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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에너지 새판짜기, 총성 없는 전쟁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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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에너지 새판짜기, 총성 없는 전쟁 시작됐다

사할린을 포함한 극동지방과 시베리아 동부는 앞으로 세계적인 에너지 밀집단지가 될 것이다. 석유관, 가스관, 전력망, 철도가 이 지역을 촘촘히 역을 것이다. 시베리아와 사할린에 석유와 천연가스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 공급이 충분하다. 한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이 지역 4개국이 모두 세계 에너지 소비 10위권 국가라 수요도 넘친다. 소련 붕괴 이후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준비해왔는데 이제 인프라와 개발기술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투자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9월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사할린에서 시작하는 러시아 동부 가스관 완공식이 열린다. 극동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참석할 예정이다. 이는 동북아 천연가스 공급체계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이 가스관이 앞으로 동시베리아와 중국, 한국으로 연결되는 파이프라인의 몸통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9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북러 정상회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북한이 조건 없이 6자회담에 복귀하기로 한 점과, 러시아 천연가스관의 북한 통과를 김 위원장이 동의했다는 점이다. 가스관을 운영하기 위한 전력이 필요하므로 가스관 연결은 전력망과 함께 진행되는 것이 효율적이다. 김 위원장이 아무르강가의 거대한 부레아 수력발전소를 방문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러시아가 가스관과 전력망, 철도를 함께 연결하자고 제안했다는 보도도 신빙성이 높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4일 러시아 울란우데 시에서 열린 연회에서 환담하는 모습을 31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 김대중·노무현 '4대 사업' 버리고 가스관 관심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이후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남북 가스관 사업은 대통령이 현대건설 때부터 꿈꾸던 사업"이라며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집권 초기부터 은밀히 추진해왔다"고 말했다. 또 11월이면 남·북·러 3자가 가스관 연결을 위해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와 동시에 통일부 장관이 '왕의 남자' 류우익 전 주중 대사로 교체되었다. 큰 폭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대북정책의 변화를 예고하는 조짐들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 2008년에 러시아 천연가스를 북한을 통과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들여오기로 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 양해각서를 김 위원장이 이제야 동의한 셈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관계 3대사업은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철도 연결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이를 계승하면서 서해일대의 분쟁을 경제협력으로 해결하는 '서해평화협력지대 건설'이라는 중요 사업을 북과 합의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이 모든 사업들이 '퍼주기'로 매도되면서 파산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의 시대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남·북·러 가스관 연결을 추진해왔다.

러시아와 가스관 연결 사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소련과 수교했고, 소련 붕괴 이후 1992년 11월 서울에서 보리스 엘친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사할린 가스의 한국 공급을 합의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러시아도 지금처럼 극동 개발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여기지 않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했다.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서 후속조치는 진행되지는 않았다.

사할린 천연가스를 북한을 경유한 파이프라인으로

1997년에 이르러 한·중·러 3국은 공동으로 동시베리아 이르쿠추크에 있는 코빅타 가스전 개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코빅타 가스전이이냐 사할린 가스전이냐를 놓고 한국의 러시아 천연가스 개발은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 최근에서야 러시아 사정으로 사할린 가스전으로 결정된 것이다. 코빅타 가스전을 개발할 경우 중국의 선양과 대련을 거치는 파이프라인을 놓아야 한다. 이 경우는 대련에서 북한을 거칠 것인가, 서해에 해저 파이프라인을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사할린 가스전 참여는 거기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엑손모빌이 한국에 권유해서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 사할린 가스전에 참여할 경우 9월 초순 완공되는 사할린-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동부 가스라인을 거치게 된다. 그 후 역시 북한을 통과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을 우회해서 동해에 해저 파이프라인을 놓을 것인가 하는 방안에서 선택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현재 남·북·러 3자는 대상으로 동시베리아 가스전이 아닌 사할린 가스전을, 운송 방식으로는 수송선에 의한 액화가스(LNG)가 아닌 파이프라인을 통한 가스(PNG)를, 경로로는 북한을 관통해서 남한으로 공급하는 방안에 합의한 셈이다.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해저 파이프라인이 연결된 발트해와 달리 동해는 수심이 깊어서 파이프라인을 묻기에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러시아는 꾸준히 북한을 통과하는 가스관을 주장해왔다.

