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태원, 김난도? 여기 진짜 멘토가 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태원, 김난도? 여기 진짜 멘토가 있다! [프레시안 books] 이계삼의 <변방의 사색>
문자 그대로 멘토의 시대이다. 눈만 돌리면 곳곳에서 멘토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면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단연 주인공은 멘토들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바로 신문 지상에서는 무슨 멘토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게 어떤 감동을 주었다는 것으로 도배된다. 제자들을 위해서 멘토가 있는 게 아니라 멘토를 위해서 제자들이 있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까놓고 말해서 지망생은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멘토란 누구인가? 잘 아는 것처럼 멘토는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에서 나온 말이다. 친구가 집을 떠나 바다를 떠도는 동안 멘토르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돌보고 가르쳤다. 그는 10여 년을 친구의 아들을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스승처럼, 때로는 동료로서 조언하며 그의 성장을 도왔다. 그가 텔레마코스에게 전수해 준 것은 소소한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다. 누구의 표현을 빌린다면 '운명의 파고를 넘나드는' 지혜를 전수해 주었다. 이처럼 원래 멘토란 지혜를 전수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누군가가 멘토-앞으로는 스승이라고 하자-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한다. 멘토의 시대라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멘토들이 망각한 것이 바로 누군가 한 사람의 멘토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험인가? 물론 경험도 필요하다. 지혜인가? 당연히 지혜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있다. 바로 세월이다. 멘토르는 텔레마코스를 오디세우스가 돌아오기까지 10여 년이 넘는 세월을 돌보고 동행한다. 한 사람을 키우는 일은 이처럼 힘든 일이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한 사람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그의 옆에서 최소한 십 수 년을 동행해야한다면 그 스승과 제자는 무엇으로 묶여 있는 존재일까? 땅이다. 두 사람이 발 딛고 두 사람이 동행하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두 사람이 밤이면 등을 대고 휴식을 취하는 그 땅이 두 사람을 묶어 낸다. 한 사람-제자가 긴 여행이나 모험을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는 땅이 있어야하며, 그가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기고 이야기를 듣고 다시 삶을 격려할 수 있도록 다른 한 사람-스승이 지키고 있을 땅이 있어야한다. 그 땅을 우리는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스승이란 이렇게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지 않겠는가? 언제나 스승이란 고향에서 제자를 기다리는 운명이지 않을까.

고백하자면 이것이 내가 스승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나는 땅에 매인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그들이 한 번의 모험을 끝내고 다시 돌아올 때 두 팔 벌려 맞이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삶의 지혜를 일구어내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나는 아직까지 내가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고, 방랑하는 유랑인이며, 한 곳에서 고향을 일구어내지 못한 객(客)에 불과하다. 아직 내 나이가 스승이 되기를 허락하지 않고, 내 처지가 정착을 배려해주지 못하고 있다. 아직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아니, 나는 고향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어떤 출판사에서 내 이야기 한 편이 있는 글을 광고하며 "이 시대의 멘토"라는 표현을 썼을 때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함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내가 주제넘은 짓을 하며 산 업보일 테다.

그러나 한 명의 교사에게서 나는 이미 고향으로 돌아간 스승의 그림자를 만난다. 그가 이계삼이다. 그는 고향 밀양으로 돌아가 교사 생활을 10년 넘게 하고 있다.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던 시절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그 열정 하나만으로 탈출한 그곳으로 그는 돌아갔다. 그 고향에 대해 그는 낭만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다만 그는 그의 고향에 대해 "나는 이곳에서 살다가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섬뜩하지 않은가. 자신이 어디에 매여 있는 몸이라는 것을 이리도 간명하게 고백한다는 것이. 그래도 그곳은 그에게는 '변방'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다. 왜냐하면 그가 잘 이야기하다시피 그곳이 그가 몸 붙이고 살아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 <변방의 사색>(이계삼 지음, 꾸리에 펴냄). ⓒ꾸리에
이 장소에서 그는 아이들을 만난다. 자신이 바로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이 통과하고 있는 그 시절을 '바로 저 자리에서 통과'하였기에 느끼는 '형제애'라고 말한다. 자신은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주지 못하지만 '우정으로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고, 거기에서 '선생 노릇하는 기쁨'을 찾는다고 말한다. 우정과 형제애라. 학생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교사를 본적이 있는가? 땅에 묶여 있는 정서가 아니라면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동남권 신공항이나 천성산이나 4대강과 같은 땅을 망치고 고향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다. 그에게 이것은 삶의 터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는 늘 위태롭고 그는 괴롭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육이 더 이상 땅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땅과 함께 호흡하지 않기 때문이다. 땅과 호흡한다는 것은 곧 그 땅에 묶여 같이 살아가고 있는 다른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명선이의 진학 지도를 다룬 '바쁘냐? 나도 바쁘냐'를 보자. 그는 시몬느 베이유를 인용하며 바쁘다는 것은 타인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한다. 토목이냐 의류냐는 180도로 다른 두 선택지를 앞에 둔 제자에게 자신이 얼마나 주의집중을 하며 정성을 기울였는지, 자신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자괴한다.

