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과 성장 그리고 효율성의 가치만을 강요해온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연대와 분배 그리고 형평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는 우리 시민들이 이제 미국이 아닌 유럽사회를 유심히 관찰해보길 원합니다. 특히 유럽의 합의제 민주주의와 조정시장경제가 어떻게 그곳 시민들의 삶을 그토록 느긋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길 바랍니다.
'유럽르포'의 작성자들은 현재 유럽의 여러 대학원에 유학 중인 정치경영연구소의 객원 연구원들입니다.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유럽을 배우러 간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고하는 생생한 현지의 일상 생활을 <프레시안>의 글을 통해 경험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유러피언 드림'을 같이 꾸길 염원합니다. 필자 주
'세입자가 집 임대 계약을 부동산 수수료 없이 하고, 9년간 그 집에서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그리고 임대료 상승 걱정, 보증금 떼일 걱정이 없다.'
벨기에의 세입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세입자의 범위는 자국민뿐만 아니라 벨기에에서 거주허가를 받은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벨기에 및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꽤 흔한 세입자 보호 정책이지만, 한국에서는 이제야 국회에서 관련 논의가 시작되었다. 2012년 대선 때 낙선된 후보의 '전·월세 상한제'와 '자동계약갱신 청구권' 공약과도 연관된다.
하지만 세입자 보호 정책은 항상 부동산 활성화 정책에 밀려 언론에 큰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집 소유주들의 엄청난 반대가 예상된다. 하지만 세입자의 설움을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할 예정인 사람들이라면 벨기에의 세입자 보호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만하다. 세입자 보호 정책의 적용 가능성을 다루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는 것이고, 그것의 여부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래도 벨기에 세입자 보호 정책과 우리의 현실을 한번 비교해보고, '우리는 뭐가 다른가'라는 정도의 질문을 던져보려고 한다.
약자인 30%를 위한 주거 정책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자기 집을 소유하기 원한다. 이에 정부는 이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자가 소유를 권장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금융 및 건설회사는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업을 확장해간다. 하지만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집에 대한 과도한 소유 욕망과 정부 및 금융회사의 건전하지 못한 부채질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집을 무리하게 소유하려던 중산층이 무너지고, 결국 소득 격차가 심화되는 현상도 낳게 된다.
지금 한국의 하우스푸어 문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가 소유 권장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남에도 아직도 한국은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동산 시장 활성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많은 세입자의 문제는 외면하고 있다. 한국에서 자가 소유자 비율은 약 54퍼센트, 전세 및 월세를 포함한 세입자는 43퍼센트로 세입자의 비율이 낮지 않지만 (3%는 무상 등 기타, 2010년 주거실태조사), 아직도 대다수의 세입자들은 정책에서 소외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벨기에의 경우, 세입자가 전체에서 약 30퍼센트(개인임차 약 23%, 사회임대 약 7%)를 차지하는 정도지만 (2013년 기준, Lalaine C. Delmendo), 세입자를 위한 정부의 정책은 오히려 자가소유자를 위한 정책보다 더 촘촘하게 짜여 있다. 참고로 벨기에에서 평균 집값은 브뤼셀의 경우 아파트는 약 3억 원(약 21만 유로), 중층맞벽주택(Townhouse)이 약 5억 원(약 35만 유로), 단독주택(Detached House)는 약 13.5억 원(약 93만 유로)정도이다.(2012년 기준, LE SOIR 참고. 단, 브뤼셀 안에서도 지역별, 동네별 편차가 크기에 평균 집값으로만 시세를 판단할 수는 없다.)
▲ 벨기에 Namur의 주거 배치 : 벨기에 대부분 도시들이 도심에는 타운하우스와 중저층 아파트 건물이 위치해 있고, 외각에는 단독주택이 위치해 있다. ⓒ김준우, 2012 |
벨기에는 가톨릭 기반의 국가로, 현재 독립 국가로의 시작은 1831년 벨기에 왕국으로부터 시작된다. 19세기부터 가톨릭 정당이 각 가구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 주택소유 권장 정책을 시행했던 것이 오늘에 이르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자가소유 비율이 높아졌다. 반면 공공임대주택에는 예산투입이 적어 공공임대주택비율은 1퍼센트 이하 수준으로 인접 다른 유럽에 비해 많이 낮은 상황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전체 주택의 약 40퍼센트 이상이 공공임대 주택이다. Kesteloot, C., 1998) 벨기에의 세입자 보호 정책은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및 서유럽의 프랑스, 스페인보다는 세입자 보호 정도가 높지 않다. 그럼에도 벨기에는 네덜란드, 독일 정도의 세입자 보호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는 임대자보다 세입자를 더 배려한 정책으로 분류되고 있다.
