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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들이 왜 고전을 읽지? 다들 철학 박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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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들이 왜 고전을 읽지? 다들 철학 박사잖아!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
기현상이라고 해야 할 만큼, 인문학과 고전 읽기가 유행이다. 이런 현상이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할지도 모른다. '자유 학예'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학이란 원래 인문학을 배우고, 고전을 확정하는 곳이니까. 그런데 요 몇 년 전부터 벌어지고 있는 인문학과 고전 읽기 붐은, 대학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플라톤이 노숙자들과 교도소를 파고들고, 구청의 평생교육원과 구립 도서관에서 운위되고 있다.

이 징후를 다 해석할 능력은 없지만, 인문학과 고전이 대학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대학이 죽었다는 것. 대학이 죽어 자신의 골분(骨粉)을 노상에 흩뿌린다는 게, 오늘의 인문학 열풍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면 너무 냉소적인가? 대학이 제대로 된 인문학을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에, 장외에서 벌어진 야시장이 바로 교문 밖의 인문학 강좌라는 설명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대학교에서 인문학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지 않기 때문에 교문 밖의 대중 강의를 찾게 되었다는 학생을 나는 심심치 않게 봤다.

첫 번째 이유가 냉소적이라면, 두 번째 이유는 같은 현상을 다르게 설명한다. 한국인들은 초·중·등학교에서는 물론이고 대학교에서마저 교육다운 교육을 받아 보지 못했다. 즉 시험 지옥 속에서 점수 벌레로 사육되면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삭제된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거기에 대한 갈증이 상당하다는 것은, 대중 강의실을 가득 매운 수강생들이 대부분 중·장년층이라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들은 학창시절에 한 번도 인문학이나 고전을 통해 그런 질문을 새겨본 적이 없다가, 사회에서 또 한 번 호된 경쟁과 낙오를 경험하면서, 거울 앞에 다시 돌아와 선 사람들이다. 글을 읽고 쓰는 먹물의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고 조소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회귀에는 일말의 서광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졸업장도 자격증도 없는 대중 강의에 그토록 많은 도반이 뭐하러 모였겠는가?

인문학 붐에 앞장 선 최고의 강사이면서, 최고의 공로자를 꼽으라면 단연 강유원이다. 수유너머나 철학아카데미와 같은 조직적이고 공동체화된 인문학 공부 모임도 없지 않지만, 강유원은 '단독 비행'으로 인문학 열기를 일구었다. 그는 2009년 한 해 동안, 동대문정보화도서관에서 매주 2시간씩 40주 동안 12권의 고전을 강독했다. <인문 고전 강의 : 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라티오 펴냄)은, 그때 열강 했던 강의를 정리한 강의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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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 고전 강의>(강유원 지음, 라티오 펴냄). ⓒ라티오
당대의 시대정신은 '바로 그 시대의 필독서(reference)'가 무엇이었느냐?'로 측정된다는 말은 지은이가 강의 중에 번번이 강조했던 말이다. 그와 똑같은 말이 이 책에서는 "한 사회의 준거 틀로 작용하는 텍스트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사회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알 수 있다"(332쪽)는 말로 변주되고 있다.

단테의 <신곡>이 필독서이던 시대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필독서인 시절은, 훌륭한 삶의 기준은 물론이고 현실 정치에서부터 내세에 이르는 가치관을 완전히 달리하게 된다. 말하자면 공·맹(孔·孟)이 한국인들의 필독서였던 조선 시대와 <회계학 원론>을 필독서로 강권하거나 자기 학교의 역사('고대학'이라던가?)를 학문으로 규정한 우리 시대는, 서로 다른 인간을 만들게 된다.

재테크와 자기 개발이라는 시대정신이 몰각시켜버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내고, 그 앞에 서기 위해, 강유원이 선정한 고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스 윤리학>, <신곡>, <군주론>,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로크의 <통치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벤담의 <파놉티콘>,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공자의 <논어>.

선정된 교재가 서양 고전 일색인 것은 지은이의 전공이 서양 철학이었던 때문으로 이것은 동·서양 간의 회통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증명해 줄 뿐, 큰 흠결은 되지 않는다. 짧은 내 생각으로 참견하자면, 베버와 벤담의 저 책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질 만한 것일까라는 정도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강의를 도서관에서 보내주는 녹음 파일로 매주 들었다. 강유원의 강의는 도올 김용옥 이후로 내가 접했던, 가장 개성 있고 풍성한 강의였다(아쉽게도 책을 만들면서 현장감과 현실 비판이 많이 정제되었다). 이 독후감을 쓰는 내 자신이 여기 나오는 책들을 다 읽지도 못한데다가, 읽은 것마저도 지은이만큼 정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문 고전 강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것이 없다. 대신, 고전을 해설하고 있는 이 책의 또 다른 장점 하나는 독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다. 이 책은 해당 된 고전 해설을 넘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귀중한 방법들을 곳곳에 개진하고 있다. 그게 이만한 고전을 이만한 수준으로 풀어낸 이 책의 '고전적' 위치를 더욱 굳건하게 해 줄 것이다.

사족이다. 언론을 보면, CEO들도 인문학과 고전 읽기 삼매경에 빠져있다는 기사가, 마치 '미담'처럼 소개된다. 그런데 그분들은 뭐하러 인문학을 배우고 고전 읽기를 하실까? 소비자와 피고용인을 더 효과적으로 쥐어짜기 위해? 노조와 공생하고, 비정규직 비율을 차츰 줄이고, 하청 업체 괴롭히지 말고, 남녀와 지역 차등하지 말고, 기부에 인색하지 않고, 환경 오명에 신경 쓰고…뭐, 이런 게 당신들의 인문학이고 고전 읽기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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