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용품을 취급하는 대형 마트나 편의점 확산, 대형 문구용품점 확산의 영향도 있지만 '학습 준비물 없는 학교'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서울시는 2010년 이 제도를 본격 도입했다. 학습 준비물을 제때 챙겨주기 어려운 맞벌이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로 지자체와 교육청이 예산을 지원하고 학교가 경쟁 입찰을 통해 학습 준비물을 일괄 구매한 뒤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나눠준다.
서울의 경우 초등학생 1명당 연간 3만5000원이 지원된다. 이 지원금으로 학교는 조달청이 운영하는 '나라장터G2B'나 한국교직원공제회가 운영하는 '학교장터S2B'에서 전자 입찰 과정을 거쳐 학습 준비물을 구매한다. 영세한 학교 앞 문구점이 대단위 입찰에 참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니 학습 준비물 시장을 대형 문구업체들이 독식하면서 학교 앞 문구점들이 존폐 위기에 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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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준비물 없는 학교'는 진일보한 제도임이 분명하다. 학교 앞 문구점을 살리기 위해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구점 업계는 바우처(쿠폰) 제도 도입을 요구한다. 학교에서 학생에게 쿠폰을 나눠주면 학생들이 이를 현금처럼 활용해 학교 앞 문구점에서 준비물을 살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구매부터 관리까지 해야 하는 교사의 업무 부담을 줄이고 학생의 선택권을 넓힐 수 있는 방안이다.
하지만 쿠폰으로 학습 준비물을 사는 대신 문구점에서 현금화하는 '바우처 깡'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어린 학생들의 경우 여전히 부모가 챙겨줘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문구점이 '학습 준비물 없는 학교' 제도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지역·사업 단위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구매력을 확대하는 자구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학교 앞 문구점의 존속 의미는 무엇일까. 영세 자영업자들의 생존권 보호, 교사들 뒷바라지 같은 것 말고 좀 교육적이고 낭만적인 의미는 없는 걸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필기구와 노트를 고르면서 문구의 세계를 맛보고, 문구점 아저씨랑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누기도 하는 운치 있는 문구점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까.
효율, 비용 절감은 인간관계의 절감을 동반하는 수가 많다. 효율과 합리성으로만 움직이는 세상은 재미없는 세상이다. 학교 앞 서점들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참고서 위주의 서점들이어서 책방이라 부르기는 어려웠지만, 참고서를 사면서 다른 책들을 얼핏 구경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학교 앞 구멍가게들이 사라지고, 이어서 서점들이 사라지고, 문구점이 사라지고…. 학교 앞 풍경이 낯설어졌다. 이렇게 가다가 학교도 사라지게 될까? 어쩌면 서점이나 문구점처럼 대형 학교들만 살아남고 온라인 학습 센터만 번창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 위의 글은 <민들레> 85호 "교육, 마을에서 길을 찾다"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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