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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살인…전래 동화의 '무서운' 맨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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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살인…전래 동화의 '무서운' 맨얼굴! [어린이책은 고통이다] 상상박물관의 '세계의 전래 동화 시리즈'
어린이날 발행되는 '프레시안 books' 89호는 어린이 책 특집으로 꾸렸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어린이 책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마음껏 펼쳤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어린이 책은 무엇입니까? <편집자>

우리 현대인들이 자주 잊으려고 애쓰는 사실 한 가지는, 어린이도 고통을 안다는 것이리라. '때 묻지 않은 동심'이라는 판타지 뒤에, 일부러 곱고 고운 동요의 가락 뒤에, 현실 속 어린 '사람'들의 숨은 진실이 있다. 물론 아이들이 괴로워하는 일은 어른이 보기에 별 일 아닌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사소한 일에도 서러워하는 걸 보면, 그 때문에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이 찾아올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우리 어른들은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고진감래라며 성공하려면 겪어야 하는 통과제의라며 애써 스스로를 타이른다. 괴로움이 심할수록 거들떠도 안 보던 흔한 클리셰나 멘토의 말씀에 매달린다. 이런 격언의 세계를 아직 모르는 아이들이라면? 나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세계 여러 나라의 옛 이야기를 읽은 게 도움이 됐지 싶다.

전래 동화에는 고통이 가득하다. 굳이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조한욱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을 끌고 들어오지 않더라도. 옛 이야기 속에서는 왕자와 공주조차 괴로운 일을 겪는다. 가난한 농부며 목동은 말할 것도 없고. 고통도 얼마나 심한지. 납치와 생이별은 예사, 사지절단에 죽었다 살아나는 일도 종종 있다. 그래도 대체로 해피엔딩 아니냐고?

대신에 이야기도 끝나버리는 걸. 영원한 행복 따위, 현실에서도 보기 힘들지만, 옛 이야기에서도 접할 수 없다. 고통이 끝나면 언제나 이야기도 끝. 그 순간부터 인생은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는 뜻일까. 야박하기는.

어린 시절 옛 이야기에 빠져들며 우리는 앞으로 찾아올 세상의 온갖 고통에 자연스레 면역력을 키우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고 힘센 자의 횡포에 시달리는 주인공들. 때로는 권력자에 희생당하고 때로는 맞서 싸우고 때로는 그를 무시하고 조롱한다. 세계 어디에서도 옛날부터 사람들은 고통을 받았구나, 그러면서도 용케 힘을 내 살아남았구나! 세계 전래 동화를 통해 나는 이런 것을 배웠다.

아, 물론, 옛 이야기에 고통만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주인공이 처참하게 '끔살'당한 후 작은 새로 환생하는 일도 가끔 있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 뜻을 꺾지 않는다. 힘센 사람 마음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희망도 있고, 어떤 모진 일을 당해도 뜻을 굽히지 않는 용기도 있다. 꾀를 부려 해결 방법을 찾아내기도 많다. 그러고 보니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다는 달콤한 꿈도, 마음을 굽히지 않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오리라는 기개도, 나는 모두 옛 이야기를 통해 접한 것이었구나. 현실에서 목격할 일은 없지 않은가.

내가 어릴 때는 세계 전래 동화 시리즈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어린이 읽을거리가 많이 늘었고 창작 동화의 비중도 높아진 것은 좋은 일이나, 전래 동화 출판도 그만큼 다양해지지 않은 것은 개인적으로 아쉽다. 요즘에는 상상박물관에서 나온 '세계의 전래 동화 시리즈'를 가장 좋아한다. 문장도 좋고 지역 선정도 좋고 그림도 좋고, 말하자면 책에 정성이 듬뿍 담겨 있어서 참 좋다.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것도 세계 전래 동화의 매력이다. 낯선 이름이며 낯선 땅이며 낯선 일상생활이며 낯선 괴물이며 온통 못 보던 환경을 접하며 우리는 먼 시간과 먼 장소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끝에서 우리는 이 낯선 이들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받고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인간 세상은 아주 다양하지만 또한 비슷비슷한 곳. 옛 이야기는 이렇게 타자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상상박물관의 '세계의 전래 동화 시리즈'는 지역 선정도 정성스럽다. 옛날 창비 아동 문고의 '세계 동화 시리즈'처럼, 우리가 자주 접하지 못하는 다양한 지역의 옛 이야기를 골고루 모았다. 라틴 아메리카, 티베트, 인도네시아 발리, 싱가포르, 필리핀 지역의 옛 이야기를 또 언제 이렇게 좋은 그림과 함께 접할 수 있을까.

