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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훔친 남자? 독일을 훔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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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훔친 남자? 독일을 훔친 남자! [권은정의 '아우토반 코리안'] 이미륵을 닮은 사람, 박희석 박사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박희석 박사는 최근에 뮌헨에 다녀왔다. 가끔 다니러 가는 곳이지만 이번 일정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이미륵에 대한 강연을 하러 갔기 때문이다. 뮌헨 시민대학이 주관해서 시의 문화 중심 지역인 가스타익에서 열린 강연의 제목은 '동서 가교의 한 선구자-독·한 작가 이미륵 60주기를 기념하여'였다.

"청중들의 반응도 아주 좋았습니다. 저는 이제 어느 정도 결실이 맺어진 것 같아 대단히 흡족합니다. 뮌헨에 이미륵협회가 생겼고, 베를린에도 지부가 생길 예정이고, 또 무엇보다 에어푸르트 대학교의 독문학자 질비아 브레젤 박사가 이미륵을 자신의 주제로 발견한 것 같아 아주 큰 기대가 됩니다."

올해 뮌헨 강연은 박희석 박사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낸 것이라고나 할까. 5년 전 베를린에서 이미륵에 관한 강연을 마치고 나서 이미륵 60주기가 되는 2010년에 뮌헨에서 강연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막연하게 가졌던 꿈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미륵에 대한 이런 약속은 아무도 강요한 것이 아니다. 박희석 그 자신이 심고 가꾼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독일 사회에 한국을 알리고자 하는 그에게 이미륵은 그런 의지의 표상이었으며 하나의 중심축이었다.

▲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박희석 박사. ⓒ한민영

박희석 박사는 올해로 독일에 온 지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1991년 말 독일에 도착했을 때 나이 서른이었다. 한국에서 독문학으로 박사 과정에 있던 그는 종합 시험도 다 마친 상태로 논문 자료 수집차 장학금을 받아 1년 예정으로 독일에 왔다. 그러나 그 1년은 긴 세월의 시작일 뿐이었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올 때까지는 정말 아무 생각 없었어요.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느낌, 그런 게 들었어요. 분명 낯선 곳이었는데 전혀 낯설지 않았어요."

따뜻하게 환영하는 독일 땅에 대해서 그는 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나라에 대해 나름대로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이 아주 많았다.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독일 사회의 시스템은 어쩌면 이렇게 잘 갖춰져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낸 것일까?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궁금증은 독일뿐만 아니 유럽 이웃나라에 대해서도 번져나갔다. 그런데 독일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씩 해소될수록 그와 반대로 한국에 대한 의문부호는 더욱 커졌다.

"정작 나의 조국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독일은 이런데 우리나라는 왜 이렇지 않을까? 그런 비교를 하면서 결국 내 안에서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마음은 독일에서 만나는 외국인 친구들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너무 모르거나, 혹은 너무 잘못 알고 있었다. 그는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엇이든 잘못된 사실이나 내용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한다. 매사 정확하고 올바르게 처리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게 처신하는 게 몸에 배인 사람이다. 친구들의 그릇된 한국관을 어떻게 잘 잡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먼저 자신이 열심히 공부했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떤 문화를 지켜오고 있는지, 성실한 답을 하고 나면 비로소 제대로 할 일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 마음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 여기 독일에 살면서 한국을 알리는 일이야말로 내가 진정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일종의 임무를 부과한 것이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약간은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 결심을 말했더니 물론 다들 말렸다.

"부모님, 형제들, 특히 지도 교수님께서 만류하셨지요. 한국에서 서른 살까지의 제 삶을 완전히 포기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냥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늘 이성적인 판단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젠 뱃속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겠다 싶었어요. 한국으로 돌아가 논문만 쓰면 좀 편하게 살 수 있었겠지만, 결국 후회할 것 같았어요."

