사하는 식물이다"

토마스 모어가 헨리 8세 시절 사람이라면 라블레는 프랑수와 일세 시절 사람이다. 그는 <팡타그뤼엘>이란 책을 지었는데 그 곳에서 고결한 정신을 가능하게 하는 식물이 바로 팡타그뤼엘리옹이다. 소설 후반부에는 수도원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 수도원의 유일한 계율은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이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유토피아는 일단 인간에 대한 믿음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데서 시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투쟁하는 가운데 얻는 믿기 어려운 해방감…'이 말이 참 좋다.

안타깝게 죽어간 토마스 모어에 대해선 역사적인 해석이 좀 분분하다. 법률가, 자상한 아버지, 딸 교육의 모범, 가정적인 남자, 고행대를 차고 다닌 종교적인 사내라는게 칭송하는 한 축이고 반대 의견은 유토피아 저자답지 않게 이교도를 탄압한 사람. 기회주의자, 튜더 왕조를 위해 역사 왜곡을 한 사람 등등이다. 그는 지금 성인으로 추대되어 있다.

▲ 토마스 모어의 책 <유토피아>에 삽입되어 있는 유토피아 지도.

영국 국교회를 선언함으로 교황청의 이혼 허가를 기다릴 필요 없이 마침내 결혼하게 된 헨리 8세가 앤 블린과의 신혼을 위해 화려하게 치장한 곳이 바로 햄프튼 코트이다. 그런데 앤 블린은 교회 개혁을 공공연히 지지했기 때문에 신교도들에게는 방패막이이자 가톨릭을 몰아낼 강력한 유일한 명분으로 칭송 받았지만 가톨릭 측에게는 악마, 암호랑이, 악행의 주범으로 보였다. 캐서린 왕비의 모국 스페인 대사는 앤 블린을 잉글랜드의 메살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로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워 죽임을 당함)나 아그리피나 (클라디우스 황제의 아들 대신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늙은 황제를 유혹한 뒤 독살한 야심가. 네로의 엄마)로 불렀는데 그녀의 삶에서 자세히 기록으로 남은 것은 달랑 런던탑 최후의 17일뿐이라고 한다. 그녀의 출생 연도도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아서 죽을 때 그녀 나이 서른다섯도 추측컨대 그렇다는 거다.

앤 블린이 런던탑에서 참수되던 날 헨리 8세의 세 번째 아내인 새 신부 제인 시모어는 대부분의 시간을 웨딩드레스를 준비하며 보냈다. 제인 시모어와 헨리 8세는 앤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햄프튼 코트에서 약혼식을 치뤘고 그리고 드디어 제인 시모어는 1537년 10월 12일 새벽 2시에 햄프튼 코트에서 아들, 훗날의 에드워드 6세를 낳았다. 평생 남 앞에서 단 한번만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에드워드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부담감이 심했었다고 한다. (에드워드 6세는 마크 트웨인이 쓴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이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철저하게 격리되어 보호받던 그가 거지가 될 가능성은 그러니까 달이 지구로 떨어질 정도의 확률보다 낮으면 낮지 높지 않았을 것 같다) 금빛 요람에 누워있던 에드워드 6세는 이곳의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리고 엄마 제인 시모어는 이곳에서 산욕열로 죽어 윈저 궁에 매장 되었다.(그녀의 초상화를 윈저궁 왕실 컬렉션 속에 있다)그녀의 묘비명은 '여기 불사조가 잠들어 있으니 그 죽음으로 또 다른 불사조가 생명을 얻었도다'라는 라틴어 문구이다. 이후로도 세 차례 더 결혼한 헨리 8세의 유언은 제인 시모어 옆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섯 왕비 중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헨리 8세는 아마 그녀의 이름을 댈 것 같다. 헨리 8세는 어느날 햄프튼 코트에서의 왕가의 하루 같은 제목을 달고 자신과 아내, 세 명의 자녀를 그리게 했는데 자신은 옥좌에 앉고 에드워드는 무릎에 그리고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양 옆에 서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왕비는 이미 죽은 제인 시모어였으니 그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헨리 8세가 상상한 가정의 모습, 가정의 꿈같은 것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 헨리 8세의 가족 그림. 헨리의 옆에 있는 왕비는 이미 죽은 제인 시모어였다.

