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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500년 조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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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500년 조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가?"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오항녕의 <조선의 힘>
조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가? 편은 두 패로 나뉜다. 한편에겐 망했기 때문에 부끄러운 역사며, 또 한편에겐 500년이나 유지되었으니 뭔가 있다는 것.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을 쓴 오항녕은 이런 흑백논리를 타박할 것이다. 역사는 '콩쥐 팥쥐'나 '좋은 편 우리 편'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조선을 평가하는 잣대는 꼭 그것과 같다.

'근대주의' 역시 우리의 눈을 왜곡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근대의 어떤 현상을 비판하면 곧바로 전통주의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참 단순하다. 근대주의에는 목적론과 진보주의가 깔려 있다. 인류 사회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진보해왔다는 관점이다. 분명 근대 사회에는, 신분 해방, 민주주의, 의료 혜택 등, 사람들의 삶을 더욱 편안하고 쾌적하게 만든 성과가 있다. 문제는 그 근대를 절대화하는 데 있다. '근대=선'/'조선=전통=악'이란 도식이다. 과장이 아니다. (8~9쪽)

민주주의·인권·평등·자유·선거·대중 교육·시장·남녀 평등·헌법과 법치 등의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인들은, 왕조 시대나 중세와 같은 전근대를 도덕주의적으로 포폄한다. 근대인들의 이런 믿음은 '진보'를 기준으로 역사 발전을 판단하는 근대 역사학 담론과 결합되면서, 근대는 '좋은 편' 전근대는 '나쁜 편'이라는 선악 구도를 짜놓았다.

그런 구도 속에서 역사 공부는 더 할 게 없어지는데, 이 구도는 ①과거의 역사에서 보편주의를 길어 올리지 못함으로써 역사와의 대화를 아예 필요 없게 만들고, ②근대 자체를 완전무결한 역사의 종결자로 만든다.

하지만 근대를 절대시 하는 근대 역사학 담론과 거리를 두고자 한다는 오항녕은, 아무리 시대가 달라도 인간이나 인간 문제에서는 늘 보편주의를 찾아낼 수 있으며, 크로마뇽인 이후 인간의 육체나 욕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시대에 살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 결국 그들이 산 흔적을 살펴보면 내가 살 흔적도 알게"(6쪽) 된다는 것이다. 또 "반성되지 않은 근대는 또 다른 질곡"(7쪽)일 뿐이라며, 근대의 억압성과 획일화는 오히려 억압과 획일을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 <조선의 힘>(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도합 8개의 장으로 구성된 <조선의 힘>은 이런 역사관 위에서 개진된다. '문치주의의 꽃 실록, 그 돌덩이 같은 저력', '헌법과 강상'은 조선이 다른 어떤 왕정이나 정치 체제와 달리 문치라는 가치를 중시 했던 나라라고 말한다. 임금을 성인으로 유도하기 위한 경연과,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역사는 없을 수 없다'는 대역(大逆)의 모순 어법을 가진 실록, 그리고 예(예치)와 법(법치)이 조화를 이룬 통치 구조는 서양의 왕정이나 정치 문화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또 '오래된 미래, 조선 성리학', '당쟁과 기에 대한 오해'는 조선 500년을 버티게 한 근저에 사림과 성리학이 있었음을 새삼 논하고 있다. 중국에서나 조선에서 성리학(주자학)은 처음부터 주류가 아닌 '금지된 학문(僞學之禁)'이었다. 사상적으로 성리학은 불교를 극복하려는 고투 속에서, 정치적으로는 왕과 훈구 세력의 전횡과 사리사욕에 응전하면서 완성됐다. 흔히 조선을 쇠약하게 한 원인으로 사림과 당쟁을 꼽는데, 사림은 세조의 왕위 찬탈과 연산군 이후 거듭된 사화로 말미암아 집현전이 해체된 탓에 생겨났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유럽 각지에 수도원이 생겨난 것과 같다.

조선 시대를 부정적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대표적인 관점이 앞서 말했던 당쟁이다. 고작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가'로 온 조선의 지식인들이 공리공담을 하는 통에 조선 사회를 발전시킬 탄력성과 외부 정세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지은이는 당쟁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지나친 대립 구도에 집착하게 되면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식민사관에 매몰될 뿐 아니라, 현대인들이 역사를 판별하는 기준인 '전근대/근대'·'지배 계층/민중'이라는 이분법을 아무런 실증 없이 휘두르게 된다고 경고한다. 대동법이나 인조반정, 북벌론 같은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은 당쟁 대립 구도가 아닌 정책과 그 시대의 진정성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인 학자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잘못 심어준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의 성리학을 퇴계의 주리론과 율곡의 이기론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당쟁과 기에 대한 오해'에 소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대중적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교과서에까지 파고든 오해는, 오늘의 한국인들이 광해군을 명과 후금(청) 사이에서 실용주의 노선을 취하다가 쫓겨난 비운의 왕으로 숭앙하는 것이다.

