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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그는 '도덕가'인가 '예언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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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그는 '도덕가'인가 '예언자'인가? [프레시안 books]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하나의 텍스트인가, 두 개의 텍스트인가? 도덕의 세계와 경제의 세계는 동일한 원리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인가, 서로 다른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인가? 1800년대 중반 독일의 사회·경제 사상가들이 애덤 스미스의 두 저작을 읽고 그의 사상 체계 전체에 대해 던졌던 질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경제 위기가 상존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도덕과 경제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우경봉 옮김, 동아시아 펴냄)는 이 질문에 하나의 관점을 보여준다.

애덤 스미스의 두 저서를 함께 다루는 도메 다쿠오의 저서는 금융 위기가 발생하여 세계 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던 2008년 3월 발간되었다. 그는 스미스의 두 저서를 서로 연결시켜 해석하면서 "애덤 스미스가 '탐욕'을 용인했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푸는" 동시에 "'탐욕'이 시장 경제를 파탄시킬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6쪽).

▲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세계>(도메 다쿠오 지음, 우경봉 옮김,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그의 표현을 빌면, 자신이 제시하려고 하는 "애덤 스미스의 이미지는 종래의 이미지, 다시 말해 규제를 철폐하여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한 나라의 경제 효율을 향상시키고 높은 성장률을 실현하여 풍요롭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254쪽).

그는 독일의 역사학파 사회·경제 이론가들이 제기한 '애덤 스미스 문제'와 관련해서 '문제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사이에 단절 또는 전환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애덤 스미스가 "시장 경제의 기본 원리를 해명하면서 결코 '인간'의 문제를 놓치지 않았"(6쪽)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애덤 스미스의 독창성은 인간에 관한 기존의 폭넓은 연구를 바탕으로 경제학의 체계를 확립한 데 있다."(6쪽) 인간은 두 세계 모두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또한 두 세계를 이어주는 고리이다.

도메 다쿠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의 도덕적 감정을 다루는 <도덕감정론>에서 출발하여 국민들의 부를 다루는 <국부론>으로 나아간다. 스미스의 두 저작을 어렵지 않고 쉬운 방식으로, 가끔 도식을 사용하여 간결하게 정리하면서, 그는 도덕철학이나 경제학에 친근하지 않은 독자들도 논의를 쉽게 쫓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도덕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경제의 원리로 연결되고, 도덕의 세계와 경제의 세계는 이음매가 없는 완전한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참된 행복은 마음이 평온한 것"(258쪽)이라는 신념이 애덤 스미스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는 주장이 저서의 핵심적 주장으로 제시된다.

길지만 그의 결론을 인용해 보자.

"부와 지위, 명예는 추구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개인이 부와 지위를 추구함으로써 사회가 번영한다. 그러나 부와 지위가, 가까이 있는 행복의 수단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적 성공이라는 큰 뜻을 품으면서도, 자기 마음의 평정을 위해서는 무엇이 정말로 충족되어야 하는지를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각 개인의 몫으로 나누어지는 행운과 불운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가치가 있든 없든, 우리는 우리 몫으로 나누어지는 행운과 불행을 모두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운 속에서 오만해지지 않고 불행 속에서 절망하는 일 없이, 자신을 평안한 상태로 되돌리는 강인함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믿고 살아가야 한다. 나는 애덤 스미스가 도달한 이러한 경지야말로, 현대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259~260쪽)


도메 다쿠오가 스미스의 가장 귀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행운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함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믿고 살아갈 줄 아는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기 우리는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경제의 세계는 사라지고 도덕의 세계만 남은 것이 아닌가? 진정 우리가 강인하다면, 어떠한 조건에도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은 평안할 것이다. '강인함'은 우리를 경제의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념이나 깨달음이 아무리 훌륭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애덤 스미스만의 유산은 아니다. 인류는 이미 애덤 스미스 이전의 시대로부터 수많은 종교와 철학의 지혜를 물려받았다. 애덤 스미스에게서 근대 사상의 새로움은 사라지고 만다. 또한 이러한 수많은 지혜는 상존하는 경제 위기 속에서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일상에 쉽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메 다쿠오가 책의 결론 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 세 가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네 번째 내용은 검토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도메 다쿠오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서 파악하는 것"을 스미스 사상 체계의 첫 번째 핵심 요소로 들고 있다. "개인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공평한 관찰자'를 마음속에 형성하여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인정하는 것이 되도록 노력한다."(246쪽) 이러한 노력을 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함'이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보다 자신의 이해관계 또는 세간의 평판을 우선시하여 행동하는" '연약함'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연약함' 때문에 인간은 부를 축적하려는 야심과 경쟁에 빠져든다. 당연히 이러한 야심과 경쟁은 '현명함'이 우리 마음속에 형성시켜 놓은 정의감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제어되지 않은 야심과 경쟁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혀 사회의 번영을 방해한다." (247쪽)