▲ 유럽 국가별 세입자 보호 정도 비교표 : 'Strongly Pro Tenant' 및 'Pro Tenant'는 세입자를 더 배려한 정책을 운영하고 있는 국가이다. ⓒwww.globalpropertyguide.com/Europe/Belgium/landlord-tenant-la |
주택소유 권장에서 세입자 보호를 위한 정책으로
벨기에는 19세기부터 가톨릭 단체와 사회주의 단체가 시민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지역별로 노동조합, 협동조합, 민간단체들을 조직하면서 시민사회를 형성해왔다. 이들 단체는 교육, 의료 및 지역 경제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지역별 특성에 맞게 사회복지를 실천했다. 정당체제 역시 가톨릭 정당과 사회주의 정당이 자유주의 정당과 함께 주요 정당으로 활동을 하였고, 이 정당들을 중심으로 사회정책들이 발전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벨기에는 자유경제 체제 안에서도 고유의 복지국가 모델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됐다.
주거에 관련해서는, 19세기부터 시작된 주택소유권장 정책이 20세말까지 지속됐다. 특히 1960년대 경제 성장에 힘입어 자가소유 비율이 높아졌고, 이를 위해 정부는 보조금, 저리 대출, 정부 보증, 보험 등의 방법으로 자가소유를 지원했다. 이러한 주택소유권장 정책은 1990년대까지 유지되었지만,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안정되지 못한 삶을 사는 저소득층을 지원하기 위해 이후 세입자 보호 방향으로 정책이 변경되었다. 이를 위해 1991년 임대법(De huurwet)이 재정됐고, 세입자의 거주기간, 임대비용에 관한 내용이 제도화됐다. 또한 플랜더스(Flanders) 지역의 경우, 1997년 통과된 주거기준(the Flemish Housing Code)으로 일반 임대 주택의 주거환경 기준이 설정되었고, 이 기준을 따르기 위해 임대인이 리모델링 시 임대료 인상을 할 수 없게 하는 등 세입자를 배려한 정책이 더해지게 됐다.(Pascal De Decker, 2003)
임대자 이상으로 보호받는 세입자
△ 계약 기간 및 연장
세입자 보호 정책은 저소득층만이 아니라 모든 세입자들(벨기에에 거주허가를 받은 외국인을 포함)에게 공통으로 적용되고 있다. 우선 계약기간은 3년 기본 계약에 최대 6년까지 추가로 연장할 수 있다. 기본 계약인 3년 이전에 세입자가 개인 사정으로 이사를 가야 된다면 거주기간에 따라 계약해지 비용을 지불해야 된다.(1년 이전에 이사를 갈 경우 3개월에 해당하는 월세, 2년 이전은 2개월 치 월세, 3년 이전은 1개월 치 월세) 그리고 3년 동안 거주를 했다면, 세입자들에게 특별한 조건 없이 추가로 6년까지 연장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계약 연장은 3년 차 계약완료 6개월 전까지 임대자에게 통보하면 된다. 3년 이후에는 세입자가 개인사정에 따라 이사를 가도 별도의 계약해지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 임대자가 세입자와의 계약을 해지하기는 더 어렵고 비용이 더 많이 발생한다. 임대자가 특별한 이유 없이 세입자와 계약을 해지하려면 6개월 이전에 통보를 하고, 계약해지 비용을 주어야 한다.(3년 이내 해지 시 9개월 치 월세, 6년 이내 해지 시 6개월 치 월세) 만약 집의 재개발 혹은 임대인의 가족이 들어와 살아야 되는 경우에는 계약해지가 가능하지만, 이를 관리 기관에 서류로 증명을 하여야 한다.
△ 임대료 상한제 및 계약의 정부관여
벨기에의 경우, 한국과 같은 전세 제도는 없으며 월세와 시설보증금 제도로 임대가 운영되고 있다. 전세 제도는 집값의 상승이 예상되거나, 은행 이자가 높은 경우에만 유지될 수 있다. 벨기에의 경우 집값이 안정되어 있으며, 은행 이자율도 낮다. 임대료는 매년 물가상승률를 고려한 정부 지표 이상으로 올리지 못하도록 하고 있고(정부공식사이트 Statistics Belgium에서 지표 확인 가능 //statbel.fgov.be), 임대자는 이 범위 안에서 임대료를 정할 수 있다. 임대자가 세입자에게 임대료 이외의 비공식적 비용을 요구할 수도 없고, 발각 시 이득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한다. 그리고 계약내용은 정부의 규정 내용을 따라야 하고, 이와 다른 계약 조건이 들어가 문제가 발생한다면 법원(the Justice of the Peace)을 통해 조정할 수 있다.
