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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칼로 베는 고백, "사랑합니다,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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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칼로 베는 고백, "사랑합니다, 고객님!"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노동>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노동>(이가람 옮김, 이매진 펴냄)은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을 제공한다.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자신의 감정을 고무시키거나 억제"(21쪽)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책이 제기하는 세부를 간과한 채 감정노동을 파악하고자 하면 고작 고객에 대한 과한 친절 봉사를 뜻하거나, 상업 세계에 줄곧 있어 왔던 성공 수칙이 좀 더 극성스러워진 정도로만 여겨진다.

일례로 1823년 휘주에서 태어나 생전부터 '살아 있는 재신(財神)'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청나라 상인 호설암(胡雪巖)은 자신의 약국 체인 호경여당을 일으키면서 '고객이 양명(養命)의 근원'이라는 점규를 내세웠다. 호설암의 성공 비결을 정리하고 풀이한 스유엔의 <상경>(김태성 옮김, 더난출판사 펴냄)에는 재신이 직접 남겨 놓았다는 이런 말이 있다.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으면 따스함이 가득하지만, 차가운 말투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춘삼월보다 추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고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괄시한다면 상품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손님을 끌기 어렵다. 고객은 양명의 근원으로 우리가 먹고 입는 것이 모두 고객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고객을 생명의 원천으로 여기고 부모를 공경하듯 정성껏 모셔야 한다." (236쪽)

그러면서 지은이는 탁월한 서비스 정신이야말로 성공의 중요한 밑거름이라는 것을 확신했던 호설암이 신입 점원들에게 했던 '친절 교육'의 일단을 소개한다.

"호경여당에서는 고객이 점당 안으로 들어오면 점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객을 안내해야 했고 절대로 고객과 등을 맞대고 설 수 없었다. 고객이 안으로 들어설 때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도 안 되고, 고객이 약을 받아 돌아갈 때도 만족한 얼굴을 할 수 있도록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상 241쪽)

지은이는 오늘날의 시장이 판매자 중심의 시장(Vender's market)에서 소비자 중심의 시장(Buyer's Market)으로 전환되면서, 소비자들이 시장을 통제하기 때문에 모든 기업과 상인들이 고객을 이윤의 원천으로 간주하여 '고객지상', '고객제일' 등의 구호를 제창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고객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호설암의 경영관은 상품 경제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 중국에 이미 존재했다면서, 고대 중국 철학자이자 법가의 대표인물인 한비韓非가 <한비자>에 전하는 이야기를 인용한다.

"전국시대 송나라에 넉넉한 인심으로 맛 좋은 술을 판다는 그럴듯한 간판을 내건 주점이 하나 있었는데, 찾아오는 손님이 별로 없어 술이 오래 묵다 보니 맛이 시큼하게 변질되고 말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주점 주인은 동네의 장로인 양천을 찾아가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양천은 술집의 개가 너무 사납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린아이에게 술을 받아오라고 시켜도 아이들이 사나운 개를 보고 두려워하여 감히 이 술집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242쪽)

우수한 품질뿐만 아니라 훌륭한 서비스도 경쟁력이 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상업 세계가 터득한 공식이다. 그래서 감정노동이란 말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훈련이 부과됐다.

미소(Smile): 고객을 편안하고 기분 좋게 해주는 미소는 고객을 대할 때 서비스 제공자 의 기본업무며, 기업 이미지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환한 얼굴, 단정한 용모, 명 랑한 음성, 정중한 태도를 통해 고객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신속(Speed): 적절한 신속성을 유지하면서 정확성을 겸비하는 게 요점으로, 고객을 기다리게 하거나 고객이 먼저 찾게 해서는 안 된다. 신속한 일처리는 업무의 표준화와 동시에 완수된다.

성의(Sincerity): 진정한 마음으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서비스 제공자의 기본자세. 서비스 제공시 고객을 가족이나 친척으로 생각한다면 훌륭한 서비스를 할 수 있다.


무척 흥미롭게도 방금 인용한 성공하는 서비스업을 위한 '3S 원칙'이나 호설암이 남겼다는 '양명의 법칙'은 똑같이 고객을 부모나 가족 대하듯 하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정확한 연대는 헤아릴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서비스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 나이 든 고객에게 '어머니, 아버지'라는 호칭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요상한 풍조가 막 시작되었을 때 언론이나 각종 칼럼은 그런 얄팍한 상술을 패륜으로 비난하기도 했건만, 요즘은 통 말이 없다. 추측컨대, 저 몰상식한 호칭이 나오기 시작했던 어름부터 한국 사회는 단순한 친절 봉사에서 감정노동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인류에겐 두 가지 노동만 있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노동이 이렇듯 간단히 구분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망치를 든 블루칼라(blue collar)와 펜을 든 화이트칼라(white collar)를 나눌 수 있었고, '육체를 쓰느냐, 두뇌를 쓰느냐'라는 단순한 흑백 논리에 기초한 혁명의 청사진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육체도 정신도 아닌, 감정을 사용하는 또 다른 노동이 생겨남으로 그런 이분법은 폐기되거나, 기왕의 이분법에 더 복잡한 분석이 필요한 계기를 맞았다.

