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민주통합당-새누리당 헤쳐 모여야 한국이 산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민주통합당-새누리당 헤쳐 모여야 한국이 산다!" [복지 국가로 가는 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작년 봄 쯤의 일이다. 당시 진보신당 대표 조승수 의원은 진보정당이 자유주의 세력인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과 통합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그 논리로 '보수-자유(중도)-진보'의 3정립론을 내세웠다.

조승수 의원이 이러한 3정립론을 주장하게 된 데에는 이 구도가 지금의 정치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또 그러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승수 의원뿐만 아니라 정통 진보 진영의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민주당과의 대통합이나 심지어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도 그토록 반대했던 것이다.

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나는 현상적 정치 구도에 입각한 3정립론으로는 복지 국가를 이룰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장차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을 4정립을 기본으로 하는 다당제 구조로 바라보고자 했다. '보수-중도보수-중도진보-진보'가 그것이다. 아마 이것은 내가 지난 4년 동안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운영위원장 겸 공동대표를 맡아 조직을 키우고, 한국형 복지 국가의 담론과 정책을 연구하고, 이를 정치·사회적으로 실천하고 확산하는 일을 해오면서 그동안 가슴 깊이 품게 된 '복지 국가 건설'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이었을 게다.

나는 진보 진영의 3정립론에서 언급되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분화하면서 '진보적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빠르게 성장할 것이고, 이들이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함께 중도 진보 정치 세력을 형성하는 구도를 그렸다. 나는 이렇게 형성된 '중도 진보 정치 세력'이 장차 '보편주의 복지 국가' 건설을 주도할 것으로 바라본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복지 국가를 시대정신으로 인정하는 중도 보수 정치 세력(나는 최근 좌클릭을 단행하고 있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새누리당이 복지 국가 지향의 국민 정당으로서 '중도 보수 정치 세력'으로 제대로 자리 잡길 기대하고 있다)과의 정치적 경쟁과 합의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복지 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숙의 민주주의에 의한 '합의 정치(consensus politics)'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복지 국가 건설의 열망을 품고 작년 봄쯤에 현실 정치적 방법론으로서 '복지 국가 단일 정당론'을 주장했다. 보편주의 복지 국가 건설을 단일 강령으로 하는 중도 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는 민주당의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 진영의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보편주의 복지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정치 세력이 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러한 꿈, 즉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함께 하는 복지 국가 단일 정당 건설의 꿈을 여전히 꾸고 있다. 그리고 머지않은 장래에 이러한 정치 질서가 도래할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나는 복지 국가 건설을 강렬하게 열망하는 두 사람의 전문가를 알고 있다. 한 사람은 진보적 자유주의를 통해 보편적 복지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하고 계신 분인데,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최태욱이다. 다른 한 사람은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보편적 복지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분인데,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위원 정승일이다.

이 두 전문가는 언론 기고와 강연 등의 활동을 통해 ①보편주의 복지 국가가 우리의 시대정신이며, ②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경제·사회 체제인 현행 신자유주의를 극복해야 하며, ③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정도와 방법 등의 구체적 내용에서는 다른 부분이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보편주의 복지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동반자적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최태욱은 진보적 자유주의가 충분히 진보적일 수 있고, 복지 국가로 가는 데 있어 사회민주주의 못지않은 추진력을 가질 수 있고, 오히려 레드컴플렉스가 존재하는 우리나라에서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정승일은 진보적 자유주의는 서구의 경험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에서 자칭 진보적 자유주의를 주창했던 지난 민주 정부 10년의 경험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는 입장을 펴고 있다.

최태욱과 가까운 진보적 자유주의 경제학자로는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유종일이 있고, 정승일과 가까운 경제학자로는 캠브리지대학교 교수 장하준을 들 수 있다. 최태욱과 정승일의 차이만큼이나 유종일과 장하준 사이에도 차이가 있고, 또 이들 모두는 복지 국가 건설과 관련하여 매우 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와 공통점은 복지 국가 진영의 역동성을 높이고, '역동적 복지 국가'를 달성하는 데도 크게 유익할 것이다.

