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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앞에서' 힘자랑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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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앞에서' 힘자랑 하지 말자! [프레시안 books] 최재봉의 <언젠가 그대가 머물 시간들>
이 책의 제목 "언젠가 그대가 머물 시간들"은 죽음의 시간이나 열반의 시간이 아니라 사랑의 시간을 말한다. 너무나 그리운 시간이다. 외우기 쉽지 않은, 그러나 유한한 삶 속의 궁극적인 것들을 떠올려 보게 하는 이 제목을 보자 이런 문장이 생각난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과도 같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죽어가는 한 여인이 있다.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우렁차게 방귀를 뀐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친다. 방귀를 뀔 수 있다니 나는 아직 살아있는 거야! 이 글을 읽고 나서 이 일화를 이렇게 바꿔 보았다. '사랑을 할 수 있다니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거야!'

▲ <언젠가 그대가 머물 시간들>(최재봉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최재봉의 <언젠가 그대가 머물 시간들>(한겨레출판 펴냄)은 영원히 정열적인 사랑이란 없고 모든 사랑은 절정과 추락을 겪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저자가 그려낸 한국 문학 속 사랑의 풍경이다. 그러나 영원하고 절대적인 사랑이 존재함을 믿지 않는 태도가 곧바로 사랑의 허무함, 부질없음, 체념을 지지하는 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보다는 차라리 고통과 시련이 없는 사랑을 믿지 않는 쪽에 가깝고 사랑은 낭만적 유토피아적 환상이라기보다는 살아있게 함, 견디게 함, 약속하게 함, 다짐하게 함,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미래를 꿈꾸게 함, 즉 타인으로부터 나에게로 오는 '생명'이라고 믿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이 글에 나오는 서른 두 개의 사랑 이야기는 사랑 자체보다 삶을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사랑이 비록 칼날과 가시를 예비해 두었더라도 그 길을 따라가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을 들어 "삶의 진실에도 빛과 어둠, 영광과 굴욕이 존재하듯, 사랑에서도 밝고 화사한 것만을 좇으려 해서는 반편이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일그러졌어도 있는 그대로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부름을 따라 가라고, 그러면 길이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일 것이다. 저자가 이 말을 한 이유는 쉽고 화려한 것만을 좇는 세태를 비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나 혼자선 꿈 꿔 볼 수도 이룰 수도 없는 또 하나의 놀라운 가능성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뭘까? 뭐라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고 수없이 시도해도 결국 그 외엔 다른 뭐라고 어떻게 불러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랑은 좋은 만남과도 사귐과도 연애와도 다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비인간적이고 불안할수록 사랑은 절박하고 매혹적이다. 사랑이 있는 한 우리 사회에 대해 쉽게 절망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일 것 같다.

그래서 가난한 사랑, 이루어지지 못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보다 "시험대에서 분석하면 모든 사랑은 다 가짜로 밝혀진다"는 은희경 소설 속의 사랑이나 마치 연금 보험을 들듯이 조건을 따져 결혼하려는 정이현 소설 속의 사랑이 더 초라하고 비참하다. "우리 시대의 사랑이란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개인의 욕구를 일일이 통제하는 시장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패턴을 반영할 수밖에"(엘리자베스 벡) 없더라도 우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 고유한 것, 유일한 것, 내 손으로 만지고 접촉할 수 있는 것, 내 내부로부터 간절히 원하는 것,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름이나 성별, 직업과 신분같이 사회가 나를 규정하는 온갖 것들 말고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랑은 반란이고 저항이고 새로운 시작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것은 왜 사랑이 아닌가?'라는 부제 하에 실린 글들이 크게 와 닿았다. 이 질문이 '이것이 사랑이다' 보다 사랑에 대해 훨씬 많은 말을 한다.

'이것은 왜 사랑이 아닌가?'에는 공선옥의 단편 <지독한 우정>이 나온다. 이 단편은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화자인 스무 살 아가씨 수정의 어머니는 뇌성마비 장애인이고 어머니의 남자 친구 아저씨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전다. 셋은 어느 날 주문진으로 여행을 간다. 다리가 불편한 아저씨는 수시로 쉬어야 하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저씨의 다리를 힘껏 주무른다.

그렇게 도착한 주문진의 찜질방에서 그들은 이런 말을 듣는다. "웬 병신들이 지들도 사람이라고 육갑을 하고 있다냐. 나 원 참 둘이 보듬고 오들오들 떨고 있고만." 다행스럽게도(?) 이 말은 수정 어머니 일행을 두고 한 말은 아니고 왜소증 여인을 향한 말이었다. 한밤의 찜질방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다반사이다. 그러나 '그것도 장애인이 하면 징그러운 일이 되는구나'라고 수정은 생각한다. 이 깨달음이 어떤 일을 불러일으키는가?

사랑은 모든 일의 끝이 아니다. 사랑에서 모든 일이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동사다. 행동하고 변화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동사다.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스 벡은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1990년대 이전에 사랑은 명사이거나 동사였다. 그러나 사랑은 점점 더 사랑 중독자나 사랑 상용자처럼 형용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사랑이 형용사가 되었다는 것은 사랑이 이제 무언가에 종속되고 무언가를 꾸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까? 그러나 사랑이 동사라면, 혹은 명사라면 그 때 사랑은 하나의 구체적이고 고유한 실재-비록 그것이 불확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를 지칭하고, 이 실재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를 이어주고, 이 이어짐에서 새로운 '나'와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이유로 사랑이 끝나지 않는 성실한 노력과 움직임이란 것을 잊는다면 결국 우리는 사랑을 잃고 나를 잃고 세계를 잃어버릴 것이다.


저자는 "사랑은 그만큼 강렬한 것이다. 그러니, 사랑 앞에서 힘자랑 하지 말자. 다친다!"라는 말로 이 글을 끝낸다. 이 말은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는 광인이요. 바보요. 속수무책의 패배자요 약자라는 말이 아닐까?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꿔보고도 싶다. 사랑 앞에서 힘자랑 하지 말고 대신 '사랑으로' 힘자랑 하자. 사랑의 힘으로 살자.

사랑은 언제 힘을 발휘하는가? 타인의 초라함, 비굴함, 술수, 온갖 인간적 약점, 패배, 불명예, 죽음, 지루함까지도 이겨낼 때 그 힘은 빛나는 것이 아닌가?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나조차도 잃는다.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싸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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