△ 시설보증금과 주거환경 유지
월세와 함께 운영되는 시설보증금 제도가 있는데, 이는 계약 종료 후 집을 계약 이전의 상태로 복원시켜야 된다는 조건으로 운영되고 있다. 입주 전과 퇴거 시에 집의 상태에 따라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시설보증금 제도로 임대자 권리를 보호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좀 더 객관적인 판단으로 분쟁을 예방하려면 시설검증 전문가가 동행하여 입주 전에 상태와 이후 상태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임대자와 세입자가 공동으로 비용을 분담하여 진행한다.(보통 입주 전 벽지 등 집 내부가 잘 정리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계약 종료 후에 도배 및 전체 청소를 깔끔히 하여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 이사를 나와야 한다. 임대자는 작은 생활 흔적들에 대해서도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설보증금은 보통 2개월 치의 월세에 해당하는데, 이를 입주 시 임대자에게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은행에 해당되는 돈에 대해 출금 정지를 걸어두는 방식으로 처리를 한다. 향후 계약 종료 후 집의 상태를 함께 확인한 후, 임대자의 동의를 얻어 정지된 보증금을 인출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는 향후 보증금 반납과 관련한 분쟁을 예방하는 세입자 보호 정책이라 볼 수 있으며, 해당 보증금의 이자는 세입자에게 속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 부동산 수수료
마지막으로 작지만 중요한 세입자 보호 정책으로 부동산 중개수수료에 관한 규정이 있다. 벨기에에서는 다른 유럽과 다르게 부동산 중개수수료가 임대자에게만 부여되고, 세입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시스템이다.(네덜란드만 하더라도 세입자가 중계수수료로 약 한 달 치 월세를 지급하여야 한다.) 이에 세입자가 초기 집을 구하는데 부담을 덜 가지고 부동산사무실을 통해 쉽게 집을 알아볼 수 있다.
▲ 벨기에와 한국의 세입자 보호 정책 비교표 : 계약기간 및 계약 연장, 임대료 상한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최근 국회에서 검토를 시작한 '전·월세 상한제' (연 5% 이하 상한적용)와 '자동계약갱신 청구권'(계약종료 후+2년 자동계약권리 부여)보다 더 적극적인 세입자 보호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
차이에 대하여
벨기에에서는 다수인 임대자들이 소수인 세입자들은 배려한다. 이는 역사적 배경과 공동체 인식이 기반에 있으며, 안정된 주택 시장과 높은 자가소유비율 그리고 전통적으로 지역 중심의 복지 기반도 배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이러한 배경으로 사회적 보호가 더 필요한 세입자들을 배려한 정책이 실시되었고, 큰 반발 없이 정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과는 다른 인구 밀도, 지형, 주거 문화, 자가소유비율 등 깊게 생각하고 찾아볼 차이는 많지만, 이 글을 통해 세입자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의 차이 정도만 우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 세입자 모집을 위한 Open House, Leuven : 벨기에 일부 도시에서는 임대 매물이 부족하여, 좋은 조건의 집의 경우 Open House에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하지만 집주인은 수요가 많더라도 세입자들에게 추가적인 금액을 요구할 수 없다. ⓒ김준우, 2013 |
물론 벨기에에서는 좋은 집을 구하려면 면접 수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임대 조건이 임대자에게 불리한 조건이고 세입자는 입주만 하면 보장받는 내용이 많아지는 유리한 조건이기에, 임대자들은 계약 전에 세입자를 까다롭게 결정한다. 그렇기에 벨기에에서 집을 구하기는 한국보다 더 어렵고, 경쟁도 심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능력, 혹은 회사 근무를 증명할 서류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임대자가 부담해야 할 부동산 수수료 등 관련 비용이 높기에 임대 매물이 많지 않기도 하다. 그럼에도 임대자는 규정 이외의 세입자에게 추가적 금액을 요구할 수 없으며, 제도 안에서 세입자를 배려하며 임대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만약 이 제도를 한국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임대자들이 세입자들에게 부담을 전가 시키지 못하게 하는 방안 연구가 필요로 할 것이다. (다운 계약서 등의 방법으로 서류상의 임대료를 실제 임대료보다 적게 기입하거나, 혹은 권리금 등의 방식 등으로 세입자들에게 부담을 전가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제도의 문제보다는 다른 사회 구성원을 배려하는 문화의 차이로 생각이 된다.
하우스푸어, 미분양 사태 등을 직면한 지금, 여태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추구했던 주택시장 활성화와 부동산을 통한 소득 증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임대자의 사유재산 보호와 세입자 보호 사이에서 제도의 균형을 잡아가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중심의 위치가 치우친 상황에서의 균형유지는 오히려 불평등에 대한 합리화 수단이 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이 있던 때나 협동조합이 주목받고 있는 지금에나 한국사회의 슬로건은 '함께 잘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는 40퍼센트 이상의 세입자들도 함께 잘 살기 위한 고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시작해 볼 시간이 되었다.
참고자료 - Federale overheidsdienst Justitie (2013) De huurwet, 14de Fditie, Maart 2013 - Kesteloot, C., Cortie, G. (1998). Housing Turks and Moroccans in Brussels and Amsterdam: The difference between private and public markets. Urban studies 35 (10), 1835-1853. - Lalaine C. Delmendo, Belgian housing market continues to weaken, amidst worsening economy (Apr 28, 2013) www.globalpropertyguide.com - LE SOIR newspaper, L'immobilier en Belgique est trop cher (Aug 24, 2012) - OECD (2011) Economic Policy Reforms 2011, Going for Growth - Housing and the Economy: Policies for Renovation - Pascal De Decker (2003).The Changing role of the state: State intervention in welfare and housing. European Observatory on Homelessness:Thematic Report 2003 - Tenant protection laws are well-established (May 30, 2006) - Wikipedia, Political parties in Belgium - 주거실태조사 (20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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