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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피지에 인도인이 건너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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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 피지에 인도인이 건너간 까닭은 [정혜윤의 날아다니는 여행기] 런던에서 점퍼가,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내 가슴속에는 하나의 완성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수년 전 겨울에 나는 피지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 여행의 첫 며칠은 내 여행 중 가장 즐거웠던 한때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바다는 정말 아름다웠고 푸르렀다. 열대의 난은 조지아 오키프의 꽃처럼 노골적으로 여성적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의 낡은 철도 길을 걸어보는 것도 꼭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걷는 것처럼 이국적으로 좋았다. 나는 백만 마리 모기에 물리는 와중에, 원주민 마을의 밤 파티에 참석해 코코넛 잎사귀에 싸서 땅에 파묻고 구운 바나나를 열기가 식기도 전에 호호 불면서 먹어 보았고 그 연기가 하늘에 올라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추장이 권해주는 피지 전통주 카바도 마셔 보았고 그 술엔 마약 성분이 조금 섞여 있다는 말을 듣고는 "난 이미 마약의 효력이 나타났어요. 난 경제적인 여자거든요. 보세요" 라고 외치고는 발딱 일어나 큰 나무로 막 달려가 마을의 까만 사내 녀석들과 과격한 춤을 추면서 놀아 보기도 했다. 통가나 사모아 같은 섬 이름도 들었다. 저기 어디로 배를 타고 나가면 공항이 하나 있는 어떤 섬에 가게 되는데 그 섬의 입국장 안으로는 오로지 내국인만 들어갈 수 있어서 아직까지 그 섬을 본 외국인은 없단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그 섬의 이름은 '얌'이라고 했다. 나는 '얌'의 입국장 문 너머로는 어떤 세계가 있을지 피지 밤바다를 보면서 궁금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로 카레를 먹게 되었는데 그 카레는 내가 먹어본 카레 중에서 제일 기름기 많은 이상야릇한 맛을 갖고 있었다. 불만에 가득 차 고개를 들어보니 그제야 인도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지천으로 깔려 있단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지치고 가난해 보였다. 피지의 인도인은 하와이의 한국인, 덴마크의 에스키모처럼 내 마음 속에 애수를 불러 일으켰다. 나는 카레 접시를 가리키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고는 '이런 잊을 수 없는 근사한 음식을 하는 당신들은 언제 여기에 왜 왔나요?'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대답했다. 빅토리아 시대. 피지에서 인도인의 입으로 듣는 빅토리아. 그 대답은 그대로 질문이 되었다. 왜?

▲ 1820년부터 1920년 사이에 160만에 이르는 인도인들이 피지의 제당 공장에서 카리브해, 아프리카, 인도양, 태평양 등지까지 영국의 값싼 제국 노동력으로 파견되었다. ⓒPacificFocus.org

1820년부터 1920년 사이에 160만에 이르는 인도인들이 피지의 제당 공장에서 카리브해, 아프리카, 인도양, 태평양 등지까지 영국의 값싼 제국 노동력으로 파견되었다. 인도인은 빅토리아 시대 영 제국의 노동력의 반석, 군대의 근간이었다.1877년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여황제가 되었다. 피지에 첫 인도인이 노동자로 도착한 해는 1912년이었다. 그들은 하와이로 떠난 인천의 교회 신도들처럼 큰 배를 타고 배 멀미와 불안감에 시달리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피지로 갔다. 그리고 하와이의 한국인처럼 사탕수수 농장의 처절한 노동자가 되었다. 피지의 인도인들은 6년 정도의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피지에 그냥 남아 살았다. 그 결과로 빅토리아 여왕의 거대한 대리석 동상이 철거되어 동물원 뒤뜰에 방치된 지 수십 년이 흘렀건만 나는 정체 불명 맛의 인도 카레를 쓴 눈물을 흘리며 남태평양의 햇살 아래 먹게 된 것이다. 그래도 질문은 남았다. 빅토리아 시대는 어떤 시대였기에 인도인들을 미지의 나라로 떠나 보냈나? 만약 내가 피지의 인도인과 사탕수수 나무 그늘아래 만나 이야길 나누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고향 마을에 대해 뭐라고 말을 했을까?

