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입법의원 제63차 본회의에서 '친일파 특별법'이 논의되는 광경을 4월 16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이 회의에서 '재수정위원회'가 만들어져 기존의 '수정위원회'와 맞서게 된다. 원래 이 특별법 제정에는 중간파와 좌익이 열심이어서 수정위원회에 많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제 재수정위원회는 우익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서우석, 장면, 김익동, 김영규, 송종옥의 5인이었다.
재수정위원회는 5월 5일 제66차 본회의에 재수정안을 내놓았다. 원래의 수정안과 중요한 차이는 주임관 이상 칙임관 이하 관리 및 도회, 부회 의원 등 식민지 지배 기구 참여자를 모두 부역자로 규정하지(당연범) 않고 그 중 '악질'에만 제한한다는(선택범) 것이었다. 조선 왕실 후예인 '왕족'도 제외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6일, 7일)
이 안건을 다룬 5월 6일의 제67차 본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엄격한 수정안과 관대한 재수정안을 각각 지지하는 의원들 사이의 대립이 첨예했기 때문이다. 이 회의의 의결 사항은 '절충위원회'를 만들어 수정안과 재수정안을 절충해서 다음 회의에 제출하게 하는 것이었다. 절충위원회는 재수정위원회 5인과 이에 반대하는 김호, 신기언, 박건웅, 장자일, 이종근의 5인으로 구성되었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8일)
5월 7일과 8일 회의에서는 재수정안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우익 측 의원들은 재수정위원들을 중심으로 계속 관대한 기준을 주장했지만, 그 기준이 민족주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빠져나갈 구멍이 좀 커지는 정도였고, 법적 책임은 겨우 빠져나가더라도 도덕적 위신은 손상을 피할 수 없을 만한 기준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절충'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5월 9일 제70차 본회의에서 전환점을 만났다.
입의 제70차 본회의는 9일 오후 1시 20분에 개회되어 민족 반역자 등 처단법 재수정안을 계속하여 상정하고 제2독회를 하였는데 개회 벽두에 김광현 의원은 8일 러취 군정장관이 기자단 회견석상에서 입의는 불급한 사항을 가지고 시일을 보낼 것이 아니라 먼저 보선법을 제정하라는 말에 대하여 입의로서 깊이 고려하여 방금 진행 토의 중인 민족 반역자 처단법안을 보류하고 보선법부터 먼저 하자는 동의가 있었으나 수 의원의 반대로 차 동의는 보류키로 하였다. 이어서 예정대로 민족 반역자 등 처단법 재수정안을 중심으로 제2독회에 들어가 왕공을 처단하느냐 아니하느냐는 데 대하여 재수정안 제2장 제2조 일본정부로부터 작(爵)을 수(受)한 자의 가부를 논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여운홍 문무술 장연송 원세훈 제씨 등 처단하자는 의원과 양제박 등 수 의원의 관용케 하자는 제의가 있었는데 결국 이의 가부를 표결한 결과 재석 63명 29대 19로 재수정안 그대로 일본정부로부터 작을 수한 자로만 하자는 편이 유리하였으나 이 표결은 재석의 과반수가 못되었으므로 미결로 되고 다시 격렬한 논쟁을 전개한 후 재차 표결한 바 35대 20으로 재수정안이 통과되어 오랫동안 이론이 분분한 왕공은 처단 조항에서 삭제되기로 하고 습작자만을 부일협력자에 삽입키로 되었다.(략) (<조선일보> 1947년 5월 10일)
왕족을 처단 대상에서 제회하기로 결정한 것인데, 상징성이 큰일이다. 일본에서도 천황의 전쟁 범죄 논란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조선의 왕족으로 식민 통치자의 우대를 받은 자들에게 민족 반역이나 부역의 죄를 추궁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이와 교묘하게 엇갈리는 문제다.
극단적 보수 입장에서 보면 왕족은 나라의 주인이었고, 합방으로 인해 나라를 빼앗긴 피해자다. 그러나 민주주의 관점에서는 다르다. 왕족은 나라를 지킬 책임을 가진 관리자였는데 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고 일본의 우대를 받았다면 '배임(背任)'의 죄가 있는 것이다. 왕족에게 이 죄를 묻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본의 우대를 받은 자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대개 관선 의원으로 포진해 있던 민족주의 강경파는 이 문제의 표결에서 밀렸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태세를 보였다. 정작 더 큰 문제는 선거법 우선 처리를 위해 특별법 진행을 중단하자는 주장이었다. 5월 8일 러치 군정장관이 기자 회견에서 선거법 우선 제정을 강경한 표현으로 촉구하자 한민당은 이튿날 이에 호응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입법의원에서도 독촉국민회의 김광현 의원이 이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다.
