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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모순에 맞서 싸운 '개혁가' 나이팅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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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모순에 맞서 싸운 '개혁가' 나이팅게일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에서 점퍼가, 세인트 폴 대성당
조수아 레이놀즈도 있지만 세인트 폴 대성당 묘역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넬슨이다. 그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 한쪽 눈과 한쪽 팔 없이 서 있다. 넬슨은 1794년 지중해 작전에서 오른쪽 시력을 잃었고 1797년에 오른쪽 팔을 잃었다. 눈을 잃고 팔을 잃으면서도 자신이 참여한 모든 주요 해전을 승리로 이끈 그는, 살아있을 때 이미 신화적 영웅이 되어 있었고 1798년 나일강 전투의 승리로 확고부동한 국민 영웅이 되었다.

▲ 넬슨 제독의 초상화. 그는, 살아있을 때 이미 신화적 영웅이 되어 있었다.
나일강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의 일전을 앞두고 제국의 흥망을 책임질 유명한 배는, 영국인의 성스러운 유골이라고도 불린 빅토리 호였다. 빅토리 호는 승무원 850명 승선 가능. 4개월간 해상 체류 가능한 물과 식량 탑재 가능, 3년간 사용할 수 있는 화약과 포탄 적재 가능한 3층짜리 배였다. 당시 빅토리 호에 승선한 영국 해군은 잘 훈련된 정예 부대가 전혀 아니었고 부랑자 처리법에 의해 선술집에서 여인숙에서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강제 징집된 병사들이었다. 위풍당당한 빅토리 호를 움직인 선원들의 생활은 끔찍했는데 넬슨은 영국 선원들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노력한 당시 둘 밖에 없던 선장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 휘하의 선장들을 형제단이라고 불렀다. 교전 중 부상당한 선원들은 마취제가 없어서 기절한 상태에서 아니면 마구 들이부운 럼주에 취한 상태에서 수술을 당했다. 부상자들이 있는 방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있었는데 그건 부상병들이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넬슨 역시 부상 당했을 때 같은 방식으로 치료 받았다.

새로운 알렉산더 대왕이 되는게 꿈이었던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들어가 맘루크 정부랑 싸웠는데 그때 그가 한 유명한 말이 '병사들이여,4000년의 세월이 여러분을 이 피라미드에서 내려다보고 있다'였다. 나폴레옹과의 결전을 앞둔 넬슨이 한 유명한 말은 '돌아올 때는 머리에 월계수를 쓰거나 삼나무 가지(애도의 상징)를 덮고 오겠습니다'였다.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이 싸운 나일강 전투의 승리자는 넬슨이었다. 나일강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졌다는 소문은 전 유럽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는데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나폴레옹도 패배할 수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처음 알아서였다.

그런데 나일강 전투 후의 넬슨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내 말고 다른 여자랑, 그것도 남편이 있는 여자랑 사랑에 빠진 것이다. 나폴레옹에게 조세핀이 있는 것처럼, 넬슨에게 엠마가 생긴 것이다. 내가 세인트 폴 대성당과 트라팔가 광장에 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던 넬슨은 제독 넬슨이라기보다는 평범한 한 남자로서의 넬슨이었다. 그 남자는 그녀를 사랑함으로써 살아있는 동안에도 많은 것을 잃었고 후대의 평판도 그르치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그녀를 끝까지 사랑했다. 그는 트라팔가 전투에서 죽었는데 빅토리 호로 날아가 보면 이럴 것 같다.

▲ 엠마 해밀턴의 초상화. 넬슨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엠마 해밀턴은 나폴리에서 매력적인 구경거리였다. 특히 그녀의 앉는 자세는 자세 그 자체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그녀는 한쪽 손을 턱에 바치고 한쪽 발은 어딘가에 올려놓고 몸을 앞으로 숙인 폼페이 벽화 속 여인 같은 고전적 자세를 취해 나폴리 궁정에서 찬사를 끌어냈다. 그녀의 긴 곱슬거리는 머리,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드레스의 곡선. 방종한 웃음, 격의 없는 말투, 친밀한 위로와 속삭임. 넬슨과 그녀는 막 발굴된 폼페이의 유적과 베수비오 화산 구릉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넬슨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라팔가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가면 그리운 엠마를 만날 수 있으련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넬슨은 14미터 앞에서 날아온 머스킷 총에 척추를 맞고 말았다. 넬슨은 마지막 유언을 생각할 때가 되자 엠마가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엠마와 그 사이에 낳은 딸 호레이샤를 돌봐줄 것인가? 배의 돛으로 만든 관은 늘 배에 실려 있었다. 죽음에 임박하자 그는 따스한 인간적인 접촉이 그리웠고 옆에 있던 장교에게 키스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뺨에 키스를 받자 이렇게 말했다.'나는 여한이 없다. 신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노라''

넬슨은 죽었지만 트라팔가 전투에서 영국은 크게 이겼다. 프랑스 -스페인 연합 함대의 스물 세척 중 스무 척이 격침되었고 영국 함대는 한 대의 손실도 없었다. 트라팔가 전투 후 영국은 한 세기 동안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넬슨의 장례식은 이랬다.