제인 시모어가 죽고 나서 헨리 8세가 네 번째 신부를 구할 때 그의 명성은 전 유럽에 걸쳐 아내 잡아먹는 사람 정도로 떨어져 있어서 결혼이 쉽지 않았다. 어렵게 구한 신부인 네델란드인인 네 번째 아내 안느 클레브스와의 결혼 생활은 너무나 짦았던 것으로 다시 입방아에 올랐는데 그 짧았던 결혼의 이유를 당시 속요는 헨리 8세가 미리 본 안느의 초상화의 모습과 실물이 너무 달라서 분통 터져했다는 걸로 암시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녀가 먼 길을 오지 않았다면, 백성들이 마련해 준 성대한 환영식과 열렬한 환호가 없었다면, 제후가 황제와 프랑스 왕에게로 돌아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만 없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이 결혼을 취소할거요, 너무 늦었다는게 그저 통탄스러울 뿐이요'

그는 안느 클레브스의 지독한 악취 (암내)를 참을 수 없어서 그녀를 처녀로 남겨두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는데 안느는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자신과 헨리 8세의 잠자리를 두고 시녀들이 쑥덕거리는 것도 몰랐던 순진한 아내였다. 훗날 그녀가 아주 순순히 이혼에 응하자 헨리 8세는 존귀한 오누이처럼 지내자고 그녀에게 청했고 그녀가 일생동안 편안히 살 수 있도록 자유의 문을 열어 주었다. 많은 돈으로. 그리고 그녀가 처녀라고 공표함으로.

▲ 헨리8세의 초상화.
다섯 번째 아내인 캐서린 하워드는 앤 블린의 사촌이었고 가톨릭 신자였다. 왕과 그녀가 처음 만난 것도 가톨릭측의 치밀한 전략의 승리였다.그녀는 춤과 옷에 관심이 많고 정치엔 관심이 없는 그저 밝고 유쾌한 사람이었다는데 종교 개혁을 위해 왕비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한 세력들은, 그녀를 결혼 전에는 가벼운 행실로 창녀나 다름없었고 결혼 후에도 그 버릇을 못 버려서 몸의 죄인 간통죄를 지은 여자로 몰아붙였다. 캐서린 하워드가 왕에게 보낸 사면 청원서에 따르면 '어린 소녀였던 나는 혼란스런 시절에 몸의 은밀한 부위를 매만짐당했습니다'라거나 혹은 '완전히 다 벗은 건 아니고 긴 양말은 신었습니다'같은 표현들이 나온다. 당시의 헨리8세는 그녀를 가시 없는 장미라 부르며 극진히 사랑했었는데, 고도 비만으로 특수 제작된 갑옷만 입을 수 있었던 허리둘레 173센티미터의 머리카락 빠지는 중년 남자가 된 그에게 십대 아내의 배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와 비애를 안겨줬던 것 같다. 이미 병들고 노쇠한 몸이 된 헨리 8세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확신 없이 홀로 남겨지게 된 셈인데 그래서 캐서린 하워드의 참수를 지켜본 누군가는 이 비극의 결론은 슬픔이 아니라 추문으로 가득할 것이다 라고 단언했다.이때도 프랑수와 일세는 편지를 보낸다.

'내 선한 형제여 부디 불쾌함을 버리고 저처럼 현명하게 대처하십시오.여자의 천박함은 남자의 명예를 결코 꺽지 못하니까요.'

사실 프랑시스 일세야말로 당시 유럽 최고의 바람둥이였는데 그에게 위로를 받는 헨리 8세의 약오른 심정이 손에 잡힐 듯하다.머지않아 맹활약을 할 세익스피라면 이런 소네트를 지었을 것이다.

내 애인이 자기는 진실의 화신이라고 말할 때
거짓말하는 줄 알면서도 나는 믿노라
이 세상의 기교있는 거짓을 모르는 어수룩한 젊은이로
그녀가 나를 생각하게 하도록
내 한창 시절이 지났음을 그녀가 알고 있는데도
그녀가 나를 젊게 여긴다고 헛된 생각을 하면서
나는 바보인양 그녀의 거짓말을 믿노라…


▲ 햄프튼 코트의 전경.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드 참수 이후 열 여덟달 뒤에 여섯 번째 결혼식을 햄프튼 코트의 왕비 내실에서 올렸다. 여섯 번째 왕비 캐서린 파야말로 헨리 8세를 파라오를 누른 모세라고 표현한 아내였다. 박학다식하고 학식이 높았던 그녀는 헨리8세의 유별난 세 자녀를 모아서 가정다운 모습을 만들어 주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메리도 엘리자베스도 그녀를 좋아했고 에드워드 왕자는 자신의 길지 않은 생애에서 가장 따뜻하고 자상했던 사람으로 그녀를 꼽았다.