우리 교육은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 '2009년 한여름, 서울'에 실린 한 이야기를 보자. 일제 고사 반대 시위를 했다는 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아이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비로소 다른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기운이 하나도 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등교하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셨다고 한다. 이게 교육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이범의 혹세무민'을 보자. 한 학부모가 이렇게 말한다. 이범의 강의를 듣다 보면 '교육 문제'는 사라지고 '우리 아이' 생각만 난다고 한다. 내 아이에 대한 욕심, 내 아이의 출세와 성공에, 내 아이와 다르지 않은 운명을 가지고 있는 다른 아이의 얼굴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건 교육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가 우리 교육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는 절망스럽게도 교육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국어 교사로서, 그는 아이들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음을, 글을 쓰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음에 대해 괴로워한다. 글을 쓰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고전적인 인문학의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말과 다름없다. 인간은 타인에게 글을 쓰고 말을 하며 자신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슬픔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타인에게서 공감되는 딱 그만큼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교사는 어린이(enfant, 말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뜻이다)에게 글과 말을 가르쳐 타인에게 자신을 호소하고 타인의 호소를 경청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아이들이 글쓰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가장 큰 절망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교육은 영토를 모두 잃어버린 제왕이 되었다. 학교는 '삶의 기술도 가르쳐주지 못하고, 성장의 경험도 제공해 주지 않으며, 노동 시장으로의 진입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학교는 욕망과 허영으로 교사와 학부모가 공모한다. 중학교 내신 성적이 20퍼센트 이내에만 들어도 아이들은 2퍼센트 정도나 갈 수 있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노예가 되어야한다. 이것이 한국 교육이 강남 학부모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유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버림받은 아이들은 '자신들을 통제하려고만 하는 학교를 향해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절망한다. 이게 그가 말하는 교육의 불가능성이다.

그럼 정말 우리 교육에는 희망이 없는가.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철저히 절망하지 않는 한, 그래서 이 모든 절망의 뿌리를 성찰하고 관조하지 않는 한 희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계삼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희망이다. 파국과 단절하지 않는 한, 그 희망이란 헛것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는 화급하게 '이 참혹한 파괴를 멈추고, 저 엉터리 사기꾼을 자리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깊은 곳에서 우리는 '돈-헛것'의 노예가 되어 버린 우리 삶과 단절하는 것이다.

그는 그 삶과 단절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도 그의 삶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가 확실히 '귀향'이라고 말한다. 그는 "도회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고, 세입자로 부초처럼 떠도는 삶이 서글펐"다고 말한다. 특히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아이가 몹시 아팠을 때 맡길 만한 이웃이 없었던" 것이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장소'로서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장소는 공간과 다르다. 생각해 보면 근대 사회는 철저하게 장소를 공간화하면서 장소를 파괴하였다. 근대 사회가 가속화될수록 인간은 대지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곧 해방이라고 생각하여 '더 빠르게' 달리는 것으로 대지를 인간에 복종시켰다. 그 결과 '지구촌'이니 '반나절 생활권'이니 하는 네트워크화된 공간이 창출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것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장소'이다. 장소에는 네트워크가 아닌 이웃이라는 관계가 있다. 밀양이라는 작은 도시의 거리에서 "부딪치게 되는 그 누구라도 남 같지가" 않다. 이웃이다. 옆집 사람조차도 남인 이 '무연 사회'와는 다른 삶이다. 그래서 교실에서 바라본 옆 초등학교의 운동회에서 훌라후프를 놓쳐버렸다가 다시 몰래 집어든 아이에게 "내가 봤다. 이놈아" 하고 외칠 수 있다.

또한 장소에는 대지로부터 초고속으로 탈출한 인간이 향유할 수 없는 '풍경'이 있다. 하루에 서너 번씩 다리를 건너며 자신이 '죽고 사라져도' 그대로 남아 후대들이 또 바라볼 밀양의 '영남루'가 있다. 그 풍경이 있는 한 "나의 생이 누군가의 생으로, 또 다른 시간으로 이어질 것임을 생각"하며 그는 설렌다고 한다. 그 풍경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 그는 분노한다. 그의 글이 생태 지향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환경 보호가 아니다. 인간과 무관한 생태 운동이 아니다. 그것이 삶 자체를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4대강 파괴 현장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거닐며' 그 풍경의 파괴에 대해 분노하며 글을 쓴다.

그래서 그의 싸움은 구체적이다. 그 중에서 교육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글이 '죄인의 시대, 시대의 악령'이다. 저 유명한 밀양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제자에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이다. 이 글에서 그는 강력한 처벌을 외치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겁하고 무성찰적이며 비교육적이고 뻔뻔한가에 대해 폭로한다.

단언하건대 우리 사회에서 도덕은 인간이 성숙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과 부도덕에 대한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우리 사회는 스스로는 누군가를 "참회시킬 능력도 자격도" 없으면서 사건이 벌어지면 도덕의 이름으로 단죄의 칼날을 휘두르며 면피하는 사회에 불과하다고 질타한다.

그렇다고 그가 사회의 이름으로 제자를 감싸 안고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제자의 모습에서 "주체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이 세태의 폭력과 야만을 운반한 불쌍한 놈"의 운명을 본다. 제자가 자신의 죄에 오롯이 집중하여 참회하기를 소망하고 기도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사의 무력감과 그 무력감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기다림과 애절함이 절절한 글이다.

그런 구체적인 한 사람 사람과 만남과 대화에서 그가 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보편적 운명이다.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그 운명 말이다. 그 파국과 단절하기 위한 기도이자 노동이 곧 그의 글이다. 이 책에서 딱 한번 등장하지만 그것이 그가 스쳐지나가며 말하는 "기대와 희망"의 차이이다.

기대란 돌진이다. 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면 저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믿고 대지를 박차고 앞으로 돌격하는 것이 기대이다. 내가 이렇게 좋은 선생이고, 우리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돌진하는 것이 기대이다. 그 기대가 배신되었을 때 인간은 분노하거나 냉소하게 된다.

희망은 다르다. 무력감 속에서의 간절한 기다림,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간절한 마음으로 고대하는 것이고, 고대하는 것이 도래하였을 때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밤거리에서 죗값을 치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제자가 자신을 밤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자 피우던 담배를 숨기고 꾸뻑 인사할 때,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간절하게 맞이하는, 그런 기다림이 희망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교육의 불가능성의 시대에 교육의 희망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