총성 없는 에너지 전쟁- 코빅타에서 사할린으로

돌이켜보면 한국은 1997년 동시베리아의 코빅타 가스전 개발로 러시아 가스 개발에 참여했다. 그런데 사할린 가스전으로 변경된 이유는 뭘까? 한·중·러 3국은 코빅타 가스전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마치고 2003년 말 공동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갑자기 코빅타 프로젝트 승인을 미루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부의 자원통제 정책이 강화되어 총성 없는 에너지 전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처음에 러시아와 합작해 코빅타를 개발한 회사는 영국의 BP였다. 그러나 러시아 최대의 가스회사인 국영 가즈프롬이 지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에너지 자원을 통제하자 BP는 결국 개발권을 가즈프롬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은 자연히 코빅타 가스전에서 발을 빼게 되었다. 이때가 2008년인데, 바로 그 무렵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 대통령과 사할린 가스전 참여에 합의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코빅타 프로젝트 승인을 미룬 것은 가즈프롬을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전쟁이었다. 러시아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도 이 총성 없는 전쟁에 참여했다. 노무현 대통령 인수위원회 시절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제임스 켈리 당시 국무부 차관보를 특사로 한국에 보낸다.

켈리 차관보는 미국 최대의 에너지 회사인 엑손모빌이 북한 핵문제를 해결한 후 북한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미국 대통령의 특사가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의 로비스트 역할도 같이 수행했던 것이다. 엑손모빌은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북한을 관통하는 러시아 가스관 건설 사업을 한국 정부에 제안한다. 미국식으로 하자면 로비였다. 텍사스 주지사 출신의 부시 대통령과 맺고 있는 깊은 관계는 로비의 큰 힘이었다.

엑손모빌의 끈질긴 로비

그러나 2003년 당시 한국은 이미 김영삼 정부 후반부터 추진해온 코빅타 사업을 통한 파이프라인 연결을 검토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엑손모빌이 보유하고 있던 가스 개발 지분은 '사할린1' 프로젝트였다. 당시 사할린 가스전 개발 사업은 엑손모빌과 일본 기업들이 참여한 사할린1 프로젝트와 셀이 주도하는 사할린2 프로젝트가 있었다. 한국은 사할린이 아닌 동시베리아 이르쿠추크에서 개발했던 코빅타 사업을 포기할 수도 없었고, 엑손모빌의 사할린1 프로젝트를 코빅타와 둘 다 추진할 수도 없었다.

러시아 정부는 엑손모빌이 개발한 사할린1 프로젝트의 천연가스를 가즈프롬이 전량 구매 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사업을 철저히 관리했다. 미국 기업인 엑손모빌이 천연가스를 수출하는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엑손모빌은 파이프라인을 통한 천연가스 공급(PNG)에서 밀리자 한국에 PNG 보다는 배로 천연가스를 운반하는 LNG를 택하라고 권유하는 끈질김을 보여주기도 했다.

러시아는 사할린2 지역에서 사할린3 지역을 분리해 사할린3은 다른 나라 기업에 개발을 맡기지 않고 직접 관리하는 전략 지역으로 지정했다. 사할린3에서 생산된 가스를 북한을 통과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한국에 공급하려는 러시아의 치밀한 계획이 이 무렵 만들어진 것이다. 러시아는 이명박 대통령과 2008년 이 구상을 합의하고, 올 8월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동의를 받아낸 것이다.

러시아가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천연가스 개발, 공급, 관리를 통제하는 것은 천연가스와 석유가 러시아의 미래라는 판단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 전체의 안정적인 가스 수급 구조를 구축하겠다는 의지이다. 다른 나라 기업에 절대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한 동북아에서 가스의 수출시장 확대를 위해서는 PNG와 LNG 사업을 함께 추진하는 것이 경제적이며 동부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하게 된다는 계산도 있었다.

북한은 천연가스에 관심 없나?