'거대한 관중이 완벽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시신을 실은 마차가 나타난 순간에는 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가 모자를 벗었다. 계획적으로 진행된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고인에게 존경을 표하려는 충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장송곡이 조용히 연주되는 틈틈이 북소리나 대포 소리가 들려왔다.'

나폴레옹은 훗날 나의 모든 계획은 영국 함대에 의해 좌절되었소.라고 말했는데 나폴레옹이 유배 떠나던 길에 읽어달라고 부탁한 책이 바로 넬슨 전기였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누구에게 왜 졌는지 명확히 알고 싶어했던 것 같다.

▲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데르>

넬슨 가까이 있는 또 하나의 무덤의 주인공은 화가 터너이다. 터너는 1851년에 죽었는데 넬슨처럼 화려한 장례식 후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살아있을 때 대단한 사랑을 받았던 화가였다. 터너는 런던의 코벤트 가든 구역에서 자랐는데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푸주한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죽었다.(나는 그 이야기를 뮤지컬 <스위니 토드>를 보던 날 들었기 때문에 그가 스위니 토드의 아들로 나오는 꿈을 꿨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왕립 아카데미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최고 목표로 생각한 현실주의자로 자랐는데 20대에 이미 그 꿈을 이뤘다. 그는 여행을 좋아했고 특히 알프스에 매료되었다. 68세의 나이에 해상의 눈보라가 어떤 것인지 보기 위해서 영국 해협을 건너는 정기선의 돛대에 몸을 묶고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다를 건너 '눈보라'란 그림을 그린 일화는 그의 성격과 함께 그의 관심사도 말해준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컸던 그는 산업 혁명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거룻배가 아니라 증기선, 기차(비, 증기, 그리고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기차역, 산업화된 도시를 그렸다. 터너는 넬슨에 관련된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트라팔가 전투,빅토리의 뒤 돛대 우현 활대끝에서 본 광경>은 죽음의 총탄이 발사 된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고 <트라팔가에서 돌아오는 빅토리>은 넬슨의 시신을 실은 배가 와이트 섬을 지나오는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가 그린 <전함 테메데르>의 사연은 이렇다. 테메데르는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넬슨의 빅토리 호를 구해낸 3층짜리 거대한 떡갈나무 전함이었는데 이 위대한 전함은 증기와 철의 시대가 되자 쓸모없게 되어서 폐선처리 되게 되었다. 그래서 두 척의 증기 예인선이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이 배를 55마일에 걸쳐 끌고 가게 되었는데 터너는 바로 끌려가는 날의 테메데르를 그렸다. 그림 속에서 오른편에는 해가 지고 있는데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은 아니라하더라도 배의 고통, 배의 쓸쓸함, 배의 애처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터너는 다른 의미로 영국민을 뭉치게 한 것 같다. 그것은 자연과 세상을 보는 하나의 시각을 준 건데 그의 그림 속의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낭만과 애수에 사로잡혀 있을 틈이 없이 급격하게 변하는 자연과 극적인 세상의 소용돌이와 모호함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 같다. 자연은 그에게나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나 낭만적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고 오히려 같이 변화를 겪어내야 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의 유언은 자신의 작품 중 두 점을 국립미술관에 로랭의 작품가 같이 나란히 전시해달라는 것이었다.(국립미술관에 가봤더니 진짜였다) 1978년에는 터너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동상. 그는 아직도 임무 수행 중이다.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의 운명도 늘 변함없는 존경과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숭배되었다,잊혀졌다,살아났다,욕먹다를 반복했다. 국가의 위기 상황, 뭔가 구심점이 필요한 순간, 용기를 통한 성공이 필요한 순간에 그는 주목을 받았다. 이를테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이런 식의 말을 했다

"넬슨 기념비가 우리를 내려다보듯, 과거의 영웅 전사들도 우리를 지켜보면서 우리 섬나라 국민들이 그 기상을 잃었다고 혹은 당신들이 지난 세기에 확립해놓은 본보기가 사라져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국의 시대에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저질러진 악행과 관련되면 넬슨은 브리타니아의 전쟁신으로 해석됐다. 넬슨은 그냥 넬슨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화신으로 줄곧 해석되어 왔지만 나에게는 사랑 때문에 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린 넬슨의 모습이 더 강하게 떠오른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 유명한 '나는 의무를 다하였다'였다. 하지만 인간의 의무에 과연 끝이 있는 것일까? 죽은 뒤라도…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은 아직도 의무 수행 중이다. 하지만 사랑의 의무라면, 거기서라면 그에게 쉼이 있길….