▲ <장화 신은 고양이>(샤를 페로 지음, 구스타브 도레 그림, 김소라 옮김, 상상박물관 펴냄). ⓒ상상박물관
그렇다고 자주 접하는 유럽 지역의 전래 동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세계의 전래 동화 시리즈'는 독일과 프랑스, 북유럽과 러시아의 동화와 함께 아름다운 고전 일러스트레이션들을 소개한다. <장화 신은 고양이>(프랑스)는 19세기 최고의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정성어린 판화와, <왕의 빨래를 훔친 엄마 트롤>(스웨덴)은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요절한 일러스트레이터 욘 바우어의 환상적인 그림과 어우러졌다.

사실 만화가인 내가 이 시리즈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아름다운 고전 일러스트레이션 때문이었다. 한편, 현대의 작가들이 그림을 붙인 책들도 하나 같이 이에 뒤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요정에게 장가든 소년>(티베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분은 만화 <도깨비 신부>로 유명한 말리 작가님.

'세계의 전래 동화 시리즈'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스핀오프라 할 만한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엘레그바의 춤>(니나 자프·스티브 자이틀린 지음, 주영이 그림, 엄해영 옮김, 상상박물관 펴냄). 부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수수께끼와 정의 이야기'.

어린이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며 정의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질 때 읽어보면 참 좋을 책이다. 미국인 저자 둘이서 정의라는 주제에 관한 세계 곳곳의 옛 이야기를 모았다. 그 소스가 얼마나 다양한지, 가나·나이지리아·라오스·베트남에, 중국의 포청천과 한국의 봉이 김선달 이야기도 있다. 김선달이 어떤 식으로 사적 소유와 정의라는 거창한 주제에 관련되어 있는지는, 직접 한번 읽어보시길.

진짜 좋은 점은 이 책이 단지 정의가 좋은 것이며 불의한 자들은 물리쳐버리자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 정의 못지않게 자비와 관용 또한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저자들 자신의 말처럼 "어떤 이야기는 정의로운 사람이 단 하나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또 어떤 이야기는 수많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단 한 번 옳은 일을 했을 때 과연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도 될 것인지 묻습니다." 이 나이 들어 좀 부끄럽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련다. 정의와 자비에 관한 라오스의 이야기 '새가 된 부부'와 동유럽 유대인의 이야기 '한 줌의 진흙'을 읽으며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둘 다 이 책에서 처음 본 이야기들인데, 이런 이야기를 왜 내가 몰랐을까 아쉽기도 했다.

또 이 책은 인간의 힘으로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도 보여준다. 표제작 '엘레그바의 춤'은 사태의 양면을 보지 않으면 판단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인간으로서 사태의 양면을 보기란 사실상 어렵다는 것까지 시사한다. 나이지리아 요루바족의 이 이야기가 노예 무역으로 잡혀온 쿠바 사람들 사이에도 퍼져있다는 현실 역시 세상의 고통을 보여준다. 멕시코 이야기 '수프 나눠 먹기'는 이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 무슨 정의가 있냐는 무시무시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책은 정의의 용사가 나타나 세상을 한방에 구원하리라 애써 믿는 어른들도 좀 읽었으면 좋겠다. 이미 정의의 용사가 나타나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보지 못할 뿐이라고 믿는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고 보면 고통이 찾아올 때 닳고 닳은 클리셰니 격언에 집착하는 어른들도 세계 전래 동화를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푸라기만 붙들고 있다가 가라앉는다면 어쩌려고. 옛 이야기를 쭉 다시 읽으며 이런저런 문제들을 처음부터 천천히 생각해보면 어떨지 싶다. 일단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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