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히 달려간 중덕 삼거리 진입로에서는 이미 경찰과 주민,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자원 활동가 수백명이 뒤엉켜 심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분개했다. "너희들은 상식도 없냐. 태풍이 쓸고 지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 난리를 치냐." 상부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투입된 젊은 의경과 전경들도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한 아주머니의 절규는 가슴을 후벼 파는 듯 했다.
"난 경찰차가 오길래 태풍 피해 복구 지원하러 오는 줄 알았다. 비닐하우스 다 날라가서 복구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경찰이 이 틈을 타 치고 들어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너희들이 이러고도 대한민국 경찰이냐."
이처럼 태풍 '무이파'가 할퀴고 간 강정마을은 태풍이 지나간 지 8시간만에 이뤄진 공권력 강제 투입으로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듯 했다. 주민과 활동가들이 강력히 저항하고 항의하면서 1시간만에 경찰이 철수해 상황은 일단 종료됐다.
그러나 '정치'가 나서서 제주 해군기지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그래서 공권력은 호시탐탐 강제집행을 노리고 이에 맞선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결사 저항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면 강정마을의 평화는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태풍이 쓸고 간 자리에 경찰이 들이닥친 모습을 보면서 인재(人災)가 다가오고 있다는 커다란 불안감을 씻어낼 수 없는 까닭이다.
▲ 일촉즉발의 강정마을. 9일 낮 12시30분께 중덕해안가에 점심때 먹을 음식과 차광막을 실은 차량을 반입하려다 마을 주민들과 시민운동가 등 60여명이 경찰과 충돌했다. ⓒ뉴시스 |
화순 해경 전용부두를 해군의 '기항지'로
그렇다면 해군의 요구 사항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백지화할 수 있는 '윈-윈' 해법은 없는 것일까? 사견임을 전제로 필자가 생각해본 대안의 핵심은 제주 화순황에 건설 예정인 해경 전용부두를 해군의 '기항지'로도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2010년 12월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국가관리항에 포함된 화순항에는 남방해역에 대한 해상안보와 치안 유지 강화를 목적으로 5000톤급 규모의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해경전용부두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이 정도의 규모면 한국 해군의 주력 구축함인 'KDX-2'(4천4백톤급) 함정이 정박할 수 있다.
이처럼 해경 전용부두를 해군 함정의 기항지로도 겸용하는 방안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장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해군의 요구를 100%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이어도 등 남방 해역에서 분쟁 발생시 해군의 대기 및 상황 발생시 신속한 투입이 가능해져 해군의 요구를 일부 충족시킬 수 있다.
정부와 해군이 주장하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의 핵심적인 목적은 남방 해역 안전과 해저 자원 및 해양수송로 보호를 통한 국가안보와 국민경제의 증진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으로 대규모의 해군기지를 건설할 정도로 제주 남방 해역에 심각한 군사적 위협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는 해군 측도 이렇다 할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임무는 이미 해경이 맡아왔고, 화순항 해경 전용부두 건설 및 제주지방해양경찰청 신설을 통해 대응 능력도 훨씬 배가될 예정이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해경 전용부두를 해군 기항지로 겸용하는 방안은 재정 투자 및 임무의 중복 문제를 해소하고, 유사시 해경과 해군의 원활할 협조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총체적 국익을 생각한다면
필자는 앞선 글들을 통해 제주 해군기지 건설 강행시 미 해군의 기항지 혹은 중간기지로 활용될 위험성,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체제(MD) 편입이 가속화될 우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동아시아 해양 패권 경쟁이 휘말릴 위험성 등을 들어 제주 해군기지가 우리에게 '전략적 자산'이 아니라 '전략적 부담'이 될 공산이 크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해경 전용부두의 해군 기지지로의 겸용 방안은 이러한 전략적 위험을 원천적으로 제거해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의 불확실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전략적 이익이 있다.
아울러 건국 이래 제주 남방 해역에 심각한 군사적인 위협이 없었고, 해군이 초기에 제주 해군기지 건설의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웠던 말라카 해협의 해적 활동도 크게 줄어들었으며, 해군이 주장하는 남방 해역 안전 확보 및 해양 수송로 보호의 1차적인 책임은 해경에 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위에서 제안한 것처럼 화순 해경전용부두를 해군 기항지로 겸용할 경우, 해군의 요구도 일부 충족될 수 있다.
총체적 국익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제안은 예산 절감의 효과도 대단히 크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비용만도 1조원에 달하고, 완공 이후 해군기지의 연간 유지비도 200억원이 넘는다. 또한 해군기지에 배치될 20여 척의 함정들의 건조·도입·운영유지비도 적게는 수조원에서 많게는 수십조원에 달할 것이다.
이에 반해 해경 전용부두의 건설 및 운영유지비는 해군기지의 10분의 1 안팎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추가적인 해군 함정의 건조·도입·운영유지비에 투입될 막대한 예산을 사전에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여러 가지 구조물도 해경 전용부두 건설에 재활용함으로써 이미 집행된 예산의 상당 부분을 수거할 수 있다.
이렇듯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백지화 및 대안으로 해경 전용부두의 겸용 방안은 막대한 예산 절감으로 이어져 무상급식, 무상보육 등 복지 수요와 반값 등록급 등 교육 수요를 일부 충당할 수 있는 재원 확보로 이어져 '인간안보'를 튼튼히 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나라의 곳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돈 쓸 곳은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총(국방비)과 버터(경제와 복지비)'의 재균형 달성은 오늘날 정책결정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 해군기지 갈등을 '포괄안보' 구현의 기회로
유엔이 오래 전부터 주창해온 것처럼, 오늘날의 안보는 국가안보나 군사안보로만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하고도 상호연관된 속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해경 전용부두의 해군 기항지로의 겸용 방안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인재'를 예방하고 '포괄안보'를 실현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이기도 하다.
우선 '국가안보'상의 필요를 일부 충족시키면서도 전략적 위험을 야기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또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호함으로써 '환경안보'도 지킬 수 있고, 강정마을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권 보호와 국방비와 사회복지 및 교육비의 합리적인 조정을 통해 '인간안보'도 증진시킬 수 있다.
아울러 강정마을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 운동을 하면서 길어올리고 있는 '평화마을 만들기' 비전을 국가적, 국민적으로 호응하고 지지한다면, '국제안보' 증진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이미 강정마을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다녀가고 있고, <뉴욕타임즈> 등 외신들도 주목하고 있다. 또한 노암 촘스키 등 많은 외국 인사들도 제주도가 진정한 의미의 '평화의 섬'으로 자리잡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호응에 힘입어 내년 2월에는 대규모의 국제대회가 강정마을을 비롯한 제주도에서 열릴 예정이다.
국가안보가 인간안보와 환경안보 등 다른 가치를 희생시키지 않고 이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무력으로 평화를 지킨다"는 군사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군사적 수단과 평화적 수단을 적절히 배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을 때,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 이견을 말한다고 해서 "빨갱이"나 "불순세력"이라고 부르면서 색깔론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을 헤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안보는 더욱 튼튼해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제주해군기지를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는 강정마을은 대한민국의 안보관과 평화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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