'부활하는 광해군'에서 지은이는 '광해군의 귀환'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일본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가 최초로 "광해군을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라고 해석"(199쪽)하면서부터라고 주장한다. 1908부터 1914년까지 만주철도회사에서 만주사를 연구하고, 1915부터 1922년까지 육군참모본부와 육군대학에서 동양사를 강의했으며, 1922부터 1937년까지 조선사편수회의 간사로 활동했던 이나바는 <광해군 시대의 만선 관계>를 저술하면서 왜 광해군을 띄웠을까?

이나바의 연구 요점은 명의 원병 요청을 거부하고 후금과 화친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외교를 현실적인 정책으로 예찬하는 거였다. 오항녕은 이나바의 연구가 전형적인 타율성론이라면서 "조선사의 변화 및 규정성이 중국이나 일본의 외부 조건에 의해 좌우된다는 식민사관"(234쪽)으로 본다. 조선사는 중국사의 변동에 따라 결정된다는 타율성론은 조선의 정체성론과 연결되면서 성리학의 공리공담론·사대주의론·당쟁론·명분론과 같은 왜곡된 담론을 끌어 모은다. 즉 광해군이 실리주의자로 높이 평가됨으로써 그를 폐위시킨 반정 세력은 자연히 '명분론=사대주의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식민지 지식인과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신호를 주었다.

이나바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실리주의 외교를 펴면 식민지 조선이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충고였을까? (…) 그것이 곧 식민지인으로 전락한 사람들을 골수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투항시키는 유력한 수단이라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만선사관'의 자주성을 부인하는 실제 논리적 메커니즘이 여기에 있다. (239쪽)

1931년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1932년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불러 들여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이런 사정에서 일본은 '일본-조선-만주'를 팔굉일우(八紘一宇)로 엮는 동질적인 역사 해석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1933년에 출간된 이나바의 연구는 확실히 조선 민중의 저항 의지를 꺾고, 기회주의적이 되라고 유인한다. 그런데 이나바의 광해군 해석은 이후 이병도의 '중립 외교'라는 해석으로 이어지고, 지금은 교과서에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물론 이나바의 광해군 해석이 오랫동안 만주와 만선(청과 조선)을 연구했던 그의 학문적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오항녕이 '부활하는 광해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근대라는 잣대로 조선 시대를 평가하면 할수록 일제의 식민사관에 포박되고 만다는 역설이다. 즉 명에 대한 사대나 중국에 대한 조공 체제를 근대 국가 사이의 '평등'이라는 기준으로 평가하고자 할 때, 조선은 타율적이고 정체에 빠진 나라로 폄하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근대 역사학 담론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오항녕의 문제의식이 두드러지게 빛을 발한다.

오항녕은 책을 여는 프롤로그의 첫 문장에 "이 책은 500년 이상 지속했던 문명의 저력을 찾는 글들로 엮여있다"(5쪽)고 썼고, 책을 닫는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을 "조선 시대는 선택 가능한 오래된 미래 중 하나일 것이다"(312쪽)고 맺었다. 하지만 그의 전공에는 한참 문외한이라고 해야 할 나의 지극히 개인적 소감은, '조선 문명의 저력'을 느끼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돌아가야 할 미래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오항녕은 "조선은 문치주의 사회였다. 학맥을 통해 정치 세력을 형성했고, 그 사상과 이념에 따라 정책과 노선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정책과 노선을 통해 백성들의 삶 속에서 검증을 받고, 그 검증을 통해 권력을 차지하느냐 못하느냐가 결정되던 시대였다"(230쪽)고 예찬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학자가 더 잘 한다는 논리도 의심스러운데다가, 전형적인 신분 사회의 논리다. 성리학이 철저히 사대부들의 학문이며, 계급적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논리로 덧칠해 봤자다.

흔히 유가의 학문을 치자의 학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렇기에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라고도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이상이 있다. 그런데 현실 사회에서 그 이상의 실현을 저해하고 빗나가게 하는 존재는 치자이지 피치자가 아니다. 물론 일반 인민들도 종종 다른 사람들의 삶을 상하게 하는 일을 저지르지만, 그런 일의 파장이나 범위는 일회적이거나 부분적이다.

반면 권력이든 부든 학식이든 가진 자들이 저지르는 폐해는 일반 인민들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이는 따로 실례를 들지 않더라도 늘 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관리 대상은 일차적으로 가진 자들에게 맞춰져야 한다는 유가의 상식은 말 그대로 상식적이다. (33쪽)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위의 인용은, 말의 중층적인 성격이 글쓴이의 의도를 종종 배반하고 마는 적확한 예라고 생각한다. 오항녕은 저 논리를 통해 '유가의 학문이 치자나 지배층 이데올로기가 아니다'고 주장하려고 했지만, 저 말은 고스란히 자신이 부인하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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