1947년 5월 11일자 <서울신문>에 이에 관한 몇 의원의 토론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김광현은 자신이 민선의원이므로 민의를 잘 안다고 주장했다. 관선의원인 여운홍이 진짜 민중의 소리는 친일파 특별법을 요구하고 있다고 반박하자 한민당의 홍성하는 선거법을 앞세우는 데 반대하는 관선의원들은 선거를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러자 원세훈이 나서서, 친일파가 공직을 다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공정한 선거가 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
김광현 : 나는 민선의원이므로 민의를 잘 알고 있다. 지금 일반은 빨리 보선법을 통과시켜 실시하라고 부르짖고 있다.
여운홍 : 민중의 소리는 보통선거법을 먼저 하라고 외친다고 하나 내 귀에는 민족 반역자들에 대한 조례를 먼저 하라는 민중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홍성하 : 두 의원의 민중의 소리는 모두 타당한 말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민중은 만약 보통선거를 실시하면 관선의원은 한 사람도 뽑힐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보선법을 먼저 통과시키자는 동의를 반대하는 이가 대개 관선인 것을 볼 때 민중의 소리는 과연 옳다는 것을 나는 느끼는 바이다.
원세훈 : 나는 의원자리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나머지 사퇴하려고까지 했으나 우리가 그만두면 남에게 자치능력이 없다는 구실을 줄까 해서 참고 있는 터이다. 지금 보선법을 먼저 하고 민족 반역자 등에 대한 조례는 나중에 밀자는 측의 심정은 무엇인가? 서울시의 8구청장이나 경찰서장 자리는 대개 일본시대의 관리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상이므로 이런 현상을 이용하며 보통선거를 먼저 해서 불량배의 안전책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나는 노골적으로 밝혀두는 바이다.
토요일인 5월 10일 예정되어 있던 제71차 본회의는 성원 미달로 유회되었다. 친일파 특별법을 제쳐놓고 선거법을 다수결로 밀고 나가려는 우익의 전략에 대응책이 없는 중간파에서 유회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월 12일 월요일 회의에서 선거법 상정이 의결되었고 13일 제 72차 본회의에 선거법 초안이 상정되었다.
입법의원의 선거법기초위원회에서는 의원선거법 초안을 작성하여 거 3월 26일의 제68차 본회의에 상정하였던 바 동 초안에 대한 대체토론이 있은 후 동 초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하여 심사 보고케 하기로 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지난 13일의 제71차 본회의의 결의에 의해서 동수정안이 72차 본회의에 상정되었는데 그 내용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동 수정안은 전문 제10장 62조로 되어 있어 선거권자는 만25세에 달한 자 피선거권자는 만30세에 달한 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1) 금치산자 준금치산자 심신상실자 급 심신허약자 2) 자유형의 선고를 받고 그 집행 중에 있는 자 3) 일제하에 중추원 부의장 동 고문 동 참의 도회 의원 부회 의원 또는 칙임관 이상의 지위에 있던 자 중에서 악질행위가 소저한 자 4)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조선인민에게 손해를 끼치며 일본인과 협력한 자 중에서 악질행위가 소저한 자 5) 법률에 의하여 선거권을 박탈 또는 정지당한 자는 선거권 급 피선거권이 없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7년 5월 14일)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의 사유는 1946년 10월 입법의원 선거 때와 거의 차이가 없다. 친일파 배제는 제3항과 제4항에 규정되어 있는데, 제3항은 배제 범위가 극히 좁고 제4항은 기준이 모호하다. 그래서 특별법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배제되어야 할 인물들이 입법의원에 대거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익에서는 그런 상황이 되풀이되기를 바란 것이다.
선거법 초안 중 선거권 자격을 만25세 이상으로 한 점이 눈에 띈다. 선거법 준비는 우익에서 앞장선 일인데, 전 세계에 유례없이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도 25세라면 몰상식하게 높은 나이인데, 하물며 그 시절에. 평균수명도 지금보다 훨씬 짧았고, 중학교만(지금의 고등학교) 졸업해도 지식인으로 통하던 그 시절에.
관선 의원으로 있던 진보적 인사들의 항의로 결국 선거권 자격은 만25세로 낙착된다. 젊은이들의 투표를 수구파에서 두려워한 것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확인된다.
이 일을 들여다보며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권의 연령 제한이 하나의 근원적 결함이란 생각이다. 어린이들의 주권이 배제되어 유권자 평균 연령이 높기 때문에 10년 뒤 20년 뒤에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 아랑곳 않는 정책 노선이 득세하기 쉬운 것 아닌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부채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이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갓난아기에게까지 모두 선거권을 주면 어떨까? 법률행위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미성년자의 선거권은 그 보호자가 대신 행사하게 한다. 아이들 수대로 부모들이 투표권을 더 행사한다면 장래를 더 많이 생각하는 쪽으로 정치에 압력이 일어날 것 같다.
이것이 너무 과격하다면 의무 교육과 연계시키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의무교육은 온전한 시민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마친 사람은 온전한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짐과 함께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중학교 과정까지로 그 준비가 충분치 않다면 의무 교육을 고등학교 과정까지 늘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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