▲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은 바로 그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 때 세워졌다.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은 바로 그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 때 세워졌다. 런던을 여행하면 수도 없이 듣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851년의 런던 만국 박람회에 대한 것이다. 당시 하이드 파크에 세워진 크리스털 팰리스(수정궁)는 건축학의 개가로 불렸다. 그 건물은 투명한 유리를 철근이 에워싸는 구조물이었다는데 길이가 1851피트였다. 1300여개의 기업이 참가해 연발 권총, 의치같은 당대의 혁신적인 출품작들을 선보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독일 출신의 앨버트 공이 국민의 환심을 얻기 위해 특별히 심혈을 기울였다는 그 박람회 오프닝 날인 5월1일에 여왕은 오늘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날이라고 선언했다. 그 박람회는 부와 기술의 진보의 상징이었다.

그 박람회의 구경꾼 중에는 샬롯 브론테도 있었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있었다. 샬롯 브론테는 박람회에 후한 점수를 주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샬롯 브론테는 "그곳은 놀라운 곳이다. 한 가지 한 가지 물건들이 대단한 것보다 모든 물건들이 모여져 있는 특이한 방식이 대단하다. 기관차와 보일러가 가득한 방, 마차와 마구가 모여 있는 방, 금은 세공품,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모여 있는 방…. 수정궁은 일종의 바자 또는 시장인데 동방의 마법사가 만들어 냈음직한 그런 바자요. 시장이다.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이 많은 값진 물건들을 모아오는 것만도 마술이 아니고는 안 될 일인데 그것을 진열하는데도 초자연적 능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복도를 매운 인파도 어떤 힘에 눌린 듯 큰 소리 한번 못 냈다. 거기서 들리는 사람들의 나지막한 웅성거림은 멀리서 듣는 바다소리 같았다"라고 썼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언짢음도 역으로 생각하면 수정궁 박람회의 위풍당당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당당하고 환희에 찬 듯이 위세가 있기 때문에 숨이 막힌다. "지구 전역에서 단 한 가지 생각을 가지고 온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거대한 궁전에서 조용히 끈기 있게 입 다물고 모여 있는 모습은 어딘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풍경이나 바빌론의 풍경과 같으며 눈앞에 실현된 묵시록의 예언을 보는 것 같다. 내가 무대 장치에 현 되었다 치자. 그러나 그 거대한 장치를 만들어낸 강력한 정신은 얼마나 오만하며 얼마나 자기 승리와 개선을 확신하고 있는가. 그 정신의 오만함, 완고함, 그리고 맹목에 몸을 떨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 1851년 런던의 만국 박람회 당시 하이드 파크에 세워진 크리스털 팰리스(수정궁)은 건축학의 개가로 불렸다.

런던 박람회는 전 세계적인 박람회 붐을 일으켰다.(그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에서의 유명한 이야기꺼리는 브라질의 황제 부처가 공업제품을 앞에 두고 왕관을 쓴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왕과 런던 사람들은 사실 런던 물건들의 디자인이 다른 나라 것들에 비해 좀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866년,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을 과학박물관 옆에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만국 박람회의 전시품들과 영국 왕실 소장품들을 합쳐 국민들에게 널리 보여 국민의 미적 안목을 향상시킨다가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의 설립 취지라고 보면 좋을 듯하다. 대영 박물관 못지않은 방대한 소장품이 있다는 이 박물관은 알라딘의 동굴이라고도 불렸다.

피지의 인도인의 관점에서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을 보면 흥미로운 아이템이 하나있다. 바로 티푸의 호랑이 오르간인데 그 오르간은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이 자랑하는 인기 20대 아이템중 하나이다. 티푸의 호랑이 오르간이 탄생한 이야기는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1792년 12월 22일 남인도. 영국과 마이소르 간의 전투현장. 깊은 정글이다. 영국군 장군의 아들 휴 먼로는 술탄 티푸와의 전쟁에서 패했고 그 자신도 호랑이가 덮치는 바람에 목숨을 잃는다. 술탄은 이 호랑이를 생포했다. 1797년 남인도. 영국과 마이소르 간의 전투현장. 마이소르 궁전. 이번에는 마이소르족이 영국군에게 패하고 술탄 티푸마저 살해당한다. 바로 그때 술탄의 궁을 뒤지던 인도령 동인도 회사 총독의 눈에 진기한 것이 들어오는데 그것을 본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오싹 떤다. 그 오르간 건반을 누를 때마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와 영국군의 비명이 호랑이의 내장으로부터 한 소리가 되어 울려 나오게 고안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올 때 호랑이 밑에 깔려 있는 영국군의 손은 음률에 맞춰 마치 무기력한 운명을 상징하듯 힘없이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 티푸의 호랑이 오르간. 오르간 건반을 누를 때마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와 영국군의 비명이 호랑이의 내장으로부터 한 소리가 되어 울려 나오게 고안되어 있었다.