러시아는 이렇게 2000년대 중반부터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치밀하게 천연가스 개발을 추진해 왔다. 반면 북한은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대해 이렇다 할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 발표문에서는 '2000년 평양에서 조인된 북러 공동선언과 2001년 북러 모스크바 선언의 정신에 기초한다'는 표현이 있다. 북러 공동선언에는 '천연가스'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 있고, 모스크바 선언에서는 천연가스 언급은 없고 철도 연결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도 에너지 문제는 매우 시급한 것이다. 핵문제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이 천연가스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2002년까지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해 주기로 한 약속 때문으로 보인다. 2002년 이후에도 북한은 미국과 핵협상을 통해서 에너지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는 한국의 잉여전력을 북한에 송전하는 방안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정일 위원장이 그동안의 태도와 달리 이번에 사할린 가스를 북한을 경유해 남한에 공급하는데 동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러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언론들은 러시아가 극동지역 자원과 에너지를 잘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과 극동지역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의 자취가 서린 곳이라는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러시아의 극동지역에 대한 주민들의 우호적 관심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부레아 수력발전소와 천연가스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김 위원장은 러시아 방문 후 귀국길에 중국의 석유공업도시인 다칭(大慶)을 방문했다. 3개월 전 중국에 갔을 때는 태양광 관련 시설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북한이 대외 에너지 협력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경제 상황과 관련해보면 이런 추정은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미국에서 심각한 경제침체로 예산적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이 단서가 될 수 있다.

북한이 실망한 미국 재정적자?

<조선중앙통신>은 미 의회예산국(CBO) 자료를 인용하면서 "올해 9월 말에 끝나는 2011 회계연도 연방 예산적자가 1조2800억 달러로 증대될 것이다"고 전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핵 폐기와 보상'이라는 방식으로 에너지를 확보하는 지금까지의 협상 전략이 불가능함을 북한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세 번이나 북한의 핵을 돈을 주고 살 수는 없다'고 말하는 반면 북한은 '제대로 산 적이라도 있냐'며 반박해왔다. 이런 논란을 벌이는 사이에 미국의 재정적자까지 겹치자 미국이 경제적으로 보상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래서 북한이 에너지 공급선 다변화로 정책을 전환했는지 여부는 물론 아직 불확실하다. 조금 더 두고 봐야 한다.

하지만 북한의 에너지 정책이 실제로 전환된 것이라면 이는 6자회담에 대한 북한의 전략 수정으로까지 해석이 가능하다. 94년 제네바합의 이후 지금까지 북핵 협상은 '핵폐기'와 '보상 및 안전보장'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교환할 항목을 세분화해 서로 조합하고 순서를 정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최근의 움직임이 북한의 에너지 확보 정책의 변경으로 밝혀진다면 북미 접촉에서는 '핵폐기'와 '평화협정 및 북미관계 정상화'로 중심 이슈가 이동할 것이다. 앞으로 북미접촉에서 핵폐기에 대한 '보상' 문제는 두 나라 사이의 이슈에서는 약화되거나, 에너지를 보상하는 길이 보다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북미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도 평화협정과 북미관계 정상화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핵폐기에 상응하는 에너지 보상을 6자회담 참가국들로 다변화시킨다면 가스관, 송전선 연결 등은 이를 용이하게 하는 인프라가 될 것이다.

북한이 가스관을 막으면?

서두에서 밝혔듯이 북한을 통과하는 가스관 연결은 철도, 전력망 연결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동북아 물류와 에너지에서 새로운 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한편, 북한을 통과하는 천연가스관이 북한에 의해 악용되는 것을 염려하는 의견도 많다. 그에 대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은 분명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물류와 에너지의 재편 과정에서 우리의 몫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을 가정해본다면 어느 것이 더 심각한지는 명확해진다.

중국은 문어발식으로 아시아 에너지망을 구축하고 있다. 2009년 12월에 후진타오 국가 주석은 투르크메니스탄을 방문해 '중앙아시아-중국 가스관' 개통식을 가졌다. 이 가스관은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경유해 중국 신장과 상하이, 선전까지 이어진다. 2009년 러시아는 중국에 독일의 1년 소비량의 2배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의 천연가스를 공급하기로 약속했다. 러시아는 이를 위해 코빅타 가스전을 개발할 예정이다. 한국이 1997년부터 개발을 시도했다가 러시아의 통제에 밀려 2008년에 손을 뗀 바로 그 가스전이다.

북한이 가스관을 막을까봐 망설이기만 한다면 그 사이 많은 기회를 잃는다. 따라서 남북 화해·협력정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혹시 생길지 모르는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안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안보 개념에서 나온 발상이다. 이는 소극적이고 때로는 비효율적이어서 현대적이지 않다. 이렇게 안보 비용을 지출하는 것보다 신뢰를 구축하고 투자를 해서 이익을 확보하고 공유하는 것이 현대의 안보이다. 사할린 가스는 남북에 주어진 협력 안보의 시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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