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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150년의 해에 한반도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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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150년의 해에 한반도를 생각한다

올해는 미국 남북전쟁 발발 150주년이다. 전쟁의 주요 무대였던 미국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에서는 여기저기서 기념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진보적인 역사학자인 하워든 진은 <미국민중사>에서 남북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 당시 3000만의 인구 중 60만이 죽었기 때문이다. 전투기와 탱크와 대량살상무기가 없던 시절에 벌어진 전쟁의 피해다. 더 이상의 상처를 막기 위한 남부군 사령관의 항복이 있었기에 그나마 그 정도에 그쳤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발발이 불가피했는가라는 전쟁 필연성의 여부, 전쟁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는가 하는 전쟁 성격의 문제,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의 동기, 전쟁 당시의 생활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분단 상태에서 남북 대치가 일상화된 우리에게는 전쟁의 피해 문제가 일차적인 관심이 될 수밖에 없다. 좁은 영토인 한반도 내부에서 다시 전쟁이 발생한다면 그 피해가 가공할 만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면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달 안에 죽을 것이라고 한다. 미국 남북전쟁은 내전이기 때문에 국제전의 성격을 가지는 6.25 전쟁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전쟁의 잔혹함에 시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 1861년 7월 21일 발발한 남북전쟁의 첫 전투 현장인 버지니아 소재 메나사스에 남아 있는 대포 ⓒ김창수

뿌리 깊은 노예제

널리 알려진 대로 남북전쟁은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발생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 이전에 이미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600년도 초반 유럽 사람들이 미국에 진출할 때 이미 그 씨앗이 뿌려졌다.

이것은 남북전쟁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양극화의 먼 배경이 되기도 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미국 남부와 북부에 정착한 사람들의 뿌리가 달랐고, 이들이 남부와 북부에서 각기 다른 제도를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1607년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명으로 식민지 개척과 금광 개발을 목적으로 한 존 스미스를 비롯한 120명이 미국 중동부 버지니아에 상륙했다. 그들이 만든 첫 정착지가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제임스타운이다. 어렵게 정착한 그들은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담배 농사를 시작했다.

날씨 좋고 땅이 풍성한 버지니아에서 담배 농사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으로 발전했다. 당연히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1619년에 처음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채용했다. 이때만 해도 노예제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관계였다. 그러나 1634년에 마침내 노예선을 아프리카에 보내기에 이른다. 남부의 플랜테이션은 노예노동에 기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미국 북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사정이 달랐다. 영국 헨리 8세의 종교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피신 온 일종의 개신교도들은 종교의 자유와 자식 교육을 위한 그들만의 신천지가 필요했다. 그들은 식민지 무역회사의 중개로 버지니아로 이주할 것을 결심했다.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탔으나 풍랑으로 버지니아가 아닌 북동부 보스턴 근처로 도착했다. 이런 우연이 나중에 미국 사회 분열의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보스턴 일대는 날씨도 추웠고 버지니아처럼 플랜테이션을 할 수도 없는지라 어업, 제조업 등에 종사했다. 따라서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할 때 북부에는 노예제도가 없었다. 남북전쟁 중에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했을 때 이 선언은 노예제가 없는 북부에는 아무런 실효성이 없는 조치였던 것이다.

▲ 버지니아 메나사스에 있는 남북전쟁 첫 민간인 희생자 묘지 ⓒ김창수

미국 남북 분열의 기원과 한반도 분단

남부에 정착한 영국 사람들은 노예제에 기반한 플랜테이션으로 영국 귀족보다 더 안락한 생활을 했다. 남부 귀족들의 눈에 어업, 상업, 제조업을 하는 북부 사람들은 야만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북부는 양키가 되었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위해 이민 온 남부 정착민들의 눈에 보이는 북부는 노예를 착취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메이플라워호가 미국 땅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남부에서는 흑인 노동력이 제공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남부 번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종교의 자유와 교육을 위해 미국에 온 북부 사람들의 눈에 이런 남부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미국 독립전쟁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온 사람들이 정착한 북부 보스턴 지역에서 촉발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 본다면 당연한 일이다.

남과 북이 추구하는 가치, 경제제도, 자연환경 등의 차이로 발생한 남북 대립이라는 점은 미국의 남북 분열과 한국의 분단이 가지는 닮은꼴이다.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의 갈등과 남북전쟁은 형식논리적으로 볼 때 해방 후 북한에 소련군이 남한에 미군이 진주한 것, 그후 남북이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지고 남북의 경제제도가 달라졌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보인다.