▲ <감정노동>(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현대 사회에서는 1차 산업과 3차 산업 종사자가 역삼각형을 이룬지 오래고, 제조업 종사자는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전망이다. 그래서 고객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서비스를 전달하는 노동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노동>은 서비스업이 생산력의 주종을 차지하는 현대의 상황이 새로운 노동 통제 기술을 발전시키고, 감정노동에 혹사된 결과 전통 사회와 전혀 다른 감정을 지닌 인간이 만들어 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비교적 잘 구분되어 있었던 산업화 시대엔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중에 감정까지 고용주에게 저당 잡히는 일은 잘 없다. 하지만 경쟁적인 서비스업이 비대해진 현대에는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 불문하고 감정노동까지 함께 수행해야 하는 새로운 노동이 탄생했다. 좋은 예로 항공승무원들은 육체노동(예를 들어, 기내 복도 사이로 기내식 카트를 끄는 일)과 정신노동(예를 들어, 비상착륙이나 탈출에 대비하는 일)은 물론이고, 그 보다 더 비중 있게 감정노동을 행해야 한다.

잠시 본 것처럼 이 책은 감정노동의 본질을 파고들기 위해 가장 가혹한 감정노동의 현장인 항공승무원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항공기 승무원들이야말로 "승객이 항상 옳은 건 아니겠지만, 승객은 절대 틀리지 않습니다"(179쪽)라는 정신분열증적 강령에 따라 근무하는 고강도 감정노동자들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감정노동에서는 직업 유형에서 흔히 사용되는 구분 방식"(27쪽)이 무용하다는 것도 동시에 강조한다.

실제로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항공승무원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본래 업무 이외의 감정노동을 강요받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유 업무와 함께 고객에 대한 친절 임무를 수행해야 하며, 그 결과는 본부와 고객 사이에 이루어진 사후 통화를 통해 즉각 상부에 기록된다. 이처럼 고객과 접촉하는 거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여러 단계의 감시와 조회를 거쳐 포상과 재교육이라는 절차를 밟게 된다.

전통적인 노동자는 정해진 시간 동안 자신의 육체와 두뇌를 고용자에게 바쳤다. 마르크스의 용어로 하면, 그 시간 동안만 노동자는 자신으로부터 소외됐다. 즉 일하는 시간 동안만 자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 시간에도 감정만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 친절이라는 일망 감시에 포획된 새로운 노동 환경은, 자신의 육체와 두뇌만 아니라 감정까지 바쳐야 한다. 미소 짓고 싶지 않은데도 미소 지어야 하고, 처음 본 고객에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해야 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시작된 사업자간의 출혈 경쟁은 고용인들에게 강도 높은 감정노동을 강요했고, 고용인들은 실제의 감정과 드러난 표현 사이에서 감정 부조화를 겪게 된다. 그런데 감정은 매우 양가적이고 계산에 약하기도 해서 '감정노동으로 무엇을 잃느냐'와 '그 대가로 무엇을 얻느냐'를 저울질한다. 그런 끝에 감정노동자들은 직장의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 보통 자신의 감정을 변화시킨다. 개인전용이던 감정을 상업용으로 변형하는 일이 처음부터 쉬운 것은 아니지만, '감정교육'이 성공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도구로 쓰는 것에 자부심"(122쪽)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자기계발에 성공한 사람들이거나 메소드 연기를 탁마한 훌륭한 연기자들이다.

감정의 착취는 상류층에서 하류층으로, 고용인에서 피고용인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인에서 아동으로…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고 싶어 한다. 그 역이 아닌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진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상층 계급의 가정과 직장에서는 하층 계급에 견줘 더 많은 감정 관리"(207쪽)가 일어난다는 분석도 있는 것처럼, 감정노동은 상하 위계보다 계급 상승에 대한 열망이 높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그런 사람일수록 '감정노동으로 무엇을 잃느냐보다, 그 대가로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하다. 반대로 계급 상승의 열망에서 제외된 사다리의 가장 밑에 있는 사람들은 "감정 법칙에서 거의 완벽한 자유를 누린다. 소외된 자의 자유를 즐기는 것이다." (199쪽)

하층민이라야 비로소 자기감정을 간수할 수 있다는 말은 라면 박스지 속에서 한 겨울을 나야 하는 노숙자들의 고통을 모르고 하는 소리임에 분명하지만, 내면이 바닥까지 탈취되고 감정이 속속들이 식민지화 된 다음에도 우리는 인간일 수 있을까?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황무지로 개간하는 꾸준한 자기계발 끝에 "감정이 성공적으로 상업화된 상황에서는 노동자가 거짓이라는 느낌이나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노동자는 자신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실제로 얼마나 인간적인지에 만족감"(176쪽)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인류에게도 진실된 감정이 있을까?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읽거나 바흐의 음악을 듣고, 슬퍼하거나 기뻐할 수 있을까?