▲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최태욱 엮음, 폴리테이아 펴냄). ⓒ폴리테이아
이번에 소개할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펴냄)는 우리나라에서 진보적 자유주의 학술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최태욱이 엮은 책이다. 이근식, 최장집, 고세훈, 박동천, 홍종학, 유종일, 선학태 그리고 최태욱의 옥고가 읽기 좋게 체계적으로 잘 배열되어 있다.

내가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책이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 책은 우리에게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가 진보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첫째와 관련해서는 이근식과 최장집의 글이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둘째와 관련해서는 고세훈과 박동천이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비교를 통해 자유주의의 진보적 가능성을 따져보고 있다. 또 홍종학과 유종일은 김대중 정부의 '민주적 시장 경제'를 진보적 자유주의의 제도적 모색의 하나로 분석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경제 민주화(즉, 민주적 시장 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핵심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진보적 자유주의를 제도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정치적 모색으로서 합의제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 선학태와 최태욱이 기울여온 그동안의 노력은 이미 널리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자유 없이 살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싫은 미래이며, 나는 한시도 살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이근식 교수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첫째, 자유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이다. 자유는 개인에 대해서만 사용되며, 국가·민족·계급·회사와 같은 집단이나 조직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는 자유주의가 개인주의에 입각해 있음을 반영한다. 둘째, 자유는 '사회적 자유'이다. 사회적 자유란 사상과 출판, 취업, 결사, 정치 참여, 종교 선택과 같이 개인의 사회 생활과 관련된 자유를 말한다. 이와 달리 개인의 무지와 탐욕, 나쁜 습관 등으로부터의 자유와 같이 특정 개인과 관련된 자유를 '개별적 자유'라고 하는데, 이는 사회 문제라고 볼 수 없다. 개인의 사회적 자유를 억압하고 제한하는 것은 정치권력, 경제 권력, 종교 권력, 언론 권력과 같이 모두 사회적 권력이다. 따라서 자유는 '사회적 권력의 부당한 침해로부터의 자유'라고 볼 수 있다. (32쪽)

위에서 언급된 개인의 '사회적 자유'를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보는 사회사상이 바로 자유주의(liberalism)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근대 서양 사회의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중세 봉건 사회의 장원이라는 봉건적 공동체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전환되면서 중세의 지주 귀족 계급은 힘을 잃어간 반면, 부르주아라 불린 중소상공인들은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부르주아 계급이 서양 근대 사회 발전의 주역인 '시민 계급'이다. 이근식의 글에서 시민계급이 자유주의의 주역으로 등장한 역사적 경과를 살펴보면서 자유주의를 개념을 정리해보자.

천년의 중세 시대에 수백 개의 제후국으로 분할되어 있던 영토들을 통일하고 근대 국가를 건설한 것이 절대 군주였다. 부르주아들은 18세기까지 근대 국민 국가를 건설하는 단계에서 절대 군주를 지지하고 협력했다. 절대 군주들이 영토, 시장, 제도를 통일해 주는 것은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지방 영주들의 수탈과 복잡한 규제를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부르주아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한편, 절대 군주들도 기존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부르주아 출신들을 관료로 등용했으며, 귀족이나 교회로부터 뺏은 토지를 부르주아들에게 판매했다. 그러나 통일된 근대 국민 국가가 건설된 후에는 부르주아들이 절대 군주의 전제 정치에 반항하였다. 차별적인 신분 질서에 기초한 절대 군주제는 자유주의자들이 저항한 '구체제'였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제의 중상주의는 각종의 경제 규제로 중소상공인들을 괴롭혔다. 이 때문에 평민이었던 부르주아들은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시민 혁명 과정에서 앞장서는 주도 세력이 되었다.