이제 우리는 '강인함'보다는 약화된 형태의 덕성인 '현명함'과 인간의 약점인 '연약함' 사이에서 인간이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덤 스미스가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다소 안도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야심과 경쟁이 '어느 정도로' 제어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현명함'과 '연약함'이라는 두 개념보다는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 '자신의 이해관계', '세간의 평판' 등의 개념이 더 주요한 분석 도구이며, 이러한 스미스의 개념들을 둘러싼 논쟁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합리성이나 정의/공평, 이기심과 동감/공감 등의 개념들이 여전히 철학적·분석적 차원에서 복잡하게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명함'이나 '연약함'과 같은 개념으로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다소 의외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완전히 강인하지 않고 또한 '현명함'이 완전히 '연약함'을 제어하지 않아야만, '연약함'은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수 있다. 우리는 부와 지위를 추구하는 경제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된다. 도메 다쿠오는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에서 배울 두 번째 핵심 내용이 바로 이 경제의 세계, 곧 '시장 사회에서 부의 기능'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부는 단순히 인간의 생존과 안락을 위한 것을 넘어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 특별한 애정이 없는 사람들이 상호 동감을 바탕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경제 성장은 단순히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고, '투자하는 부자들'과 '임금을 받고 일하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역은 언어와 문화, 관습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교류를 심화시켜 상호 의존 관계를 강화시킨다. 도덕의 원리가 경제의 세계에 적용되면서, 경제의 세계는 상호 존중과 평화가 지배하는 세계로 그려진다.

"부는 시장을 통해 한 나라 안의 사람들을 연결하고, 성장을 통해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이으며, 나아가 무역을 통해 서로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연계시킨다. 시장, 성장, 무역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부의 기능에서 각각 다른 국면을 나타낸다. 말할 것도 없이, 부가 이러한 기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250쪽)

스미스가 <국부론> 전체에 걸쳐 틈틈이 강조하는 지주/자본가/노동자 세 계급으로 구성된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계급 관계라는 경제 체제의 핵심 속성에 따라 설명되어야 할) 자본주의 경제와 중상주의 체제의 어두운 면은 완전히 사라지고, 순수한 시장경제와 자유로운 무역질서의 아름다운 모습만이 드러난다.

그런데 중상주의나 식민지 지배라는 어두운 현실 역사에 대한 스미스의 비판(7장, 8장)을 잘 알고 있는 도메 다쿠오는 스미스로부터 배워야 할 세 번째 내용으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부의 기능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250쪽)

"애덤 스미스는 참가자의 독점과 부정을 막기 위해 시장은 어느 정도 정부에 의해 감시되고,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251쪽)

하지만 이것이 도메 다쿠오가 생각하는 스미스의 마지막 말이 아니다. 시장에서의 독점과 부정을 막기 위해 공적 기관의 감시와 법의 규제가 필요하지만, 충분한 감시와 적절한 규제는 쉽지 않으며 또한 공적 기관이 도덕적으로 부패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제 체제는 공적 기관이라는 외부의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장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 내부의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 감시되고 규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제가 구축될 수 있을지 여부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이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 줄 아느냐, 다시 말해 그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이냐는 점에 달려 있는 것이다." (251~252쪽)

여기에서 몇 개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도메 다쿠오의 스미스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견고한가를 검토해 보자.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라면, 곧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규제를 철폐하여 경쟁을 촉진하기만 하면' 경제 성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된다면, 도메 다쿠오가 제시한 스미스의 이미지와 종래의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이기적 인간들도 최소한의 법만 있으면 시장 경제의 원리에 따라 완전 경쟁 하에서 공정한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기적 인간들과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는 경제 행위에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 경제 자체가 독점과 특권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부패할 수도 있는 정부가 사라지기만 하면 시장 경제는 저절로 돌아갈 것이다.

심지어 일부 시장주의자들은 거대 경제 권력이나 독점체조차도 교환의 일반법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도 정부의 간섭이 없다면 시장 경제의 효율성이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불안정과 위기는 경제적 효율성에 따르는 불가피한 대가일 뿐이다. 도메 다쿠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애덤 스미스 이미지는 그다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논의를 약간 다른 식으로 전개해 보면, 도메 다쿠오는 역설적으로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로부터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경제 체제'가 결국에는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기적 인간을 상정한다면, 정부의 감시와 법의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공적 기관의 도덕적 부패도 배제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라면, 그러한 사회 속에는 부와 지위를 추구하는 헛된 야심을 가진 사람들, '자연의 기만'에 속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도덕의 세계와 경제의 세계를 분리한다면, 그 둘을 이어줄 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의 원리에 따르는 사회 구성원들을 상정한다면, 경제의 세계는 위축되고 결국 도덕의 세계 속으로 흡수되고 만다. 결국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는 훨씬 복잡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근대 사회·경제 사상가로서 애덤 스미스가 갖는 사상사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도메 다쿠오가 주장하듯이, 동감의 원리라는 인간 본성의 도덕 원리로부터 사회 질서를, 특히 시장 경제가 지배하는 근대 경제 질서를 설명해 내는 데에 있는가? 아니면, 많은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비판자들이 주장하듯이, 도덕의 원리로부터 경제의 원리를 완전히 분리해 내고, 또 이기심의 원리가 작동하는 경제 세계가 동감의 원리가 작동하는 도덕 세계조차는 장차 지배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근대 세계의 운명을 미리 보여준 데에 있는가?

스미스 사상 체계의 특성에 대한 질문은 근대 세계 자체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근대 세계에서 도덕과 경제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근대인들은 도덕과 경제 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두 세계 중 어느 하나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두 세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근대 세계는 두 개로 나뉘어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하나의 세계일뿐인가? 아니면 우리는 도덕과 경제 두 개의 세계만이 아니라 더 많은 세계, 정치와 예술, 종교, 환상 등이 각각 지배하는 세계들 사이에 걸쳐있는 다리 위에서 여전히 서성이면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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