출발부터 달랐던 미국 남부와 북부는 역사의 풍랑 속에 굴절되면서도 결국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전쟁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오늘날까지 미국 정치 문화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1776년에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문은 서두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문안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도 노예 소유자였고, 독립 후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 집무실 공무원보다도 더 많은 500명이 넘는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 따라서 '평등한 모든 인간'의 범주에 노예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독립전쟁 때는 남부와 북부의 연합에 의해 독립을 달성했다. 그러나 독립 후에도 처음 출발 때부터 문제가 된 남부와 북부의 상이한 경제 환경에서 비롯되는 노예제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 워싱턴 DC 미국 역사박물관에 있는 링컨의 얼굴 ⓒ김창수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노예제 옹호자들은 미국의 건국시조들도 노예제 옹호자였다고 주장했다. 링컨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 독립선언문과 노예제의 모순을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링컨은 미국 건국시조들은 현실적으로 노예를 소유했지만 미국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치를 실현해 나갈 것을 약속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의 첫 대목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링컨 자신이 건국시조들의 약속을 이행한다는 말이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노예제 문제는 더욱 격렬한 논쟁이 되었다. 이윽고 1861년 남북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작 링컨이 관심을 더 가진 것은 노예제 보다는 미국 연방의 유지였다. 링컨은 "미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예제가 필요하면 찬성할 것이고 불필요하면 반대할 것이고, 둘 다 필요하면 둘 다 하겠다"고 말했다.

링컨의 이런 발언이 노예제 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방의 유지를 우선시 했던 링컨의 입장에서는 첨예한 갈등 사안인 노예제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었다. 그는 노예제가 첨예한 쟁점이지만 거기에 묻히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분열 극복과 통합을 보았기 때문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의 본질

1863년 게티스버그에서 링컨이 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연설은 미국 역사상 최고의 명연설로 칭해지고 있다. 심지어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로까지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 연설의 본질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에 있다기 보다는 바로 그 '정부가 영원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하룻밤 사이에 수천 명이 죽어갔다. 링컨은 이런 죽음의 대가로 영원한 정부가 만들어 질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영원한 정부'란 연방의 유지, 즉 분열이 아닌 통합을 말하는 것이다. 통합을 위한 이런 링컨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미국의 연방은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만약 남북전쟁 중에 했던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 민주주의의 원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통합의 정신을 강조해야할 것이다. 남북분단에 동서분단을 겪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 점이 각별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통합의 정치라는 시각에서 남북전쟁을 바라본다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남부군 사령관 로버트 리(Robert E. Lee) 장군이다. 당시 미국 최고의 명장으로 전쟁 초반 남부연합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장비와 자원의 부족으로 리 장군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패전 후 남부 백인들은 어쩔 수 없는 패배라며 오히려 리 장군을 신격화한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리 장군이 게릴라전을 하면서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으나 그는 항복을 하고 남북의 화해를 촉구했다는 점이다. 링컨의 승리는 리 장군의 아름다운 패배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것이 미국을 분열이 아닌 '합중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된 것이다. 워싱턴 DC에서 리 장군 고향 버지니아로 향하는 29번 도로 이름이 '리 하이웨이'이다. 통합과 화해를 추구라는 점에서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사례이다.

▲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정상에 있는 남부군 사령관 로버트 리 기념관 ⓒ김창수

남북전쟁에서 북군 사령관이었던 그랜트 휘하의 맹장은 셔먼 장군이었다. 마치 유비 휘하의 장비와 같은 존재였다. 셔먼은 전쟁에서 남부의 골수 끝까지 불살라버렸다. 그 공로로 셔먼의 동상은 지금 백악관 앞에 서 있다. 남북전쟁 후 18대 대통령이 된 그랜트는 동북아시아와 무역 확대를 위해 그의 장수의 이름을 딴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동북아에 파견했다.

조선은 1866에 바로 그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 어귀에서 불살라버렸다. 남부를 불사른 셔먼의 이름을 딴 배가 대동강 어귀에서 불살라졌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근대의 여명에서 한미관계가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점이 역사를 읽는 또 다른 묘미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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