이렇듯, 근대 서양에서 절대 군주제를 타도한 시민 혁명의 주도 세력이 부르주아지이고, 시민 혁명을 이끈 이들의 사회사상이 바로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란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서양의 시민 혁명 과정에서 형성된 근대적 사회사상으로서 '모든 개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신념에서, 비인간적이며 차별적이었던 절대 군주제와 전통적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축으로 하는 근대 서양의 평등한 시민 사회를 건설한 주역이었던 부르주아의 건강한 시민 정신이다. 부르주아들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을 수탈하는 신분 차별을 반대했고, 절대 군주의 횡포를 막기 위해 헌법과 법으로 국가권력을 명확히 제한하는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를 주장하였으며, 자신들이 직접 국정에 참여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주장했으며, 자신들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위해 정부의 경제 규제를 철폐하는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했다. 시민 혁명 과정에서 성장한 이런 근대 시민 정신을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16~19세기 전반까지 구미에서 민주주의, 법치주의, 자유 시장 경제와 같은 근대적 사회 질서를 건설하는 데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33~34쪽)

이러한 고전적 자유주의는 "모든 사람은 사회적으로 평등하다"는 만인 평등의 사상을 기본으로 삼았다.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 짓는 핵심이 바로 이 만인 평등이라는 자유주의 정신이다. 이것은 위대한 정신이자 누구도 토를 달기 어려운 큰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핵심적 내용인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는 국가·민족·계급과 같은 집단이나 조직은 그 자체로서는 가치가 없고 오직 개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갖는다고 본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과거의 공동체적 질서와 경제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장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 특히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잘 조응하였다. 이를 정치적 자유주의와 구분하여 경제적 자유주의라 부른다. 결국, 고전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통칭하는 개념이다. 시민 혁명에 성공한 이후 중소상공인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중상주의가 몰락하고 경제적 자유주의가 실시되었던 바, 특히 19세기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전성 시대였다. 이후의 경과를 좀 더 살펴보자.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빈부 격차, 불황과 같은 시장의 실패가 분명히 인식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지지는 약화되었으며,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 질서 자유주의(order liberalism), 이타적 자유주의(egalitarian liberalism)처럼 고전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여러 자유주의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정치적 자유주의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만인 평등을 주장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는 진보성과 보편타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반면에 경제적 자유주의는 문제가 아닐 없었다. 그래서 19세기 말 영국에서 사회적 자유주의가 등장하였는데, 이 시기에 자유의 주적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빈곤이라는 주장이 공감을 얻으면서 정부가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통해 빈곤 해결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자유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새(new) 자유주의'로 영미에서 널리 공감을 얻었다.

이러한 사회적 자유주의의 관점을 더욱 확대해 빈곤만이 아니라 불황과 실업, 독과점과 환경 파괴와 같은 시장 실패 전반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경제 개입을 대폭 확대한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자본주의 황금 시기를 풍미한 수정 자본주의, 즉 복지 국가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보적 자유주의를 반대하고 고전적 자유주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미에서 등장하였는데, 이 사상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작은 정부와 자유방임주의 경제 정책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는 현대에 부활한 고전적 자유주의인 것이다. 하이에크, 프리드먼, 뷰캐넌 등 현대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전후의 주류 경제학자인 케인지안들은 개입주의 내지 복지 국가의 옹호자들이다. 이처럼 현대의 자유주의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두 가지 자유주의로 나뉘어 있다. (43쪽)

여기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 여기서 작년 봄에 진보 정당의 주요 지도자들이 제기했던 3정립론으로 되돌아가보자. 대한민국에서 현대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어디에서 어디까지 분포되어 있는가(정치적 범위). 이명박 정부의 주도 세력은 자유주의인가? 그들 스스로를 '뉴 라이트'라고 칭하고 있는데, 자유주의가 맞는가. 새누리당은 자유주의 정당인가. 그러면 민주통합당은 어떤가. 당시 진보 정당의 지도자들은 아마도 한나라당은 보수, 민주당은 자유, 그리고 진보 정당은 진보로 구분하고, 가까운 미래에도 이러한 이념적 정치 질서를 그대로 전제한 듯하다.