어쩌다 라디오를 듣다보면, 왕왕 '어느 가게에서 이런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는 청취자의 투고를 듣게 된다. 아아, 많이 '묵었다 아이가', 이제 그만 하자! 못난 놈들끼리 친절로 서로 벌점을 주는 사회, 친절이라는 일망 감시 속에서 서로 감시꾼 노릇을 하는 사회, 친절이 스펙(specification)이 되고 경쟁력이 된 사회는, 우리가 진실로 친절해 질 수 없는 사회 곧 만인 대 만인의 결투장일 뿐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결투장에 우리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사회가 불친절의 지옥으로 화하는 것은 아니다. 너와 나는 연대가 필요하지, 친절을 요구할 게 아니다. 내가 당신에게 친절을 강요하면,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짜낸 친절을 보상받으려 할 게 뻔하다. 그런 사회에서 친절은 상대방을 베는 칼이다.

하므로 우리는 감정노동자들의 친절 대해 '쿨'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건 감정노동자들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나 역설적인 사회 안정(?)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오로지 나를 위한 이유도 있다. <상경>을 한 번 더 들춰보자.

중국의 전통 비단 상점인 서부상(瑞蚨祥)은 고객을 매우 중시하여 남들과 다른 독특한 영업 방식을 갖추고 있었다. 고객의 신분과 구매하고자 하는 물건에 따라 각기 다른 예우 방식을 쓰는 것이다. (…) 료고(了高:점원)들은 항상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했다. 특히 2층으로 모시는 특별 손님들에겐 차와 담배를 제공하 는 등 최고의 서비스를 아끼지 않았다. 진열대 앞에는 긴 의자와 차 주전자 등을 마련해 두었고, 여름에는 차가운 음료수도 준비하여 고객에게 편안하고 쾌적한 구매 환경을 제공 했다. 이처럼 치밀하고 친절한 서비스 덕분에 서부상의 각 점포에는 연일 손님들의 발길 이 끊이질 않았다. (243~244쪽)

기업이 인위적으로 제공하는 친절은 감정노동을 해야만 하는 감정노동자의 뼈골만 아니라, 결국은 당신의 뼈골마저 뽑아낸다. 기업이 제공한 친절에 중독되었던 만큼 당신은 기업에 휘둘리기 쉬운 '봉'이 된다. 기업은 당신을 분발시키기 위해 일부러 당신에게 모욕을 줄 수도 있다. 당신은 사소하지만 더 많은 친절을 제공받는 특별고객과 다르게 취급받는 것을 알고 이를 악문다. 감정노동자가 자신의 감정노동을 매달 고용주에게 평가 받듯이, 당신 또한 '얼마만큼의 친절(서비스)을 받을 수 있는지' 등급이 매겨진다. 이런 것을 감정노동 사회의 쌍방향 소통이라고 명명하면 어떨까?

"감정노동은 사람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만들어내야 하고, 감독자를 통해 감정노동을 감시당해야 하는 직업"(199쪽)에서만 생겨난다. 그런데 그 숫자는 워낙 커서 미국의 경우 미국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이 감정노동을 포함하는 직업에 속한다고 한다. 미국과 똑같이 제조업이 급속하게 고사해 가는 한국에서도 감정노동의 증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게다가 아무나 붙잡고 천연덕스레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보아 우리나라의 감정노동 시장(이 말은 고용자들이 쓰는 말이라고 한다)의 강도는 어느 나라, 어느 직종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한비자>에 나오는 춘추전국시대(B.C. 770~476)의 일화와 100년 전 호설암의 경영 원칙을 보면, 세계는 오래 전부터 감정노동을 준비해 온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감정노동이 예전의 감정노동과 다른 것은, 감정이 무한 착취당한 끝에 내가 누구의 감정을 대신 느끼는지 모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교묘하게 '진정'에 '거짓'이 들어가고, 자연스러운 것에 인위적인 것이 들어가는 현실은 사실 이미 널리 퍼져 있는 문제다.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사람들이 감정을 사용하는 데 따르는 인센티브에 관해 점점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에도 마 찬가지로 적용된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사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육체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과 같다. 둘 다 대량 생산의 법칙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만 조작되고, 대량으로 생산되고, 능률 향상과 태업의 대상이 되는 그 생산물이 미소, 분위기, 감정 또는 관계인 경우, 이것은 더욱더 자신보다는 회사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부분 공공연하게 개인을 찬양하는 나라에서,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질문의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뿌리를 찾지 못한 채 개인적인 궁금증을 갖는다. 나는 정말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248~249쪽)

아주 옛날 노예주는 노예들에게 곡괭이를 주며 자신의 밭을 갈고 광산(鑛山)을 파게 했다. 하지만 오늘의 고용주는 우리들에게 곡괭이를 쥐어 주며 이렇게 말한다 : '자, 너의 내면을 갈고 너의 감정을 파라!' 이제 감가상각은 고용주의 설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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