ⓒ한민영
'사서 고생', '맨땅에 헤딩'.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사실 당시 그는 독일에 남아있을 수 있는 경제적, 법적 기반 같은 게 전혀 없었지만 문제될 것 같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독일로 삶의 나침반을 완전히 돌리는데 3년이 걸렸다. 작정한 대로 뮌헨에 자리를 잡고 한국을 알리는 미션을 위한 전 단계 작업에 착수했다. 독일어 완전 정복과 한국 음식 만들기였다.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독일어로 말할 줄 알아야겠다고 싶어서요."

그는 완전히 다시 시작했다. 괴테문화원 가장 초급 단계부터 들어갔다. 하루 6시간 매주 5일 수업, 철저한 예습 복습은 기본, 문화원이 실시하는 모든 종류의 어학 시험에 응시했다. 기본 과정 시험부터 마지막 대독일어 디플롬까지 가서 결국 최고 점수를 받았다. 어학 공부로 2년을 보내고 나니 '많이 나아졌다'는 느낌이 들었단다.

그 다음은 한국 음식을 만들어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이었다. 평소에는 라면도 잘 끓이지 않던 그가 국제 전화로 형수님께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곧장 잡채며 불고기, 심지어 김치까지 담그는 꽤 괜찮은 요리사가 되었다. 같이 한국 음식점을 내보자는 동업 제안을 받을 정도였다. 주말이면 그의 기숙사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독일 속담, '사랑은 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을 그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요리 솜씨는 독일어 실력보다 못했지만 그는 어느 정도 채비를 했다는 생각이 들자 활동 무대를 베를린으로 옮겼다. 1994년 초, 장벽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된 베를린은 여전히 동토의 땅이었다. 그 두터운 언 땅 아래로 한국의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베를린에 와서도 독일인 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여기서는 친구라고 해서 반드시 나이가 비슷할 필요는 없어요. 아파트 아래층 집의 초등학생 딸아이부터 아흔 살이 넘은 하노버에서 온 노부부도 친구가 되었어요. 서로 마음이 맞으면 친구가 되는 거죠. 그런데 우정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여행가면 반드시 카드를 보내주고 생일은 꼭 기억해야 하고, 좀 소식이 뜸하다 싶을 때는 전화를 해서 저녁 약속을 해야 합니다. 좀 귀찮은 일들이긴 하지요. 하하하…."

독일 사회에서 '절친 만들기'노하우를 전하는 그의 표정이 밝았다. 박희석 박사의 친구 만들기 방식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양로원에서 지내는 두 노인을 돌보는 일이었다. '한국인의 따스한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한 자원 봉사 활동은 5년간 이어졌다. 그 소망은 역시 이루어졌다. 매주 양로원에 들어서는 그를 보고 독일 노인들은 '아시아의 해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활동들은 한국을 알리자는 큰 목표를 향한 작은 걸음이었다. 그는 언젠가 개인 한국문화원을 설립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산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가지기에는 엄청 큰 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바라면서 걸어 가다보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단다.

ⓒ한민영

박희석 박사의 하루하루는 충실한 내용으로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해 연구하고 공부하는 일로 채워졌다. 그 중에는 발품을 들여 여러 나라의 문화원 행사를 직접 찾아다니는 일도 있었다. 나라마다 문화를 표현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운영하는지 살펴보았다. 세계를 향하는 한국 문화의 표현 방식에도 변화가 와야 한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우리 문화를 전 세계에 내보낼 때 그 나라의 취향에 맞춰서 표현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이지요. 해외 제품 판매를 위해 각 회사들이 현지 사정에 맞춰 기획하잖아요? 나라마다 선호하는 취향, 감각을 미리 조사해서 거기에 맞게 우리 문화를 보여준다면 훨씬 효과적인 전달이 될 것 같은데요. 어떤 그릇에 담아내느냐에 따라 음식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한국식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게 최상의 방식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는 자신도 놀라는 방식으로 우리 문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친구들에게 한국 영화나 예술을 소개하는데 무조건 긍정적인 내용 일변도로 나가지 않는다. 한국 감독이 만든 청소년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였다. 다들 드러내기 꺼려하는 가능하면 숨기고 싶어 내용들이었다. 친구들은 매우 당황하더라고 했다.