그런데 앞의 인용문에서도 나왔듯이, 현대 자유주의는 자유지상주의에서부터 진보적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특히, 최태욱은 이 책에서(12쪽) 진보적 자유주의는 "사회민주주의만큼이나 진보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쯤 되면, 현대 자유주의의 포괄 범위는 더 넓어지는 셈이다. 한나라당의 주류였던 친 이명박 세력이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운 신자유주의(경제적 자유주의) 세력이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최근 새누리당의 신주류도 동일하게 볼 것인가? 아니면 자유지상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의 중간 쯤 어디엔가 위치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 나는 이들을 자유지상주의로 몰아가는 데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이는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정파적이거나 감정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복지 국가에 대한 지지를 강하게 천명하는 새누리당의 일부 개혁파 정치 세력은 어디에 위치지울 것인가. 이들은 최소한 중도적 자유주의 정도로는 봐야 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들 개혁파가 민주통합당의 오른쪽에 위치한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인들보다 덜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 거의 모두를 광의의 현대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라고 보는 데 별 이견이 없다.

그리고 양당 정치인들의 상당수가 '신자유주의(경제적 자유주의)'라는 지점에서 겹친다고 보는 데 대해서도 이견이 없다. 최태욱의 주장처럼, 진보적 자유주의가 사회민주주의만큼 진보적이라면 기존 진보 진영의 상당 부분도 광의의 현대 자유주의에 포함될 개연성이 크다. 이 경우, 자유주의의 범위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넓어진다.

정치적 자유주의와도 배치되는 한국 사회의 '수구 꼴통' 보수 세력과 계급 정치와 집산주의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통 사회주의 세력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정치 세력이 현대 자유주의에 포함되는 셈이다. 그래서 문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많은 수의 자칭 자유주의자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새누리당 나성린 의원도, 민주통합당 강봉균 의원도 자유주의자이고, 이 책의 공동 저자인 홍종학과 유종일도 자유주의자이다. 하지만 이들은 같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전자는 '경제적' 자유주의자이고, 후자는 '진보적' 자유주의자이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시류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

도대체 진보적 자유주의는 현대 자유주의의 스펙트럼에서 어느 정도 진보적이어야 '진보적'인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가? 민주 정부 10년을 진보적 자유주의로 볼 것인가. 자칭 진보적 자유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그렇다고 본다. 그런데 진보 진영의 전문가들 대부분은 이 시기를 신자유주의(경제적 자유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작년 봄의 정계 재편 논쟁에서 3정립론이 아니라 '보수-중도 보수-중도 진보-진보'의 4정립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 여기서 보수는 자유지상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적 보수주의 세력이며, 중도 보수는 중도적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온정적 보수주의 세력이며, 중도 진보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연합 세력이며, 진보는 민주 사회주의 세력이다.

이 구도에서 볼 때, 한국 사회가 향후 10~20년에 걸쳐 달성해야 할 보편적 복지 국가는 중도 진보 세력의 주도 하에 중도 보수 세력이 함께 하는 '합의제 민주주의'에 따른 '합의 정치'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중도 진보 정치 세력을 '복지 국가 단일정당'으로 명명하고, 이를 빠른 시기 이내에 성사시켜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진보적 자유주의나 사회민주주의는 모두 '경제 결정론'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있다. 정치는 곧 민주주의적 방법론을 말하는데,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대가 곧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방법론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개인주의를 핵심적 기초로 삼고 있다. 결국, 이게 시민 개개인의 정치 참여를 의미하는 시민 민주주의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적 자유주의의 이념은 좋고, 이의 진보성도 인정되는데, 이것을 실천할 방법론이 결핍되어 있다는 게 이 책의 저자 중 한명인 고세훈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을 간략히 살펴보자(120~124쪽).