▲ 나이팅게일. 그녀는 야전 병원의 조직 개혁에 앞장섰고 끝없이 편지를 보내며 상사들을 괴롭혀, 고위 관리들은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사람의 좀 색다른 전쟁영웅의 묘가 세인트 폴 대성당에 있다. 나이팅게일이다. 나이팅게일은 어려서부터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지체 높은 집안의 반대를 물리치고 서른세살이란 나이에 비교적 늦게 간호사 수련 과정을 밟았은데 처음에는 런던의 작은 개인 병원에서 일했고 그 때 새로운 근무 수칙을 만들어서 의료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래서 크림 전쟁 야전 병원 책임자로까지 발탁 되었는데 그녀가 특히 명성을 끌었던 것은 관료들의 나태와 무기력을 단호하게 비판하는 개혁가로서의 자세였다.

하루에 꼬박 스무 시간씩 서있어야 할 정도로 바쁜 날도 있었다는 그녀의 일화는 등불을 든 숙녀, 병사들이 그림자에 키스하는 여성이란 전설을 낳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전쟁터에서 무엇에 가장 절망했었던가 하는 점인 것 같다. 그녀는 주사를 잘 놓아서나 부상자들에게 친절하게 굴어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부상자들의 고통만큼이나 야전 병원을 관리하는 육군의 무능과 무관심에 절망했다. 그녀는 야전 병원의 조직 개혁에 앞장섰고 끝없이 편지를 보내며 상사들을 괴롭혀, 고위 관리들은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크림 전쟁에서 총알에 쓰러진 군인보다 전염병과 불결한 위생 환경 때문에 죽은 군인의 수가 많았고 나이팅게일도 열병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었던 걸 생각하면 그녀가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개혁에 매달렸단 걸 알 수 있다.

다행히 그녀는 장수했다. 그녀가 죽은 나이는 90살,1910년의 일인데 크림 전쟁 이후에도 그녀의 평생 목표는 의료 개혁이었다. 과학 기술의 눈부신 진보와 오용, 음모적으로 진행되는 정치와 전쟁 이데올로기에서 배제되어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행할 수 있는 영웅적인 행동은 넬슨이 아니라 나이팅게일이 힌트를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과 시간의 저울이란 묘지 앞에서 사소한 열정과 근심사 일랑 잊어버리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모순에 가슴으로 항의하는 것,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 밤마다 평균 160대의 독일 폭격기가 고성능 폭탄, 소이탄을 쏟아 부으며 런던 상공을 공격하던 세계대전 중에 허버트 메이슨의 카메라는 공습 다음날의 세인트 폴 돔을 찍었다.

런던 대화재처럼 잔인한 또 다른 시대에, 세인프 폴 대성당은 다시 한번 영국 역사에 등장한다. 1940년 12월 29일~30일 사이에 찍힌 사진 속에서다.(공교롭게도 그날을 런던의 제 2차 대화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밤마다 평균 160대의 독일 폭격기가 고성능 폭탄, 소이탄을 쏟아 부으며 런던 상공을 공격하던 세계대전 중에 허버트 메이슨의 카메라는 공습 다음날의 세인트 폴 돔을 찍었다. 그 사진 속에서 돔은 연기와 불꽃 속에서도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사진은 전 세계에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읽혔다. 런던은 침착하고 꿋꿋하게 계속되는 폭격을 견뎌내고 있다. 런던은 결코 나치즘에 굴복하거나 나치와 동맹을 맺지 않을 것임을 당당하게 알리는 바이다. 그날 런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도 다른 의미로 읽혔을 거란 느낌이 든다. 밤마다 거리에서 마주친 행인들이 서로 굿 나잇, 행운을 빌어요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적어도 오늘 밤엔 죽지 않기를 바래요 하고 인사를 나누던 그 시절에, 연기 속의 세인트 폴은 결코 죽지 않는 희망의 이미지를 줬을 것이다. (그때 포츠머스에 있던 넬슨의 배 빅토리 역시 독일군에게 폭격을 당했지만 심각한 손상은 없었다는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다)