그래서 영국의 베르사이유란 별명을 가진 햄프튼 코트의 정원에 앉아서 튜터 왕조 특유의 박공지붕, 굴뚝을 보고 있자면 하루 여덞 마리의 말을 갈아치우며 달릴 수 있었다는 건강한 허벅지의 헨리 8세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며 앤 블린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배를 자랑스레 내밀며 점성술사와 예언가들에게 아기의 성별을 알아내라고 다그치는 것, 제인 시모어가 젖은 머리칼로 거대한 침대에 누워서 에드워드 왕자를 낳은 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 그리고 그녀가 산욕열로 죽어가는 것, 조심성 없는 왕비 캐서린 하워드가 간통죄의 혐의를 받고 그녀의 보석을 그대로 남겨둔 채 황망하게 쫓겨나는 것, 왕과 가족들이 수행단을 이끌고 윈저성으로 떠나는 것, 왕과 가족들이 외교 사절단을 맞아 2백 60가지의 코스 요리를 먹는 것, 엘리자베스 여왕이 과시적으로 방을 금은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그 누구보다도 어려운 동작의 갤리어드 춤을 추는 것을 차례차례 상상해볼 수 있다. 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아내들의 사연을 아는 것은 바로 16세기 중반에 대해 아는 것인데 헨리 8세 아내들의 결혼과 죽음은 성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것이기도 했다. 헨리 8세가 결혼하는 동안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 국교와 가톨릭은 바다의 밀물처럼 출렁출렁 왔다 갔다 하며 서로 으르렁거리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햄프튼 코트에서 남자와 여자는 사랑도 했지만 속임수도 썼고 정열에 불타오르기도 했지만 복잡한 계산도 했다. 이런 떠들썩한 잔치의 주인은 늘 헨리 8세였다.

▲영국 드라마 <튜더스-천년의 스캔들>의 포스터 헨리8세는 엑스등급 정치 스릴러의 주인공 같은 삶 때문에 식지 않은 관심과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렇지만 그 시절엔 어느 날 밤 놀라운 불꽃놀이가 벌어지면 사람들은 "봐! 우리 왕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나봐" 골목길을 빙빙 돌며 춤을 췄을 것이다. 그들은 헨리 8세에게서 힘과 권력,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 종교 개혁, 원하는 것을 기어이 취하고야 마는 16세기형 영웅, 잠자리에서 깨어나 광폭해지는 사자의 모습과 그 사자가 다름 아닌 자신의 종족을 이을 어린 새끼를 핏속까지 원하는 모습을 봤다. 누군가 헨리 8세는 당시 사람들에게 군주이자 교황, 아버지이자 정통성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당대에는 아랫사람으로부터 존경과 복종과 절대 권력을 받았고 오늘날에는 엑스등급 정치 스릴러의 주인공 같은 삶 때문에 식지 않은 관심과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영국 사람이 아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그는 종교 개혁을 완성시킨 사람, 섬나라를 로마 교황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한 사람으로 사랑받는다고 하지만 교회 개혁 보다는 오히려 수도원 재산의 몰수에 더 관심이 많았던 면도 있는데다가 (수도원의 몰락은 부랑자를 많이 낳았다. 수도원에서 몰수한 재산으로 부를 축적한 지주 계급이 양을 치기 위해 농지를 목초지로 전환해 농민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 유리걸식하게 되었다.수도원 토지 재분배 사업으로 왕은 관료조직을 더욱 강한 끈으로 묶어 놓아 관료 조직 역시 종교 개혁을 반대하지 않았다.헨리 8세가 손에 끼고 있었다는 커다란 루비 반지는 12세기 이래 켄터베리 베켓 사당을 장식했던 것이다) 그를 보면 이기적인 사람이 권력을 가질 경우 권력이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는 않는게 확실하단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는 많은 것을 가졌고 누렸고 그만큼 상처도 받았지만 내적으로 성장하지도 않았고 위대한 내면의 한 표상으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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