무엇보다 진보의 개념에는 개혁의 방법으로서 '아래'가 하나의 집단/계급으로서 조직되거나 동원된다는 사상이 제시되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평등의 원리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는 돈(불평등)의 원리에 입각한 자본주의(시장)를 제어하거나 교정해 낼 수 있는 정치 체제이다. '시장을 거스르는 정치'야말로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본령이다. 역사의 진행과 더불어 그런 민주주의가 보편적 정치 형태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추동한 계급 권력이라는 엄정한 매개가 작용했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시장을 거슬러왔는가.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당연하게도 그 작동이 원자화된 개별 시민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수준의 집단 혹은 단체를 동원함으로써, 계급 권력으로 매개될 때 비로소 실효성을 지닌다. 선진 복지 국가 체제가 시장을 거스르는 정치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파편화된 개인들이 아니라 노동의 집단적 혹은 계급적 동원을 제도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럽의 복지 국가 체제가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세훈은 상이한 운행 원리를 가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현실 세계에서 복지 국가 등의 형태로 양립할 수 있었던 것은 계급 권력 간의 길항 또는 긴장이 동반된 잠정적 타협이 역사의 특정 국면마다 다양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상쇄력'을 시장 안팎에서 정치적으로 제도화하는 체제로 정의해도 무방하며, 이러한 정의야말로 진보의 방법론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고세훈은 개인주의에 기초를 둔 진보적 자유주의의 민주주의 버전인 시민 민주주의의 취약한 지점을 정확하게 공격하고 있다. 이에 대해 최태욱은 "사실 자유주의는 특정 계급의 배타적 이념이 아닌 탓에 노동조합과 같은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하부의지지 기반을 갖추고 있기는 어렵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하부가 반드시 조직된 노동 계급일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편다. 그는 시민 사회의 다양한 이익들이 정당을 통해 표출되고 집약되는 과정에서 실제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 창출된다고 할 때, 그것이 아래로부터 지지되고 동원된 개혁 조치가 아니라고 할 까닭이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오히려 이 부분이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사상적 만남과 정치적 연합의 필요성을 웅변해 준다고 본다. 전자는 개인주의와 자유에서 출발하였고, 후자는 집산주의와 평등에서 출발하였다. 이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다 필요로 한다. 이러한 양대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자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는 개인주의에 기반을 둔 시민민주주의로 국한될 수는 없으며, 이래서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달성하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우리는 연대(solidarity)를 필요로 한다. 노동 계급을 중심으로 한 근로 대중이 연대의 우선적 주체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누가 뭐래도 사회민주주의 몫이다. 유럽 복지 국가 정당 정치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유럽의 복지 국가 건설을 주도해왔던 것이다.

나는 최태욱이 주장하는 시민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정당 민주주의적 해법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보편주의 복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 세력뿐만 아니라 중산층을 포함한 광범위한 세력의 '복지 국가 정치 동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연대는 '계급 내 연대', '계급 간 연대'뿐만 아니라 계급과 개인, 개인과 개인 간의 연대도 있는 법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 따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언급한 바 있는 지역 사회에서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을 구축하기 위한 복지 국가 시민 정치 운동을 주창해왔다. 복지 국가 대한민국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이러한 시민 정치 운동은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복지 국가 시민 정치 운동은 '정당 민주주의의 활성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선학태와 최태욱이 '합의제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정치 제도적 방법론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조정 시장 경제 체제인 '민주적 시장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달성할 것인가?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 제도(소선거구제와 다수대표제)를 비례대표제, 다당제 그리고 연립 정부 등의 협의주의 정치 제도로 개혁해야 한다는 데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전문가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또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 복지국가소사이어티도 올해의 중점 사업으로 '비례성 높은 선거 제도'의 쟁취를 내걸었다.

앞서 내가 주장하였던 4정립의 논리도 비례성 높은 선거 제도를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 즉 정당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이루어지는 것과 정확히 맥락을 같이 한다.

ⓒ프레시안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