어떤 이는 언짢아하면서 일찍 가버리기도 했다. '굳이 이런 것을 우리한테 보여주는 이유가 있느냐?' 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도 우리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어느 곳이나 어두운 면이 있는 것 아니냐?' 한 사회를 알리는 데 있어 정직성보다 더 효과적인 도구는 없는 법이라는 말이었다.

베를린에서 살면서 그는 한국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훔볼트 대학 한국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문학회 모임에 나가면서 한국 문학을 알리는 기회가 자주 있었다. 개인적으로 강연을 나가는 일도 이어졌다.

그때부터 '이미륵 되살리기'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1950년 독일 사회에서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은 매우 잘 알려진 사랑받는 한국 작가였다. 미려한 문장과 밀도 높은 작품성으로 그의 소설은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받았다.

이미륵은 작품뿐만 아니라 인품으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많은 독일인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이미륵, 그가 아직도 이 사회에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다시 끌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문학 강연을 할 때마다 이미륵을 주제로 다루었고, 선물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이미륵의 독일어판 책을 건네주었다.

"이미륵 박사를 알리는 목적은 이미륵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한국을 알리는 것이지요.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가 작품을 냈을 때 특히 독일 남쪽에서 아주 크게 소개되었지요. 외국인이나 외국 문화에 까다로운 사람들인데 이미륵에게는 각별했어요. 작가란 존재를 그 나라의 정신적 보고라고 여기는 이곳 사람들에게 이미륵을 통해 한국을 보여준다면 아주 효과적이지요."

ⓒ한민영
박희석 박사의 문화 활동은 조용하고 내실 있게 이뤄져 왔다. 한국 문화를 알리는 일에는 열성이지만 자신을 알리는 일에는 오히려 정반대다. 그의 존재는 가끔 학문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5년 전 짐머만 교수와 함께 <한국의 역사철학적 고찰>이라는 연구서를 냈다. 또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이 최근 출간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독일 최고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문예란에 그 책의 서평이 실릴 정도였다.

"지금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박사 학위 하나 정도밖에 없지요. 한국을 알리는 일이 어떤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요. 그동안 독일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곳 사람들, 유럽 사람들을 보는 제 나름의 시각도 생겼습니다. 이제 우리 문화를 어떻게 독일 사람들의 취향과 입맛에 맞게끔 전달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은 것 같아요."

이제 그의 한국 알리기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 같다. 조용한 걸음으로 움직인 그의 동작이 좀 더 커졌다.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에서 학생들에게 한국 문화와 역사를 강의하기 때문이다.

"이제 저는 기본적으로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일의 젊은 대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들이 앞으로 독일을 이끌어갈 장래라고 생각하면 이보다 더 나은 한국 알리기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저변 문화'를 강의하고 있는데 내년 여름 학기부터 '한국 문화 입문'도 가르칠 예정이다. 한국 알리기가 체계화되는 것 같아 그는 매우 기쁘다. 그러나 욕심을 부린다면 중국학과, 일본학과와 견주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좋은 강의를 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들과 경쟁하려면 그는 힘을 많이 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년 겨울 학기부터 시작한 저의 역사 강의에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들어옵니다. 올해 학기부터는 일본, 중국학과와 거의 비슷한 학생 수가 되었어요. 자유대학 다른 학과의 학생들도 오지만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도 일부러 제 강의를 들으러 오는 학생들이 있어서 아주 힘이 납니다."

그가 환한 표정으로 설명한다. 독일 대학에서 수강하는 학생 수가 얼마나 되는가는 상당히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곳 학생들에게 출석은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민영

박희석 박사는 매우 꼼꼼하고 정확하게 생활한다. 아마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몇 걸음인지, 시간은 몇 분 몇 초가 걸리는지 계산해놓고 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정확성에만 매인 사람이 아니다. 그 안에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스한 마음이 넘치도록 담겨 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마다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표정이다.

결국 인간이 가장 좋은 문화의 매개자라고 믿는 그는 이미륵을 알리면서 아름다운 한국인 이미륵을 닮아 가는지도 모른다. 한국과 독일, 그 먼 거리를 박희석 특유의 성실한 걸음이 아주 가깝게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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