이런 런던 대공습 기간에 우연히 런던에 있다가 급작스런 공습을 만나 대피소까지 같이 들어가게 된 세계적인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이다. 대피소 안에서는 "누군가 귀를 막으세요!"하고 솜을 나눠주었고 목사는 축음기와 음반을 가져와 탁자에 놓고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며 음악을 틀어줬는데 사람들은 솜으로 막은 귀로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여러분 각자 종이에 이름을 써서 호주머니에 간직해주세요. 이름과 주소를 쓰세요!"라고 외쳤는데 그때 니코스 카잔차키스 앞에는 젊은 여성이 카키색 군복을 입은 청년의 손을 말없이 꼭 쥐고 있었다. 누군가 옆에서 '저들은 신혼부부야'라고 속삭여줬다. '저들은 신혼여행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있는거야…' 그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단테를 호주머니에 넣어오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그는 '단테의 연옥의 마지막 노랠 들을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봄날의 부드러움과 꽃으로 둘러싸인 루치아, 녹색 풀밭에서 춤추는 여자들의 희디흰 다리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만약 내 삶의 순회가 여기 이 자리에서 끝난다 해도 그런대로 괜찮은 훌륭한 결말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누군가 '적기들이 지나갔다'라는 는 말을 외치는 것을 듣고 벌떡 일어나 사람들 속에 섞여 급히 달려 나가는데 그때 그의 머리 속에 다시 한번 단테의 마지막 시구가 떠올랐다. 그 마지막 싯구는,'다시 별들을 보라!'였다.

그 때 적기가 지나간 뒤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사람들은 런던의 별이 그렇게나 빛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빛나는 밤 총총한 하늘이 저기 냉정하게 있구나.

▲ 세인트 폴 대성당을 들어가는 사람은 259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 whispering gallery(속삭임의 회랑)에 가서 잠시 앉아보길 권한다.

세인트 폴 대성당을 들어가는 사람은 단체 입장시간을 기다려 스톤갤러리와 골든 갤러리에 꼭 올라가보길 권한다. 259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 whispering gallery (속삭임의 회랑)에 가서 잠시 앉아보길 권한다. 그 곳에선 소리의 공명 현상 때문에 아래쪽의 아주 조그만 소리도 위쪽까지 들린다.1981년 다이애나와 찰스 왕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어떤 사람은 그 공명 현상 때문에 뉴질랜드 출신 성악가 키리테 카나와가 불렀던 헨델의 '빛나는 세람핌(천사)'을 황홀하게 들었다고 한다. 그 속에선 소리의 공명 현상 때문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도 나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막혀 있던 공간을 돌던 나의 목소리의 파동이 저 높은 곳의 타원형 돔의 천장 벽에 부딪혀 건너편으로 날아간다는 것. 그 순간의 나에겐 그것은 화해의 이미지였다. 소리의 파동을 따라 반사되어 날아간 내 마음이 무사히 전달되는 것을 보았으니까.

돔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보이는 것, 그건 바로 한도 끝도 없는 과밀 런던이었다. 빙글빙글 빙글 돌며 돔을 구경할 때 돔과 나는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눴다.

-삶의 애착은 왜 생기는 걸까?

그건 삶이 그만큼 고되기 때문이지

-저 밑의 많은 건물들이 보여주는 걸까?

끝없이 너를 단련시키고 발견하게 하는 너만의 성소를 찾아내라는 거지. 그래서 어디서나 광휘를 발휘하라는 거지.


높은 곳에 오르니 나폴레옹의 말이 잠시 생각났다. 그는 "나는 그냥 이 시대 안으로 던져진 바윗덩어리 일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삶의 어떤 고단함도 마다하지 않았다.

▲ 여성 가이드는 손을 높이 들어 높이 110미터, 베드로 성당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그 돔을 가리켰는데 우리의 열여섯 사내들의 고개는 아무도 그녀의 손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세인트 폴 대성당 마당에 서있는 것은 앤여왕의 동상이다. 내가 성당 밖으로 나오니 그 앤 여왕 동상 옆에는 중유럽의 얼굴이 붉고 어깨가 떡 벌어진, 맥주와 세월의 합성 작용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를 가진 노동자 계층의 중년 사내 열 여섯 명이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아래 계단에는 블라우스 단추를 과감하게 네 개나 풀어놓은 여성 가이드가 돔의 가장 높은 지점인 골든 갤러리에 대해 침을 튀기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여성 가이드는 손을 높이 들어 높이 110미터, 베드로 성당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그 돔을 가리켰는데 우리의 열여섯 사내들의 고개는 아무도 그녀의 손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지상의 거대한 돔, 그녀의 가슴에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천국이 바로 여기 있다는 듯. 지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뭐 다른 거대한 돔이 저 높은 곳에 필요하냐는 듯. 십분 이해한 나는 기도헸다. 지상의 형제들을 위해 상쾌한 바람 한자락 불어 옷섶이 살짝 흔들리기를.

우리 지상의 형제들은 감히 삶을 바꿀 수는 없어도 삶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어느 바람 불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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