이 기괴한 상상력의 오르간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이 소리야말로 제국이 울부짖는 소리 같다고 느꼈다. 그 때 호랑이 오르간이 동인도 회사로 실려 갈 때 술탄 티푸의 후계자들은 어찌 되었을까? 오르간과 함께 끌려갔을까? 훗날 나는 <제국>이란 책에서 약간의 단서를 찾았다. 거기엔 요약하자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마이소르 왕은 적어도 한때 동인도 회사의 적 가운데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던 티투 술탄의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나 그런 시절은 오래전이 지나가 버렸다. 왕은 고참 인도 행정 사무직원에게 교육 받았다.그 사무직원은 이렇게 전했다. 전하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처럼 전력을 다해 남성 스포츠를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장애도 안됩니다. 그는 또한 고유의 음악뿐 아니라 서양 음악 감상을 즐기며 지식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 우리는 도로를 정비하고 배수 체계를 만들고 난민을 위한 거처를 만듭니다'

이 문장을 해독해 보면 '왕의 머리는 좋은 것 같은데 다행히 그 머리를 쓸 일은 없어 보이니 우리는 안심하고 할 일이나 하면 된다'일 것 같다. 실제로 티푸의 왕위 계승자 마이소르왕은 영국 지배 하 인도에서 부유하고 서구화되고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는,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 나약한 바람둥이가 되어버렸다. 영국은 그에게 딱 한 가지만 바랬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보팔, 카푸르탈라 같은 토후국의 이름을 단, 화려하게 장식된 코끼리를 타고 다니고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다른 봉건적 왕들의 역할 역시 마이소르 왕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영국 지배 체제를 떠받치는 기둥 노릇을 하는 그 동안에 보통 인도인들은 영국의 제국 경제가 철저하게 필요로 했던 아편을 추출하기 위해 양귀비를 기르거나 아니면 값싼 노동력으로 전 세계에 파견되었을 것이다. 당시 인도의 인구는 전 세계의 14%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노동 조건은 전세대의 아프리카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옛 현자들은 '신은 깊은 슬픔과 불운한 나날을 만들고 그것이 인간들을 위한 이야기와 노래가 되고 그래서 모든 이야기가 없어지고 모든 슬픔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시대엔 '제국'이 깊은 슬픔과 불운한 나날을 만들고 그래서 우리에겐 많은 이야기와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다로 바꿔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유럽의 낯선 화가 앞에서 어깨에 힘주고 의젓하게 서 있는 풍채 좋고 치렁치렁 화려한 옷을 입은 루카우 지방의 술탄과 그의 올망졸망한 열 명의 아들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빅토리아 앤 알버트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그림, 1815년에 인도에서 그려진 왕과 그의 열 명의 아들들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림은 이런 제목을 달고 있다

Tilly Kettle painting a portrait of Shuja ud-Daula and his ten sons
Date 1815
Artist/designer Unknown
Place Lucknow, India Dimensions

유럽의 낯선 화가 앞에서 어깨에 힘주고 의젓하게 서 있는 풍채 좋고 치렁치렁 화려한 옷을 입은 루카우 지방의 술탄과 그의 올망졸망한 열 명의 아들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아들들 운명이 결판나는 동안 루카우 지방의 하층민 수드라 계급 인도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고무 플랜테이션 농장에, 어쩌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에 가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피지의 인도인이 어느 날 돈을 모아 런던에 여행을 와서 티푸의 호랑이 오르간을 보게 된다면 햇볕과 노동에 찌든 눈 밑으로 짜디짠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다. 자존심, 정의, 살아보지 못한 삶, 죽지 않는 호랑이, 아편 ,카레가 연신 그의 머리를 스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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